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초등)학교 시절 전교생이 모여 원래보다 길쭉하게 생긴(압축된 화면) 국군아저씨가 대포를 옆구리에 끼고 북괴군 탱크로 돌진하던 모습, 아랫동네 농협마당 천막 안에서 온 동네 분들이 300원(?)씩 주고 모여 앉아 무협영화를 보던 기억, 쿵푸를 하던 사촌형을 따라 영주시내에 시외버스를 타고 가 무협영화를 보았던 일, 안동으로 유학(고등학교)을 가서 자취방 구할 때인가, 작은형하고 보았던 <촉산>, 고3 때 <어우동>을 보러 친구 놈이랑 극장엘 갔다가 옆자리에 수학선생님이 계신 걸 보고 도망쳐 다른 계단에 겨우 앉았는데 웬걸 뒤 계단에서 교무주임선생님이 나를 보고 계시던 일. 또다시 기겁을 하며 도망쳐서 여배우 이보희의 기막힌 누드와 함께 영화를 다 보긴 봤지만, 다음날 교실 스피커에서 “남기웅 교무실로 내려와∼!”를 들었던 기억들.
그리고 하나의 기억이 더 있다. 20대가 되어 지금은 사라진 대한극장의 대형 스크린에서 <백 투 더 퓨처>를 본 기억이다. 촌닭이 서울 상경한 지 얼마 전이고 영화감독의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기억도 희미한 당시(아! 마이클 J. 폭스도 촌닭이라고 놀림을 당했지?) 극장을 나올 때 그 설레던 가슴을 기억한다. 영화의 영자도 모르던 그때, 영화감독이라면 스필버그밖에는 모를 때, 이 영화도 스필버그의 이름과 그 재미난 포스터를 보고 간 걸로 기억한다. 로버트 저메키스란 이름은 안중에도 없었던 때였다.
<백 투 더 퓨처>를 본 건 내가 여러 연극영화학과에 연기선택으로 낙방하고 수험생의 학업과는 어긋나게 대학로를 기웃거리던 때였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지식부족으로 감히 영화학과 지망은 엄두도 못 내고 연출에 대한 지식도 없었기에 연출지망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신이 좋다든지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합격할 정도도 못되었다. 그래서 여태껏 해온 연기로라도 대학의 문턱을 넘어보려 했으나 대학은 안동 촌놈이 시골극단에서 연극 한두편했다고 선뜻 받아주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이렇듯 아무리 앞뒤를 뒤져봐도 영화감독이라는 희망사항이 거의 없는, 보인다 해도 가뭄에 콩나듯하고 힘써 보이지 않았던 나였는데 <백 투 더 퓨처>를 보고 극장을 나와서는 “나도 저런 영화를 만들어야지!” 하는 말을 뇌까렸던 듯싶다.
엉성하게 겉도는 종류의 영화감독이 된 오늘, 그때부터 10년의 세월은 넘은 듯싶다. 92년 군 제대 뒤 곽재용 감독님의 연출부로 들어간 때부터 지금까지 영화를 바라보는 나에게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게으른 탓에 부지런한 과정은 거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과정을 넘어 지금 와서 기다려지는 작품이 <백 투 더 퓨처> DVD다. DVD에는 비디오에서 볼 수 없는 감독 인터뷰라든지 당시 제작 다큐멘터리라든지 재미난 것들이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만으로 기다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백 투 더 퓨처>는 스승의 영화도 아니고 나를 감독의 길로 인도한 영화도 아니지만 무지한 나에게 첫 설렘을 가져다준 영화이고 첫 모델이 된 영화이다. 그뒤 영화인이 되고서 영화지식을 가지면서 영화들을 대했지만, 그런 나를 돌이켜보면 그것이 걸작이든 졸작이든 사회적인 품평과는 상관없이 뭔가 이물질이 낀 듯 개운치 않은 감상의 기억들이다. 진정 가락동시장에서 냉동어물을 파는 작은형님의 눈이 부럽다. <백 투 더 퓨처>에 나오는 자동차를 타고 순진한 설렘을 다시 맛볼 수 있는 대한극장 앞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면 언제나 시비를 넘어 내 스스로 추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눈을 얻을 수 있을까. 과연 영화감독이란 게 그래도 영화를 할 수 있을까? 아님 영원히 추한 입을 놀리다가 나 또한 추한 입들에 오르내리면서 막을 내릴까? 그게 영화감독의 운명이라면 일찌감치 무덤자리나 보러 다니자.
<백 투 더 퓨처>에 나오는 자동차 연료가 온갖 쓰레기더라. 그는 그 쓰레기들을 먹고 힘을 얻어 나간다. 쓰레기가 쓰레기로서 끝나지 않고 그처럼 시간을 주무르는 불꽃을 피울진대 나 또한 뭘 먹든 그걸 좋은 힘으로 되바꿔 내가 대한극장 앞에서 가졌던 그 설렘의 순수함을 되찾고, 언제일진 모르나 다른 이들에게도 그 첫 설렘을 안겨줄 수 있는 행복한 인간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