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얼터드 카본> 프로듀서 레이타 칼로그리디스 - 이야기의 원형에서 스펙터클을 창조하다
2018-02-07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최성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얼터드 카본> 프로듀서 레이타 칼로그리디스

“아드레날린으로 충만한 액션.”(<가디언>) “가장 거대하고 가장 화려해 보이는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엔터테인먼트 위클리>) 2월 2일 전세계 동시 서비스를 앞둔 넷플릭스의 신작 오리지널 드라마 <얼터드 카본>에 대한 영미권 매체의 반응이다. 블록버스터영화에 버금가는 SF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넷플릭스의 야심은 <얼터드 카본>의 크리에이터를 맡은 레이타 칼로그리디스 덕분에 가능했다. 한국 관객에겐 아직 낯선 이름인 그녀는 <아바타>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셔터 아일랜드>의 각본가였으며, 올여름 개봉예정인 SF 블록버스터 <알리타: 배틀 엔젤>의 시나리오를 제임스 카메론과 함께 공동 집필한 할리우드의 베테랑 시나리오작가다. 지난 1월 22일, 레이타 칼로그리디스가 드라마 <얼터드 카본>의 기자회견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시리즈의 총괄 제작자인 그녀가 기자회견 이외의 인터뷰에 나선 건 한국이 처음이라고. “인간의 몸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전세계에서 가장 기술 도입이 빠르고 그에 따른 변화를 빠르게 수용하는 한국 관객이 이 작품을 어떻게 볼지 기대가 된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칼로그리디스는 말했다. 여성 영화인의 불모지인 SF와 액션 장르의 콘텐츠 시장에서 독보적인 궤적을 그려나가고 있는 레이타 칼로그리디스와의 만남을 전한다.

“<얼터드 카본>이 이렇게까지 거대한 프로젝트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인터뷰 장소에 미리 세팅해놓은 촬영 장비를 둘러보며 레이타 칼로그리디스는 말했다. 10년 전 그녀가 머릿속으로만 꿈꾸던 프로젝트가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 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투입했다는 루머가 돌 만큼 큰 규모의 SF 드라마로 완성되었다는 점,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로 이어지는 드라마 홍보 일정이 어느덧 그녀를 낯선 나라 한국으로 이끌었다는 것. 자신의 상상력과 열정으로부터 비롯된 이 멋진 나비효과를 <얼터드 카본>의 제작자 레이타 칼로그리디스는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익숙지 않은 건 있다. “시나리오작가 출신이라 사진 촬영에 익숙지 않다. 다들 나를 보고 있는 가운데 사진을 찍으려니 쑥스럽고 민망하다. (인터뷰 장소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자,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까? (웃음)”

레이타 칼로그리디스. 그녀의 이름은 한국 관객에게 다소 낯설다. 하지만 그녀가 시나리오 작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했거나 도움을 준 수많은 할리우드영화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엑스맨>과 <툼 레이더>(이 두 작품은 초고 집필에 참여했다), <나이트 워치>와 <알렉산더>, <아바타>와 <셔터 아일랜드> 그리고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레이타 칼로그리디스의 이름은 2000년대를 빛낸 유수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들과 함께였다. 다만 프로페셔널한 시나리오작가로서, 레이타 칼로그리디스는 지난 20여년간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작품에 돌리는 선택을 해왔을 뿐이다.

<얼터드 카본>

새로운 제작환경에의 도전

<얼터드 카본>은 레이타 칼로그리디스의 존재감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녀 자신에게도 이색적인 행보다. 10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얼터드 카본>은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변환하고 육체를 교환하는 것이 가능해진 24세기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미스터리 누아르 장르의 드라마다. 이 작품은 레이타 칼로그리디스가 각본을 쓰고 크리에이터로 나선 보기 드문 시리즈물이다. 할리우드영화 시나리오작가로 잘 알려진 그녀가 시리즈물로 눈길을 돌린 건 <얼터드 카본> 특유의 세계관에 대한 고려, 그리고 제작 환경의 변화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리처드 K. 모건의 동명 소설(<얼터드 카본>의 원작으로, 국내에도 지난 2008년 <얼터드 카본1, 2>로 출간되었다)을 본 순간부터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원작이 담고 있는 ‘R등급’의 내용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이 작품은 명백히 수위 높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가 되어야만 했다. 예산 마련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빈지 워치’(binge watch, 콘텐츠 몰아보기를 뜻하는 말)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키며 콘텐츠 소비 방식의 판도를 바꾸어나가던 넷플릭스가 칼로그리디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일반적인 미국 드라마의 한 시즌 에피소드는 22편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적은 에피소드를 취하면서 예산을 올려 퀄리티를 높이고, 시청자들이 콘텐츠를 몰아볼 수 있게 하는 넷플릭스의 방식이 내게는 ‘시네마틱한 체험’으로 느껴졌다.” 레이타 칼로그리디스는 러닝타임이 긴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얼터드 카본>의 각본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첫 발걸음이었다.

<아바타>

언제나 질문은 같다

<얼터드 카본>은 250년 만에 낯선 행성 지구에서 눈을 뜬 한 남자, 타케시 코바치(조엘 킨나만)를 주인공으로 하는 SF 미스터리 누아르다. 한때 은하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부대인 엔보이의 일원이었던 코바치는 250년 전 처절한 패배와 함께 사살되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부자 뱅크로프트에 의해 코바치의 의식은 새로운 몸속에서 다시 깨어난다. 그는 탐정이 되어 베이시티의 뒷골목을 누비며 뱅크로프트를 살해한 자의 단서를 좇는다. “대시엘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의 열렬한 팬”이라는 레이타 칼로그리디스는 하드보일드 장르에 대한 애정에 고전 누아르영화 <키 라르고>(1948) 속 험프리 보가트의 개성을 버무려 타케시 코바치라는 자신만의 인물을 창조해냈다. “전쟁 경험이 있는 탐정 캐릭터를 특히 좋아한다”는 칼로그리디스는 참전 경험이 개인의 성격과 일상에서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하기를 즐긴다고 한다. “이러한 탐정들은 대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쿨하며, 거칠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설명대로 <얼터드 카본>의 주인공 타케시 코바치 역시 전사로서의 과거에 지속적인 영향을 받는 인물이다. 정신과 육체를 치열하게 수양했던 250년 전 코바치의 과거는 탐정으로서의 그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활로를 제시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유도한다. 홀로그램으로 가득한 <얼터드 카본>의 디스토피아적인 풍경은 너무나 명백한 영향이 느껴지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이외에도 필립 K. 딕의 소설과 윌리엄 깁슨의 ‘스프롤 3부작’,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와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기술적으로는 애플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얼터드 카본>의 제작진에게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블레이드 러너>와 유사해 보이는 점도 있겠지만 다른 점도 많다. 미래 세계의 빈부격차가 이 작품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인 만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고 레이타 칼로그리디스는 말한다.

한편 정신과 육체의 관계성에 대한 탐구는 드라마 <얼터드 카본> 이전부터 레이타 칼로그리디스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질문이다. 그녀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는 외계 생명체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하는 것이 가능해진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고, 각본가로 참여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인간의 보호자와 살인자로 분한 같은 얼굴의 두 인간형 로봇을 보여준다. “결국 내 작품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에 의해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좇다보면 도리어 인간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지 등의 존재론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다”고 그녀는 말했다.

<셔터 아일랜드>

제임스 카메론과 마틴 스코시즈, 거장 감독들과 일하다

할리우드의 유명 시나리오작가이자 프로듀서, 이제는 블록버스터급 SF 드라마의 총괄 프로듀서라는 새로운 수식어까지 얻은 레이타 칼로그리디스가 평소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수많은 이름이 빠르게 잊혀지는 할리우드에서 여성으로서, 스토리텔러로서, 영화인으로서 당신은 어떻게 빛나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 “창조의 과정에서는 실패를 피할 수 없다. 다만 실패로 인한 좌절을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칼로그리디스의 답이다. 1965년생인 레이타 칼로그리디스는 UCLA에서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했다. 그녀가 대학 시절 쓴 잔다르크에 대한 에픽 시나리오는 칼로그리디스가 졸업하기도 전에 영화사에 팔렸다. 당시만 해도 그녀는 동료 학생들보다 작가로서의 데뷔 기회를 빨리 잡은, 운 좋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성취의 달콤함은 짧았다. UCLA 재학생 레이타 칼로그리디스가 쓴 잔다르크 시나리오는 결국 영화화되지 않았고, 그녀가 수많은 각본가들 중 한명으로 이름을 올린 첫 작품인 <알렉산더>(2004)는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되며 혹평받았다. 자신의 시나리오가 누군가에 의해 얼마든지 다시 쓰여질 수 있다는 것,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뼈아픈 깨달음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실패를 겪는 행운을 만나지 않았다면 창조적 판단에 대한 확신을 지금만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레이타 칼로그리디스는 말한다.

<아바타>와 <셔터 아일랜드>, 그리고 제임스 카메론과 마틴 스코시즈라는 동시대 거장 감독들과의 작업은 수많은 도전과 실패의 연속 가운데에서 칼로그리디스에게 찾아온 기회의 문이었다. 그들과의 작업이 특별했던 건 두 감독이 “각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가장 솔직한 버전”을 연출하는 사람들이며, “모든 것이 상업화된 세상에서 여전히 예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연출자였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소회한다. 레이타 칼로그리디스의 대표작이 된 이 두 작품이 말해주듯, 환상적인 배경 속에서 유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와 스펙터클한 액션은 할리우드 제작자와 각본가로서의 그녀에게 인장과도 같은 개성이다. 그런 그녀를 두고 <할리우드 리포터>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쓰지 않는, 보기 드문 여성 시나리오작가”라는 평을 붙이기도 했다.

그리스계 미국인인 레이타 칼로그리디스에게 가장 깊고 방대한 이야기의 원천은 그리스 신화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그림 형제의 동화 대신 그리스 신화를 들려주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칼로그리디스는 “매우 육체적인 방식으로 내면의 충돌을 표면화하는” 이야기에 끌리게 되었다고 한다. R등급의 스펙터클한 액션 장면이 에피소드마다 펼쳐지는 드라마 <얼터드 카본> 역시 그리스 신화의 DNA를 이어받은 크리에이터의 작품답게 웅장하고 잔혹하다. 남성 감독과 제작자로 점철된 SF, 액션 장르의 콘텐츠 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레이타 칼로그리디스는 캐스린 비글로(<허트 로커> <제로 다크 서티>), 그리고 패티 젠킨스(<몬스터> <원더우먼>)와 더불어 21세기 할리우드에 유의미한 궤적을 새겨나가고 있는 여전사다. 드라마 <얼터드 카본>은 그런 그녀가 꾸는 더 큰 꿈이다.

레이타 칼로그리디스가 들려주는 시나리오 작법의 세 가지 노하우

첫 번째, 작가는 쓴다._ 당장 집필해야 할 시나리오가 없더라도 이야기를 쓰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매일 한 시간이라도 좋다.

두 번째, 작가는 읽는다._ 최대한 많은 작품을 읽어라.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라. 그러다보면 자신이 어떤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은지 알게 된다.

세 번째, 당신이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시나리오작가로서의 생존을 결정할 것이다._ 이건 UCLA 재학 시절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로, 여전히 가장 중요하게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다. <원더우먼>의 패티 젠킨스 감독의 예를 들어 말하고 싶다. 그녀는 샤를리즈 테론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몬스터>(2003)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녀가 남성감독이었다면 <몬스터> 이후 더 많은 기회를 거머쥐었을 것이다. <쥬라기 월드>(2015)의 콜린 트러보로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그녀가 <토르: 다크 월드>(2013) 감독으로 낙점되었다가 창작에 대한 이견으로 하차했을 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으로 패티 젠킨스는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기다렸고 도전 끝에 <원더우먼>(2017)을 성공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다. 슈퍼히어로영화를 연출한 최초의 여성감독이자, 최초의 여성 슈퍼히어로 솔로 영화를 만든 패티 젠킨스에게도 긴 좌절과 극복의 시간이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화 2018 <더 하우스 위드 어 클라크 인 이츠 월스> 프로듀서 2018 <알리타: 배틀 엔젤> 각본 2015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각본, 총괄 프로듀서 2013 <화이트 하우스 다운> 프로듀서 2010 <셔터 아일랜드> 각본, 총괄 프로듀서 2009 <아바타> 총괄 프로듀서 2007 <패스파인더> 각본 2004 <알렉산더> 각본 드라마 2018 <얼터드 카본> 총괄 프로듀서 2007 <바이오닉 우먼> 파일럿 연출 2003 <버즈 오브 프레이> 총괄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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