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코코>는 소리와 영상으로 기억을 소환한다
2018-01-24
글 : 나호원 (애니메이션 평론가)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코코>의 세계

영화관의 불빛이 완전히 꺼지면 등장하는 신데렐라의 성, 그곳에는 두 가족이 산다. 하나는 월트 디즈니의 직계가족. 미키마우스가 휘파람을 불며 방향키를 돌리는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 1928)의 대표 장면이 이 가족의 문패이다. 또 하나는 픽사. 이들의 문패는 룩소 주니어가 폴짝거리며 등장하는 장면이다. 한 지붕 두 가족, 전략적 공생관계, 그러면서도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치열한 경쟁의식. <코코>의 상영은 이러한 긴장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픽사에서 만든 장편은 늘 단편애니메이션을 먼저 보여준다. 장편 <코코>도 마찬가지다.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라는 단편이 마중물 구실을 한다. 잠깐! <겨울왕국>(2013)의 그 올라프? 반갑기도 하지만 갑자기 혼돈이 인다. <겨울왕국>은 디즈니 스튜디오의 작품이 아니던가?

디즈니·픽사, 한 지붕 두 가족

뭐지, 이 상황은? 일단 지켜보자. <겨울왕국>의 짧은 속편 혹은 크리스마스 후일담과도 같은 이 작품을 보면 꽤나 치밀한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기도 하고, 내심 디즈니와 픽사의 경쟁적 동거관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는 본편 <코코>를 위한 바람잡이 역할을 충실히 한다. 짧은 이야기 속에 무려 여섯개의 노래(물론 하나는 아주 짧아서 온전한 노래의 형식으로 쳐주기 애매하다만)가 담겨 있다. 크리마스 스페셜 미니 앨범으로 내놓을 만한 구성의 뮤지컬 단편애니메이션은 <겨울왕국>을 싱어롱 콘텐츠로 즐겼던 관객에게는 반가운 보너스와도 같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코코>의 관객에게 ‘싱어롱 이벤트를 다시 즐길 준비 되셨습니까?’라고 외친다. 우리는 <코코>에서 노래가 얼마나 큰 역할을 차지하는지 이미 알고 객석에 앉아 있다. 오프닝 무대 치고는 꽤나 성대하다.

그런데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는 그 짧은 시간에 뭔가 끈질긴 집착을 보여준다. 바로 ‘가족의 전통’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가족의 전통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올라프의 짧지만 화끈한 여정이 펼쳐진다. 그리고 <코코>에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와 <코코>는 ‘가족의 전통’이라는 시제를 두고 디즈니 스튜디오와 픽사 스튜디오가 각각 자신들의 답안을 제시하는 백일장과도 같다. 그런데 이미 두 스튜디오가 출제자의 의중을 꿰뚫고 있다. 즉, 가족은 소중하며, 전통이라는 것은 외부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가족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의 과정이며, 세상은 다양한 전통이 어울려 공존해야 한다는 모범답안을 공유한다.

좀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모범답안을 찾아가는 도중에 배치된 몇 가지 설정들이 서로 겹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다락방 속 상자. 이는 추억의 저장고이면서 흔히 무의식 속 기억으로 이해된다. 엘사와 안나가 공유했던 크리스마스의 추억, 그리고 미구엘이 가족 몰래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념물을 모아둔 곳. 차이라면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에서는 거기에서 해답을 찾았고, <코코>에서는 거기에서부터 해답을 찾고자 출발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교차점은 바로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한 접근법을 들 수 있다.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에서는 뜨개질을 활용한 애니메이션이 등장한다. 단순한 패턴으로 구현된 형상은 2차원 평면이면서도 털실의 3차원적 텍스처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털실 한올 한올은 마치 저해상도의 비트맵 덩어리를 연상시킨다. 이에 화답하듯, <코코>는 파펠 피카도(papel picado)라는 멕시코의 전통 색종이 공예를 끌어들인다. 천이나 종이에 구멍을 뚫어 형상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기법을 활용하여 주인공 미구엘 가족의 역사를 펼쳐 보인다. 빨랫줄에 널린 색조각들은 그 자체로 영화의 스토리 보드가 된다(움직임이 결부된 애니메틱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카메라는 이러한 2차원 조각의 앞뒤 좌우를 훑어가면서 3차원 공간에 나부끼는 이미지의 평면성을 한껏 부각시킨다. 뜨개질과 색종이 조각을 둘러싼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탐색은 디즈니와 픽사가 애니메이션 제작을 어떻게 ‘가업’으로 꾸려나가려 고민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도 ‘수작업/수공예’를 공통적으로 부각시키는 식으로. 이처럼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와 <코코>는 여러모로 닮아 있다.

디즈니·픽사, 가문의 전통을 찾아나서다: 해골춤, 음악, 멕시코

언제부턴가 우리는 더이상 픽사를 픽사라 하지 않고 디즈니·픽사로 부른다(입에 붙으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하긴 할 테다). 디즈니와 픽사 중 누가 진정한 가업의 계승자인지는 앞으로도 두고 볼 일이기는 하지만 주인공 미구엘처럼 우리도 사진 하나를 들고 그 가문의 전통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월트 디즈니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그렇다, 소비에트연방의 바로 그 ‘에이젠슈테인’ 그리고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사는 바로 그 ‘월트 디즈니’가 맞다). 꽤나 뜬금없고 의아해 보이는 이 사진은 1930년대 초반에 찍은 것이다. 어떤 연유로? 당시로 말하자면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된 직후였다. 몽타주 이미지와 사운드를 어떻게 결합시킬지 관심이 컸던 에이젠슈테인에게 가장 전범이 되는 작품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었다. 여타의 실사영화와 견주어볼 때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소리와 영상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미키마우징’이라는 말이 영상과 사운드의 ‘싱크’를 대표하는 용어로 쓰이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 노하우를 어떻게든 알아내고자 에이젠슈테인은 먼 길을 떠나왔다. 기록상 최초의 유성애니메이션은 <증기선 윌리>지만 에이젠슈테인을 비롯한 다수의 영화감독들에게 펀치 한방을 먹인 작품은 <해골춤>(The Skeleton Dance, 1929)이었다. 해골들이 뼈다귀를 두드리며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내다니!

막상 할리우드에 와보니 에이젠슈테인도 이곳에서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채플린이 함께 시간을 보내주긴 했지만 아무도 제작 제안을 하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에이젠슈테인이 발걸음을 옮긴 곳이 바로 멕시코다. 멕시코에 머물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은 아무래도 해골 이미지들이라 현지에서 제작한 <멕시코 만세!>에는 해골이 그득하다. 디즈니의 <해골춤>에 이끌렸던 에이젠슈테인의 행보는 멕시코의 해골 전통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 와중에 교류를 한 현지의 유명 예술가 중 한명이 디에고 리베라였다. 멕시코의 전통과 당대의 시대상을 뒤섞어 거대한 벽화 작업을 하면서 국민 화가로 추앙받던 디에고 리베라. 그런데 지금은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듯싶다. 에이젠슈테인이 프리다 칼로와도 교류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디즈니와 해골, 멕시코 그리고 프리다 칼로를 연결시키려면 또 다른 경유로를 거쳐야 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프리다 칼로의 생애를 그린 <프리다>(2002)를 떠올려보자. 이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셀마 헤이엑)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맬 때, 갑자기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한 해골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작품 전체의 스타일과는 유독 구분되는, 말 그대로 ‘튀는’ 장면이다. 이 작품을 감독한 줄리 테이머가 일반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강렬하게 각인시킨 계기는 <라이온 킹>(1994)을 뮤지컬로 옮겼을 때다. 줄리 테이머의 손에서 새롭게 탄생한 <라이온 킹>은 무엇보다 화려한 색감을 빼놓을 수 없다.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색감보다 한층 더 도드라진 채도로 무대에 올려진 컬러 팔레트였다. 이러한 정글의 화려함이 <프리다>에서는 해골의 차가움으로 급변한다. 이렇듯 멕시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코코>의 해골 커넥션은 디즈니의 족보에서 꽤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굳이 요약하자면, ‘디즈니-에이젠슈테인-디에고 리베라-프리다 칼로-줄리 테이머-디즈니…’ 뭐 이런 식의 연결고리라고나 할까. 디즈니·픽사가 이런 식의 가계도를 애써 추적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쨌거나 <코코>에서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예술의 대명사로 등장한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관객은 ‘멕시코’ 하면 ‘프리다 칼로’를 즉각 떠올린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반면 디에고 리베라는? 미구엘 가족의 성이 ‘리베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에서 그나마 그 흔적을 찾아야 할까? 그러기엔 리베라는 흔한 멕시코 성씨이긴 한다.

어깨동무를 한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월트 디즈니.

시네마라는 기록 미디어의 족보

미구엘이 그랬던 것처럼 디즈니·픽사도 가족의 전통을 좇다보면 가업의 족보 또한 챙겨봐야 할 것이다. 시네마토그래프가 탄생한 1895년, 같은 해 11월에는 또 다른 쇼킹한 이미지가 선보였다. 뢴트겐이 엑스레이 기술을 활용하여 살아 있는 사람의 뼈를 촬영한 이미지를 발표한 것이다. 별안간 갑자기, 한쪽에서는 피부와 근육을 손상시키지 않고 뼈를 보여주는 ‘사진 아닌 사진’, 다른 한쪽에서는 사실적인 사진 이미지가 살아서 움직이는 ‘활동사진’의 세상이 펼쳐졌다. <코코>에서 살아 있는 자는 피부로 덮여 있고, 죽은 자는 해골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미구엘은 죽은 자들의 세상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피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골로 위장을 해야만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뼈가 노출되면서 원래 속해 있던 살아 있는 자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진다. 엑스레이와 시네마토그래피가 겹쳐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좀더 미디어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사진과 축음기가 있다. 에디슨은 이 둘을 결합시키고자 했다. 사진은 살아 있던 순간을 영원히 담아놓는 기록물이다. 미라처럼 사진으로 온전히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면 죽은 자는 돌아갈 수 있다, 적어도 <코코>의 설정은 그러하다. 뒤집어보면 산 자는 사진을 통해 이미 떠난 자를 추억하고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코코>에서 아무도 죽은 자를 더이상 기억/추억하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했을 때, 그는 자신이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된 것마냥 한껏 들떴으면서도 그만큼이나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유인즉 조금이라도 일찍 축음기를 발명했다면, 그 사이에 세상을 떠난 이의 목소리를 기록해두었을 테니까. 에디슨은 사람들이 사진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 사진의 여러 활용법 중에서 가장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부분이 어느 지점인지를 알고 있었다. 죽은 자의 소환 혹은 기록을 통한 영생불사. 다만 사진은 살아 있을 때의 ‘순간’만을 이미지로 포착할 뿐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하지도 않는다. 소리를 기록하는 매체인 축음기는 목소리를 온전히 통조림 통(축음기의 원통과 흡사하다) 속에 영원히 저장하고, 언제든 반복해서 재생할 수 있다. 마치 가족 앨범처럼 말이다. 실제로 에디슨은 축음기의 다양한 활용 예를 제시했는데, 음악 녹음 및 재생은 순위가 한참 아래였으며, 가장 전도유망한 활용법은 가족 목소리 앨범이었다.

에디슨은 소리를 기록하는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영상에도 적용하고자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제 우리는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선 오페라 가수를 언제든, 어디서든 불러올 수 있다!” 기록 장치로서의 영화이자 복제 매체로서의 영화를 전망한 것이다. <코코>에서 에르네스토는 에디슨의 예언처럼 이승과 저승 모두에서 영생불사의 생명력을 지닌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텔레비전과 비디오라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테크놀로지가 결합한다. 미구엘은 에르네스토의 공연과 그가 등장한 영화를 비디오에 녹화하여 무수히 반복 시청하면서 빠져든다. 반면 에르네스토의 고약한 과거 행적에 대한 실체는 TV 카메라를 통해 공연장 무대 스크린 위에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이러한 폭로는 위장된 본모습을 드러내는 엑스레이와도 같다. 소리와 영상, 축음기와 사진,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 엑스레이 등 <코코>는 과거를 재구성하고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 이제껏 발명된 미디어의 계보를 하나로 묶어서 보여준다. 결국 <코코>가 미디어의 족보를 되짚으면서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혹은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되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는 것의 관계이다.

디에고 리베라의 <알라메다 공원의 어느 일요일 오후의 꿈>(벽화 중 일부)에서 해골 여인과 프리다. 해골 여인과 손잡고 있는 게 어린 시절의 디에고 리베라이고 그 뒤의 여인이 바로 프리다 칼로이다.

이런, 하필이면 지금 시기에 멕시코라니

<코코>의 제작 기획은 2013년부터 시작되었다. 2013년의 미국과 2017년의 미국은 극명히 다르다. 당시만 하더라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테다(트럼프 자신조차도!). 트럼프의 선거 캠페인에서 가장 선명했던 비전은 ‘멕시코 장벽’ 설치였다. 만리장성을 쌓겠다는 무모함은, 그러나 트럼프의 지지 기반인 반이민정책 지지자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상징이자 청사진이었을 것이다. 멕시코는 이웃이 아니라 불법 체류자의 무한 공급처와도 같았다.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오가는 관문에서 해골-얼굴을 스캔해 생전의 사진과 대조하는 절차를 굳이 따지자면 기획 당시로서는 9·11 이후 강화된 공항 내 보안검색에서 착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작품이 완성되고 개봉되던 때의 상황은 훨씬 고약하게 바뀌었다. 검색대의 스캐닝 타깃은 테러리스트에서 불법 이민으로 확대되었으며, 불법 이민자는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재분류되는 식으로 흘러간다. 그러니까, 만약 <코코>가 트럼프 당선 이후에 기획되었다면, 이승과 저승 사이의 출입국관리소는 훨씬 엄격하고, 살벌하게 묘사되었을 것이다.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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