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이모티콘
2018-01-17
글 : 김혜리

※<고스트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탠저린>

<탠저린>과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숀 베이커 감독은 미국의 경제사회적 주변부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발견하되, 고발하거나 동정하는 외부자의 관점을 멀리한다. 공간을 쓰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그의 각본과 카메라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매일 들락거리는 장소가 드라마의 무대임을 잘 알고 있다. 매춘으로 생계를 잇는 트랜스우먼 단짝 신디(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와 알렉산드라(마이야 테일러)의 고단한 크리스마스이브를 담은 영화 <탠저린>에서, 진실이 드러나고 기적 같은 위안이 찾아오는 공간은, 플라스틱 일회용품으로 가득찬 도넛 가게와 클럽 화장실 그리고 썰렁한 코인 세탁소다. 별도의 세트 없이 다섯편의 저예산 장편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의 공력이 조용히 빛난다.

12/29

결과적으로 ‘신의 한수’란 소리를 들었지만,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고스트 스토리>를 촬영하는 동안 무서웠을 것 같다. 두개의 눈구멍을 오려낸 침대 시트를 뒤집어쓴 배우가 유령을 연기한다는 아이디어가 막상 현실이 되어가는 광경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스탭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못 본 척하는 중은 아닌지, 공개 즉시 세상 우스갯거리가 되진 않을지 불쑥불쑥 불안했으리라. 1억5천만원에 불과한 제작비를 감독 본인과 제작진이 직접 충당했기에 감행할 수 있었던 모험이다. <고스트 스토리>는 여러모로 작아짐으로써 커진 영화다. 감독은 모든 것을 단순화했다. 로케이션은 대부분 한채의 집 안에 한정했고 구체적 지역은 불분명하다. 주인공 캐릭터의 이름도 C와 M이라는 이니셜로 줄였다. 현대임은 분명하지만 하이테크 기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 실내는 이 이야기가 1980년대의 일인지 2010년대의 일인지 분별할 수 없게 한다. 모든 단순화가 성공적인 추상화에 이르지는 않으며, 가장 구상적인 예술인 영화가 추상화를 통해 풍성한 결과를 낳는 일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고스트 스토리>는 때아닌 죽음을 맞은 개인의 멜로드라마에서 출발해 삼라만상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우화로 자연스럽게 확장한다. 영화의 앞과 뒤에 북엔드처럼 들어간 천공의 이미지는 <고스트 스토리>의 승화를 오직 살짝 거들 뿐이다.

어떤 관객은 <고스트 스토리>의 유령 디자인을 보고 ‘꼬마 유령 캐스퍼’를 추억할 것이고 더 젊은 관객은 이모티콘을 떠올릴 거다. <덩케르크>의 톰 하디가 눈만으로 연기했다면 <고스트 스토리>의 유령에게는 눈 연기마저 차단돼 있다. 주인공인 C(케이시 애플렉)에게 허락된 감정표현은 돌아보는 고개의 각도, 어깨의 기울기 정도다. 숀 베이커 감독은 유령이 천을 쓴 배우 케이시 애플렉처럼 보여선 안 된다는 사실을 촬영 도중 깨닫고, 보다 추상적 연기를 요구했다고 한다. 얼굴은 가려져 있지만 보디 랭귀지가 확연했던 <프랭크>의 마이클 파스빈더 경우와 다르게, 스탭이 대신 유령 역으로 재촬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표정과 팔다리를 대신해 실망과 고독, 위트를 드러내는 요소는 시트가 주름 잡히고 끌리는 모양이다. <고스트 스토리>의 미술팀은 원하는 정확한 실루엣과 드레이프를 위해 흰 천 안에 페티코트를 넣고 주름을 매만졌다. 스톱모션 애니메이터들이나 할 법한 수고다. 무심한 흰 천에 감정을 투사하며 드라마를 읽어내는 <고스트 스토리>의 관람 체험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없는 실버 스크린에 떠오른 이미지의 유령을 통해 관객이 서사를 구성하는 시네마의 제유다. 중요한 것은, 배우가 흰 천을 뒤집어쓴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만으로 감정의 투사와 발전을 끌어내기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결국 <고스트 스토리>의 감정선을 지탱하는 힘은 첫째 화면 안 어디에 어떤 무게감으로 유령을 배치할지 정하는 프레이밍, 그리고 유령을 담은 숏 앞뒤에 어떤 숏을 붙이고 생략할지 좌우하는 편집이다. 이를테면 영안실에서 홀연히 일어나 생전의 집을 향해 벌판을 건너가는 유령은 대지에 비해 너무 자그마해 미약해 보이면서도 자연의 일부라는 인상을 준다. 실내를 맴도는 유령의 모습을 메모하며 ‘우두커니’, ‘풀썩’, ‘어리둥절’ 같은 감정 실린 부사를 무심코 쓰다보면 그와 같은 감상의 근거가 심사숙고된 카메라의 앵글과 블로킹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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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스토리>는 1:1.37이라는 고풍스런 화면 비율에다 네 꼭짓점이 둥글려진- 이른바 인스타그램 아이콘 모양- 프레임을 선택했다. 가로가 긴 사각형이 영화 화면의 표준으로 여겨지는 1960년대 이후에 이 비율을 취한 영화들은 어쩔 수 없이 “무슨 목적으로?”라는 질문을 부른다. 꿈과 해몽은 별개지만 가능한 짐작이 몇 가지 있겠다. 가장 단순하게 보면, 비좁은 프레임은 이승의 집이라는 상자를 떠나지 못하는 유령의 자발적 감금 상태를 관객에게 곧장 전한다. <라스트 홈>의 부동산업자(마이클 섀넌)는 “집은 그냥 상자야. 정 붙이지마. 그냥 상자를 팔아서 더 큰 상자를 사는 거야”라고 설파한 바 있는데, <고스트 스토리>의 부동산 철학은 정확히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생전에도 이사를 주저하던 C에게 집은 이야기로 가득 찬 특별한 상자다. 옛날 사진의 인화지 모양과도 비슷한 프레임은 <고스트 스토리>를 휘감고 있는 노스탤지어와도 조화롭다. 집주인이 속속 바뀌는 <고스트 스토리>의 중반부를 군데군데 멈춰 인화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족 앨범 속을 걸어가는 유령을 보게 될 것이다. 더불어 가로가 긴 보통의 화면비율은 블로킹의 어려움을 불렀을 것이다. 하얀 천을 쓴 유령이란 어떻게 해도 시선을 독점하는 골치 아픈 피사체이기도 하다. 주로 실내에 머무는 이 영화가 시점숏 외의 숏을 자유롭게 구사하려면 넓은 화면은 걸림돌이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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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기도해야 적절할지 마음을 뒤적이며 제야의 종을 기다린다. 아무리 만족스런 한해였다고 해도, 마지막 날의 이 시각 무렵이면 애도와 비슷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고스트 스토리>를 보기 전까지 나는 애도란 죽음 뒤에 살아남은 자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엉클 분미>도 삶의 반대편 기슭으로 나의 관점을 옮겨준 적이 있었다(내가 <고스트 스토리>와 한 영화를 짝지어 동시상영을 마련할 수 있다면 유력한 짝은 <엉클 분미>나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퍼스널 쇼퍼>가 될 거다). <고스트 스토리>가 우주적 섭리를 가르쳐주는 영화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건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가 더 잘한다. 다만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아름답고 슬프게, 냉철하고 간혹 유머를 담아, 한밤중 집에서 나는 정체 모를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고 설득한다. 대신, “거기 당신, 괜찮아요?” 속으로 묻게 만든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 아무도 없게 된 자리에 여전히 존재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 영화가, 올해 나의 마지막 영화임을 감사한다. 굿나이트, 굿 럭.

<다키스트 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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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다키스트 아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재해석하는 영화도 아니고 윈스턴 처칠이라는 정치인의 전모를 그리는 프로젝트도 아니다. 윈스턴 처칠이라는 아이콘을 스스로 창조한 매우 독특한 개인 윈스턴 처칠(게리 올드먼)의 퍼스낼리티를, 일촉즉발 위기상황을 배경으로 포착한 영화다. 영화에 따르면 처칠 부인 클레멘타인(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은, 영국 국왕을 포함해 모두가 속내를 몰라 저어하는 처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인물이며, 한번 입장을 정하면 결코 바꾸지 않는 독불장군으로 알려진 남편의 숨은 자기 불신과 갈등을 잘 아는 동지다. 무엇보다 클레멘타인은 <다키스트 아워>가 강조하는 위트와 유머에 있어서 처칠의 훌륭한 맞수다. 클레멘타인이 날렵하게 걷어올리면, 처칠은 느릿하게 튕겨낸다. 각자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와 게리 올드먼의 대화는,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의 듀엣을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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