17세기 네덜란드는 국가적 번영을 누린다. 유럽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던 암스테르담도 경제와 문화의 발전을 이끄는 도시가 된다. 동양의 귀한 꽃 튤립도 이 시기 네덜란드에 들어온다. 암스테르담에선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하루 사이에 수십배로 가격이 뛰는 튤립 모종 거래에 뛰어들었다. <튤립 피버>는 튤립 투기가 성행했던 17세기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한 치정극이다. 수녀원에서 자란 소피아(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나이 많은 거상 코르넬리스(크리스토프 왈츠)와 결혼한다. 결혼으로 부를 얻은 소피아는 코르넬리스가 원하는 아들을 갖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사리 임신이 되지 않는다. 그 무렵 이들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젊은 화가 얀(데인 드한)이 집안에 발을 들인다. 초상화를 의뢰받은 얀은 소피아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소피아 역시 젊고 매력적인 얀에게 마음이 끌린다. 한편 소피아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마리아(홀리데이 그레인저)는 생선장수 윌리엄(잭 오코넬)과 사랑하는 사이지만, 이들의 사랑은 소피아의 외도를 마리아의 일로 착각한 윌리엄에 의해 위기를 맞는다.
<튤립 피버>의 인물들은 사랑 때문에 위험한 선택을 한다. 소피아와 마리아는 서로의 비밀을 숨겨주는 대가로 위험한 계략을 꾸미고, 사랑에 빠진 젊고 가난한 남성들인 얀과 윌리엄은 튤립 투기에 뛰어들어 사랑의 도피를 꿈꾼다. 이 영화에는 악역이 없다. 영화의 안타고니스트, 즉 젊은 두 커플의 사랑을 가로막는 존재는 코르넬리스가 아니라 시대 그 자체다. 누구나 투기로 인생 역전을 꿈꿀 수 있고, 누구나 전 재산을 탕진할 수 있었던 시대. 탐욕에 눈먼 대신 사랑에 눈먼 순수한 인물들의 열병은 그래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동화 같은 결말을 맺는 싱거운 치정극이 되고 만다. 영화가 특별히 공을 들이는 건 17세기 암스테르담의 활기와 욕망과 문화다. <튤립 피버>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사이먼 엘리엇은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가 피터르 더호흐와 가브리엘 메취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시대 재현만큼 캐스팅도 화려한데, 알리시아 비칸데르와 데인 드한, 크리스토프 왈츠와 주디 덴치 등 세대를 아우르는 배우들이 과거의 시간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데보라 모가치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