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죄와 벌> 배우 예수정, "내가 배운 신파는 감정에 충실하다는 의미... 요즘일수록 신파가 필요하다"
2018-01-04
글 : 임수연| 사진 : 오계옥|
<신과 함께-죄와 벌> 배우 예수정, "내가 배운 신파는 감정에 충실하다는 의미... 요즘일수록 신파가 필요하다"

“나문희·김혜자·김해숙 선생님과 함께 거론될 어머니의 얼굴이 하나 더 늘었다.”언젠가 아는 기자들과 배우 예수정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최근 매체에서 어머니 캐릭터로 자주 등장한 그는, 처창한 눈빛으로 무조건적인 헌신을 보여주는 모성을 연기하곤 했다. <신과 함께-죄와 벌>(이하 <신과 함께>)에서 예수정은 최근 필모그래피의 집결판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농아 어머니는 화재로 첫째 아들 자홍(차태현)을 잃고 군부대 총기 오발 사고로 둘째 아들 수홍(김동욱)마저 떠나보낸다. 어떤 상황에도 자식에게 보이는 무한한 포용력은 영화의 주제와 직결된다. 하지만 처연한 모성애는 수십년간 무대 연기를 해온 예수정의 편린에 불과하다. 평소 즐겨 찾는다는 갤러리 카페에서 만난 그의 첫인상은 청바지에 부츠를 신은 ‘멋쟁이’였다. 인터뷰를 마친 후, 예수정의 진수는 그간 그가 보여준 모성애 외에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앞두고 연습하던 당시 시나리오를 받았다고.



=최지선 프로듀서가 대본을 갖고 찾아왔다. 우리가 저지르지 않을 수 없는 죄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음, 난 다 걸리네” (웃음) 하면서 읽었다. 사람이 죄를 저질렀어도 진심으로 용서받으면, 서양식 표현으로 구원이고 동양식 표현으로 환생한다는 시선이 따뜻하고 흥미로웠다. 지금은 부모자식간의 처연한 마음이 신화화되어버린 것 같은데, 가물가물한 그 마음이 다시 등장해서 굉장히 신선하더라.



-두 아들을 그리워하는 엄마를 연기하는데 사실 자식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크로마키 앞에서 연기했던 배우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만난 적은 있으니까, 두 아들이 모두 내 마음에 이미 찍혀 있지 않나. 그러니 현장에 가면 배우를 낚는 그물이 잔뜩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가슴이 바스러질 때 의지할 지팡이는 그 사람의 체취가 묻어 있는 어떤 것이다. 자홍이의 화분, 자홍이의 영정 사진, 장례식장의 국화꽃 냄새가 모두 연기하는 배우에게 그물이 된다. 수홍이는 탈영을 할 아이가 아니라고 항의하기 위해 부대를 찾아가면 거기에서 훈련받는 젊은이들과 흙모래를 보는 순간 아들에 대한 마음이 저절로 솟구친다. 영화에 무척 고마운 게, 그 현장을 그대로 만들어 놓으니까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다. 그냥 현장에 놓여 있는 그물에 나를 놓으면 저절로 들어가는 게 많다.



-하지만 컴퓨터그래픽(CG)이 많이 들어갈 작품에는 그런 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부산행>(2016)이 그랬을 것 같다.



=그럴 땐 연극과 비슷하다. 무덤이 아니라 빵이 놓여 있어도 무덤이라고 상상하며 연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자기 안의 상상력을 발휘하다 보면 배우를 움직이는 굉장한 에너지가 솟구치고 다른 곳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연극이라고 내내 그런 연기가 필요한 건 아니다. 2시간 정도는 실사처럼 연기하고 5분가량 확실하게 디자인화된 연기를 한다. 영화처럼 클로즈업이 있는 것도 아니니 연극적인 밑줄 긋기가 없으면 관객에게 전달이 안 된다. 크로마키 앞에서 연기할 때도 한번쯤 시나리오를 확 뚫고 나오는 강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을 거다. <부산행> 때 정차한 기차가 달리고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해야 했다. 어릴 때 도깨비놀이, 권총놀이 하듯이 아주 즐기면서 했다. 슬픔이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연기해야 할 때는 지옥에서 벌 받을 걸 미리 숙제하는 느낌이라면 오히려 스펙터클한 장면은 재미있다.



-이번 <신과 함께>는 그런 슬픔, 고통에 관한 감정 연기가 많았다.



=이 장면이 슬퍼야 한다는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행히 상대배우가 있지 않나. 상대와 함께하면 저절로 감정이 우러나온다. 상대를 100% 믿고,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듯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이면 저절로 감정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빛난 장면은 아무래도 수홍과 어머니가 만나는 현몽 신이 아닐까.



=그 장면은 물이 포도주가 되는 순간이다. 얼마나 간절하면 기적이 일어날까. 그 간절함을 예감한 후 수홍의 말을 들었다. 아들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돌려서 말하지 않나. 그런 의미라는 건 앞 상황이 있으니 누구라도 다 안다. 이때 어머니의 감정은 무엇일까. 이 순간이 아니면 더이상 들을 수 없는 아들의 모든 말을 다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다. 거기에 대한 힌트도 이미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평생 가슴에 담고 있던 말을 얼마나 들려주고 싶었을까. 대사를 참 간결하게 잘 썼다. 군더더기가 없다.



-일각에서는 신파라고들 표현하지만 결국 거의 모든 관객의 마음을 울렸다.



=신파는 나쁜 것이 아니다. 연극 학교에서 배운 신파는 감정에 충실하다는 의미였다. 요새는 사랑도 감정에 충실하게 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요즘일수록 신파가 필요하다. 나 같은 경우 이성이 너무 작동해서 삶을 건조하게 운영하고 있으니 감정에 충실하게 삶을 운영해볼 필요를 많이 느꼈다.



-실제로 연극 연출을 하는 딸과 축구협회에서 일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이지 않나. 감정에 충실한 <신과 함께>를 찍으며 어머니로서 느낀 점이 있다면.



=영화와 달리 말을 하는 어머니다. 자식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얼마나 많이 했겠나. 죄악을 많이 저질렀다. (웃음) 원래는 고통스러운 세상에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생명을 또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결혼할 때 애를 안 낳겠다고 했다. 막상 낳으니 좋았다. 그런데 교육만큼은 잘 시키고 싶었다. 질서와 자립을 중요시 했다. 그러니 자식들에게 엄마가 얼마나 차가웠겠냐. 자식의 마음도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고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신과 함께>를 하면서 이 역이 나에게 멘토가 됐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수십년간 연극에 집중하다 영화 및 드라마에는 최근 들어 많이 출연하게 됐다. 30~40대쯤 매체로 넘어오거나 아예 넘어오지 않는 배우들과는 좀 다른 행보다.



=모든 건 우연이다. 기자님도 인정하지 않나. 나중에 그 우연을 잘 살펴보면 이유가 있긴 하다. 영화가 재밌어졌다. 예전에는 신성일·김지미 주연의 영화라고 하면 주인공 이외의 역할은 모두 병풍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감독들이 잠깐 등장하는 역에도 인생을 부여했다.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은 좀비들에게 그냥 죽을 수도 있는 캐릭터를, 동생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갖고 배우가 연기하게 했다. 관객은 공유의 얼굴을, 신성일과 김지미의 얼굴을 더 보고 싶어 한다는 유혹을 물리치고 “이게 작품의 폭을 더 넓혀준다”는 의지를 갖고 잠깐 나오는 캐릭터의 인생과 시각을 인정해주는 거다.




-주연을 맡은 연극은 한 작품과 캐릭터에 대해 깊게 팔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드라마는 상대적으로 한정된 대본 안에서 캐릭터를 파악해야 하고, 특히 드라마 현장은 매우 촉박하게 흘러갈 때도 있다.



=연극은 향신료를 찾기 위해 인도를 향해 떠나는 탐험을 함께하는 느낌이다. 그 과정에서 온갖 난항을 겪기도 하겠지만 소망을 놓지 않으면 결국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영화나 드라마는 이미 감독이 탐험을 끝낸 상태다. 내가 거기에 너무 많이 개입하려고 하면 걸리적거린다. 선장의 의도를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드라마의 경우 아직 내가 아마추어라서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을 잘 계산하지 못한다. 그냥 이 진심을 계속 안고 있는 게 편하다. ‘어차피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는데 그냥 편안하게 할걸’ 싶다가도 ‘수정아, 넌 테크닉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그 진심마저 없으면 하나도 없어’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김용화 감독에 의하면 촬영장에서 극중 캐릭터처럼 말을 거의 안 했다고. 계속 감정을 안고 가기 위함이었나.



=그 역할이 되려고 하는 연기법은 아니다. 나를 알기 때문에 분수껏 행동하는 거다. 현장에서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내 캐릭터에 몰입하려면 이 산꼭대기에서 저 산꼭대기에 가듯 힘들고 시간이 걸린다. 나도 슛 들어갈 때만 캐릭터로 변하고 평소에는 즐겁게 있고 싶다. 아마추어라서 그렇다.



-아마추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누구보다 베테랑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최불암의 모친을 연기한 고 정애란 배우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대해 보고 들은 것도 많았을 것 같다.



=극단 시공간(현재의 명동예술극장)에서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먹이다가 무대에 나가야 하면 옆에 계시던 변기종, 강계식 선생님이 날 얼러가며 돌봐줬다. 유모가 아닌 ‘유부’였다. (웃음) 그때도 7살 이하는 극장에 못 들어갔다. 5살쯤에는 수건으로 얼굴을 두르고 맨 앞줄에서 연극을 봤다. 연극이 시작될 때 종소리가 울리고 막이 올라가며 새로운 세계가 열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평범한 학생이었고 시선이 늘 사회쪽에 가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지원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학창 시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릴케의 시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대학 입학 지원할 때 과에 접수번호 1번으로 지원했다. 나중에 “1번이 왜 여학생이야. 재수 없어”라는 말도 들었다. 동기 중에 여학생이 2명밖에 없을 만큼 여자가 없었거든.



-그러다 고려대학교 극회에서 처음 연기를 했다고.



=“너네 어머니가 배우니까 와서 해봐”라고 하기에 “해볼까?” 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에도 희곡에 대한 놀라움, 희곡이 공연되기까지 탐험해가는 과정의 반가움에서 연기를 계속 했다. 장두이, 유덕형 등 기가 막힌 선배들을 만났다. 유덕형 선배가 “연극은 예술”이라고 말했다. 아, 그런 거였어? (웃음) 연극이 더 궁금해졌는데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거 아닌가. 무언가를 배운다고 하면 학교부터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같은 학교에서 석사를 따고,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도 갔다.



=가방끈만 긴 거다. (웃음) 지금도 누구나 그렇지 않나. 돈 많이 안 벌어도 되고 학교에 있으라고 하면 그냥 학교로 가고 싶지. 학교는 가장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다. 석사 때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로물루스 대제>에 사로잡혔다. 정의를 위해 로마를 몰락시키는 방향으로 간다는 게 흥미로웠다. ‘<로물루스 대제>에 나타난 비극성’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다. 또한 브레히트의 “극장은 시민의 계몽 공간”이라는 연극관이 날 사로잡았다. 브레히트에 대해 좀더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갔다. 그런데 막상 가서는 공부는 별로 안 했다. 말도 어렵고 가보니 볼 것도 너무 많고. 그러다가 애가 태어나고, 애 키우는 것도 재미있고. (웃음) 그래도 새로운 세상을 오랫동안 경험하고 왔다. 유럽권을 돌며 연극에 관계된 사람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니까. “노르웨이 하면 헨리크 입센!” 하며 찾아갔다.



-유럽쪽 연극을 좋아하고 묵직한 작품을 하던 시기를 거친 후 최근 영화, 드라마 작업을 활발히 하고 있다.



=원래 사회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좋아했다. 그런데 너무 사유만 하고 사는 사람은 일상이 허접하다. (웃음) 굉장히 단조롭고 허수아비 같고 삶의 진수를 모른다. 영화나 드라마를 하면서 소박하고 진짜의 삶을 갖고 있는 인물들을 만났다. 그런 게 삶인지도 몰랐던 내가 일상적인 표현을 하고, 캐릭터들이 나에게 구체적인 멘토가 된다.



-지금까지는 그 인물들이 대체로 누군가의 어머니였던 것 같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닌, 특별히 연기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나.



=<도둑들>(2012)의 최동훈 감독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마피아든 마피아를 잡는 경찰이든 뇌물로 경찰을 매수한 사람이든 다 잡아넣는 역을 하고 싶다. 피도 눈물도 없이 아주 건조한 역. 보통 나이 든 여자배우에게는 그런 역을 잘 안 준다. 내가 원래 사람이 건조해서 하면 참 잘할 텐데 소문 좀 내달라. (웃음)



-드라마 <마더>와 영화 <허스토리>에 출연한다.



=<마더>는 드라마 <공항 가는 길>(2016)을 함께한 김철규 PD와의 인연으로 단 1회 출연한다. 우리는 허물어지고 녹슬어져가는 유기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도 갖고 있지 않나. 영의 세계가 없어지지 않은 어떤 인물을 연기한다.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는 위안부 할머니의 일본 재판에 관한 영화다. 일본인에게 수백, 수천번 강간당했던 사실을 누가 공개하고 싶겠는가. 어떤 이유에 의해 어느 순간 커튼을 열고 공개하는, 개인적인 삶에서 공적인 삶으로 나오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담배 피우고 욕도 하는 할머니를 연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