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경사기도권]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공동정범> 한국 다큐멘터리영화가 이룩한 가장 빛나는 순간
2018-01-22
글 : 허지웅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김지은 (일러스트레이션)
우리는 언제나 우리끼리 싸운다

<공동정범>의 첫 장면은 기묘하다. 분명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각색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정당한 절차 없이 그렇게까지 할 리 없다고 애써 우기고 싶은 마음 탓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났다. 건물의 옥상. 당장 허물어질 듯 조악한 망루. 거기에 퍼부어지는 물대포.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복잡하다. 이익과 이익이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조정과 협의가 요구된다. 하물며 공권력이 개입될 때에는 더 많은 절차와 조정의 과정이 따른다. 최소한 원칙은 그렇다.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이 주거생존권을 요구하며 남일당 건물 위에 망루를 설치한 건 사건 전날이었다. 하루만에 강경진압이 실행되었다. 신속하고 과격한 진압이었다. 어떤 대화도 협상도 없었다. 공권력의 전능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물대포가 쏟아졌고 화재가 발생했다.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다.

사건 수개월 전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업무 때문에 옛 용산구청 앞을 자주 지나야 했다. 구청에는 “세입자가 구청에 와서 떼를 써도 소용없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떼를 써도, 라는 글자에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떼를 써도, 라는 말의 행간에 묻어나는 짜증과 혐오, 눈앞에서 빨리 치워버리고 싶다는 마음, 공무원이 시민에게 그렇게 당당히 말하고 글로 써 붙이는 게 가능한 시대정신. 그것은 아마도 용산참사의 전조였을 것이다.

연분홍치마가 용산참사를 다룬 두 번째 다큐를 완성했다고 했을 때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이미 전작 <두 개의 문>이 충분히 훌륭했고 후일담으로는 그만한 사유의 파고를 이끌어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동정범>은 눈부신 다큐다. 이토록 취재원의 시선 깊숙이 동반하면서도 동시에 객관성과 보편성을 성취해내는 다큐는 드물다. <공동정범>은 <두 개의 문>과 같은 소재로부터 출발하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건 이후를 아우르면서 용산참사라는 공공의 트라우마는 물론, 우리의 크고 작은 개인사들을 관통하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관객을 인도해낸다. 이런 보편성이야말로 <공동정범>을 빛나게 만드는 정수다.

<두 개의 문> 개봉 즈음에 썼던 기고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필요 이상으로 차가울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여전히 선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건 <두 개의 문>이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서, 자기 입장을 최대한 감추는 대신 객관적 사실들을 종합하고 조립해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개의 문>이 사건을 다루는 태도는 오히려 진압경찰의 진술과 채증 동영상, 재판 기록과 같은 공적 자료를 잘 조립해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확연하게 그날 실제 무슨 일이 왜 벌어졌는지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읽힌다.”

<두 개의 문>이 진압 경찰의 증언과 사실관계를 증명하는 것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면, <공동정범>은 <두 개의 문>이 미처 다루지 못했던 철거민(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수감되어 있었다)의 이야기를 다룬다. 공동정범이라는 말로 묶인 이들의 삶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망가져 있다. 공동정범은 하나의 범죄를 각자가 분담하여 이행하였지만 각자가 전체에 대해 형사책임을 진다는, 즉 기소된 내용에 관해 모두가 같은 처벌을 받았다는 의미다.

<공동정범>은 구속 철거민 5명의 출소 이후 삶을 좇는다. 지난 일을 내심 수습해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당시 상황을 설명할 때마다 과거 시제가 아닌 현재형으로 서술한다. 이들의 삶이 여전히 2009년 1월 20일의 망루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이들은 몸이 망가지거나 마음이 무너졌다. 분을 못 이겨 성격이 바뀌었다. 누구 할 것 없이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들이 공동정범으로 묶인 서로를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용산 철거민과 타 지역 연대 철거민으로 나뉘어 원망한다. 우리는 도우러 간 사람들인데 왜 같은 처벌을 받아야 했는지 원망한다. 너희는 이해 당사자가 아닌 그저 도우러 온 사람들인데 왜 더 억울해하냐며 원망한다. 너희들보다 내가 훨씬 더 아프고 괴로웠다는 이유로 원망한다. 피해 당사자들끼리 모여서 함께 다독이며 살았어야 했는데 우리 가운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서 이토록 서로 보지 못하고 살았다며 원망한다. 명확한 목표 없이 그저 모여서 지나간 상처 이야기만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모이지 말자고 한 거라며 원망한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이 사건으로 인해 더 많이 조명되고 더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원망한다. 나는 더 많이 조명되고 더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많은 책임을 지어야 했다며 원망한다. 이들 용산참사 철거민 공동체는 완전히, 붕괴되어 있다.

<공동정범>은 이들이 여러 차례 모여 서로의 불신을 드러내고 반목하는 광경을 거르는 것 없이 그대로 담아낸다. 사법 당국이 불공정하다고 보여질 만한 이유가 충분했던 재판 과정을 거쳐 이들을 ‘공동정범’으로 묶어버렸을 때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었다. 이들의 다툼을 지켜보다가 우리는 지난 시간 매우 여러 번 깨달았지만, 다시 잊어버리기를 여러 번 반복했던 사유에 다다른다.

국가 폭력은 서로 돕는 자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이와 같은 사유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고 있는 크고 작은 다툼과 반목, 편가르기가 애초 어떤 원리를 통해 작동하고 있었는지 상기하게 만든다. 도와야 할 사람들끼리 부지런히 편을 만들고 벽을 쌓아 올리며 서로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가운데 공동의 목적을 두고 형성되었던 공동체는 위기를 맞는다. 비관과 자조, 불신으로 인한 무관심이 역치에 이르게 될 즈음이면 관공서의 벽에 “세입자가 구청에 찾아와 떼를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와 같은 현수막이 붙어도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마침내 공동체가 붕괴된다. 해선 안 될 것들이, 해도 무방한 것이 되는 시대는 그렇게 도래한다.

그래서 <공동정범>의 후반부는 더욱 눈여겨볼 만하다. 이들의 공동체가 회복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용산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사건 당일의 기억을 서로 교차 검증해보는 기회를 갖는다. 불편한 마음을 뒤로하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들은 객관적 증언과 기록 필름들이 자신들의 파편화된 기억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나간 시간 때문에, 육신의 아픔 때문에, 누구도 해소해주지 않는 억울함 때문에, 피해의식에 짓눌려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축소되거나 과장되거나 아예 지워진 기억들. 그 기억들을 교차해서 공유하면서 이들은 객관적인 시점으로 사안을 재구성하는 기회를 갖는다. 나아가 서로를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말은 쉽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살아내가면서 경험했듯이, 서로 마주하고 아픈 걸 들추어 공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나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으로 객관화하여 이해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기억해내는 것. 그것이 공동체를 회복하는 시작이었다. 용산참사의 진실과 시비를 가리기 위한 첫 단추다.

이 시점에서 <공동정범>의 시선은 다시 한번 용산참사 이해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넘어 관객 개별의 삶을 침범한다. 우리는 왜 반복적으로 진영 내에 진영을, 조직 내에 조직을, 가정 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분열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공동정범>이 제기하는 질문의 보편성은 한국 다큐멘터리영화가 이룩한 가장 빛나는 순간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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