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영상자료원 서울 상암동 본원에서는 김기영 감독 20주기 기념 전시 ‘하녀의 계단을 오르다’가 열리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훈 기자가 다녀와서 쓴 이번호의 참관기(46~49쪽)를 참고하기 바라며, 전시는 1층 한국영화박물관에서 5월 19일까지 계속된다. 참관기에서 김성훈 기자가 김기영 감독 <파계>(1974)의 연출부였던 유지형 감독이 쓴 그와의 인터뷰집 <24년간의 대화>에서 인용한 것처럼 “김기영 감독은 괴물”이었다. 심지어 같은 책에서 유지형 감독에 따르면, <화녀>(1971)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김기영 감독이 서울 주자동 골목에 2층 양옥을 구입했는데, 흉가여서 시세보다 싸게 구입했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 흉가에 사는 괴물 감독이라, 종종 그의 영화가 복층 구조의 집을 중요한 무대로 삼았기에 어딘가 묘하게 어울려 보인다. 실제 이번 전시에서 <하녀>(1960)의 배경인 2층 양옥에서 2층 공간인 동식(김진규)의 피아노방과 하녀(이은심)의 방을 거의 흡사하게 설치, 재현하여 관람자가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보통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 대해 해설할 때, <하녀>를 필두로 변화하는 시대상에 따른 중산층 가정의 위기, 그리고 인간 욕망에 대한 탐구라는 표현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1983)보다 무려 20년이나 앞선, 그러니까 70살이 된 부모를 깊은 산중에 갖다버리는 고려시대 풍습을 표현주의적으로 묘사한 <고려장>(1963) 등을 통해 집단의 규율과 인습에 희생되는 인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두를 관통하는 것은 <이영일의 한국영화사 강의록>에서 영화평론가 이영일이 언급한, 이른바 ‘검은 피의 미학’이었다.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나온다”는 실제 김기영 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그렇게 규정했던 것이다. 김성훈 기자의 같은 참관기에서, 이번 전시를 준비한 정종화 한국영화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전설의 컬트영화 대가가 아닌 당대의 사회문제를 기민하게 카메라에 담아냈던 리얼리스트로서의 김기영 감독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한다. 김종원 영화평론가도 오래전 <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에서 “김기영 감독의 컬트적 측면만 부각되고 중요한 출발점인 사실주의가 무시된다면, 균형을 잡은 그의 한 축(軸)을 잃는 결과가 된다”고 쓴 적 있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만한 지점이 바로 거기 있다.
최근 tvN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 시즌2의 윤여정을 보며 김기영 감독이 떠오르기도 했다. 알려졌다시피 1966년 T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윤여정에게 김기영 감독의 <화녀>는 25살의 영화 데뷔작이었다. 순박한 시골 처녀 명자(윤여정)가 가정부로 들어가 그 집의 남편(남궁원)과 불륜을 저지르고, 결국 임신과 낙태 끝에 그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당시 흥행 부진으로 고민하고 있던 김기영 감독을 기사회생시킨 작품이었으며 윤여정은 이 데뷔작으로 대종상,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시골을 떠나 친구와 함께 서울로 향하던 명자가, 서울에 31층짜리 빌딩이 있다는 얘기에 “31층? 떨어져 죽기 편리하겠다”며 까르르 웃던 그 웃음소리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박찬욱 감독은 자신을 영화감독의 길로 이끈 영화 중 하나로 <화녀 ’82>(1982)를 꼽았으며, 봉준호 감독은 대학 시절 황학동 시장을 뒤져 VHS비디오로 출시된 그의 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고 했다. 그들 두 감독의 영화에서 김기영 영화의 흔적을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도 무척 흥미롭다. 모두 꼭 한번 체험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