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공동정범>, 투쟁과 트라우마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2018-02-15
글 : 조혜영 (영화평론가)
고통을 읽는 페미니스트의 카메라

2009년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무리한 진압 끝에 화재로 사망한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감독 김일란·홍지유, 2011)은 불타는 망루 앞에서 끝난다. <두 개의 문>은 인터넷 실시간 방송, CCTV, 경찰 채증 영상과 무전녹음, 사진과 언론 보도, 경찰의 법정 진술 등 재판에 제출된 증거와 변호사, 활동가, VJ 등 진상규명을 도왔던 관계자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두 개의 문>의 카메라는 일종의 내비게이터로 관객을, 다종다양한 영상 정보를 스캐닝하며 당일의 사건과 재판을 재구성하고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찾고 해석하는 탐정이나 판사(혹은 편집하는 감독)의 위치에 둔다. 그러나 사건현장과 법정을 누비던 카메라와 관객은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부르짖는 불타는 망루 앞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카메라의 접근 불가능성은 ‘죽음의 스펙터클’이 될 수밖에 없는 이미지 정보의 한계와 농성 철거민의 현실에서 기인한다. 망루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증언해줄 이들은 <두 개의 문>이 제작되던 당시 사망했거나 입원 중이거나 수감됐기 때문이다.

삶은 계속된다

<두 개의 문>의 후속작인 <공동정범>(감독 김일란·이혁상, 2016)은 바로 그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망루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간다. <공동정범>은 두 가지 목적을 갖고 그곳으로 들어선다. 고통, 후회, 죄책감, 억울함, 분노로 가득한 사건 당일을 복기하며 여전히 망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살피는 동시에, 그날 정말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밝혀내는 진상규명을 위해서다. 하지만 이 두 목적은 영화가 피해자에게 ‘진상규명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시작하면서 점점 구분되지 않는다. 관객에게 탐색과 해석의 여지를 주기 위해 전략적으로 가해자인 국가와 피해자인 철거민 어느 쪽에도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았던 <두 개의 문>과 다르게 <공동정범>은 피해자의 고통에 온전히 집중하고 전면적으로 대면하는 클로즈업의 영화다. 인물과 사물의 클로즈업이 자주 사용되기도 하지만 피해자들의 기억을 역추적해 짓고 허무는 망루 내부로부터 트라우마를 촉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런 면에서 <공동정범>은 뒤틀리는 내장감각을 건드리는 건축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화재가 난 망루 밖으로 떨어진 직후의 생존자, 지석준·김창수·김주환·천주석·이충연이 각기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특정하는 영상과 교도소에서 나온 후의 삶을 보여주는 영상을 인물마다 교차편집한다. 이들은 이 중첩된 시간에 살고 있다. 영화는 이 중첩된 시점에서 각 인물들의 기억을 역추적하며 망루를 해체하고 짓기를 반복한다. 지석준은 각종 장비와 식량을 올리고, 전기 일을 하던 김창수는 플러그를 뽑고, 철골과 비계 건설에 경험이 있는 김주환은 망루를 짓고 창문을 낸다. 마지막으로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인 이충연은 방송 인터뷰에 신경 쓴다. 그들이 짓는 망루는 하나이지만 각 기억과 역할에 따라 그리고 다른 이의 기억이 침입해 올 때마다 계속해서 변동하고 완전히 다른 모양을 갖는다.

<공동정범>의 김일란·이혁상 감독은 지속적으로 어그러지고 변동되고 아귀가 맞지 않는, 그래서 끊임없이 무너질 위기에 있는 기억의 망루를 ‘진상규명’이라는 이름하에 억지로 끼워맞추지 않는다. 다만 그들 각자의 이야기와 감정을 주의 깊게 듣는다. 그것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말한 점점 더 “커다란 귀”가 되고 급기야 “목소리를 읽는” 작업이다. 목소리를 읽는다는 건 공통된 사건의 경험에서 차이를 읽어내는 것이다.

남성성의 해체

두 감독은 피해자, 철거민, 생존자, 남성 등의 정체성을 예민하게 성찰하되 이들의 목소리를 동일하게 읽지 않는다. 영화는 그런 점에서 관객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순수한 피해자’, ‘투쟁력 높은 연대체’ 같은 것으로 동일하게 묶는 것은, 피해자들을 ‘공동정범’으로 동일하게 처벌해 내부 갈등을 야기했던 폭력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실제로 다섯명은 각기 다른 입장과 전망 속에서 다른 능력과 역할을 갖고 망루에 올랐다. 이충연은 용산 철거민이고 나머지는 연대 철거민이었다. 이 남성들은 당연하게 성격도 다르고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영화 초반에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감정과 트라우마를 전달하는 방식은 두 감독이 얼마나 목소리를 읽는 데 뛰어난지를 보여준다. 이충연은 망루에 아버지를 두고 가장 먼저 창문으로 뛰어내렸다는 죄책감과 이 사실을 알면 모두가 자신을 비난할 거라는 두려움에 방어적이고 공격에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천주석은 외롭다고 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김창수는 자신 때문에 고통받았던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애틋함을 표현한다. 김주환은 평소에는 온순해 보이지만 분노조절장애를 겪고 있으며 매미 소리 같은 외부의 자극에 귀를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신체적인 통증을 느낀다. 몸이 좋지 않은 지석준은 자신감 결핍과 불안감 때문에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같은 지역 철거민으로 함께 망루에 올랐던 윤용헌과 이성수가 자신을 살리고 죽었다고 생각해 죄책감에 휩싸여 있다. 이들이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방법도 다 다르다. 이충연은 동지들과 관계를 끊고 내부의 연대는 외면한 채 외부에 용산참사를 알리는 데 힘쓴다. 외로운 천주석은 용산참사 동지회를 조직하고, 배려 깊고 차분한 김창수는 갈등을 겪는 동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율하려 한다. 김주환은 조용하고 생명력이 뛰어난 화초를 키우고, 지석준은 종교에서 안녕을 찾는다.

이처럼 동일성 내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를 읽어내 그들 각자가 무엇 때문에 고통받는지를 외면하지 않는 태도는 <공동정범>의 카메라가 언제나 소수자를 외면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적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영화는 권력과 폭력을 향한 투쟁과 트라우마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다. 물론 이 영화가 직접적으로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것도 주인공들이 그런 관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일성 속에서 차이를 듣는 두 감독의 카메라는 이 영화에서 저소득층 빈곤 남성들의 정서적 언어와 제스처를 민감하게 읽어낸다. 한국 사회와 한국영화에서 남성들은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해왔다.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이 ‘분노로 가득 찬 소리 지르기’라는 지루하고 서툰 방식으로 치환하거나 ‘강한 남성성’에 대한 압박으로 자신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이나 아이들을 매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예 가족을 등장시키지 않는 선택을 해 다섯 남성이 우회하거나 매개하지 않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각자의 방식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집요하게 귀를 기울인다. 그 결과는 남성성의 다양성이다. 여성이나 아이 같은 사라지는 매개자를 경유하지 않고 트라우마를 표현하는 남성성의 다양한 재현은 고정된 남성성에 대한 해체이기도 하다. 전형화된 젠더, 즉 고정된 여성성과 남성성의 해체는 페미니즘의 핵심 과제다. 이 영화의 페미니스트적 관점은 세계의 고통을 읽는 방식을 확장한다.

그런데 이 남성들의 차이는 정말 연대를 깨고 분열케 만드는가? 지석준이 피해자 모임에서 타인의 기억과 촬영 영상을 통해 윤용헌과 이성수가 자신을 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장면은 차이의 확인이야말로 또 하나의 연대이고 진상규명임을 보여준다. 피해자인 지석준은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을 괴롭혀왔던 죄책감을 어느 정도 덜어낸다. 그것은 오히려 아귀가 맞지 않고 서로를 원망하고 차이를 보였던 타인의 기억과의 만남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페미니스트의 카메라를 통해서 가능한 차이의 재현은 연대‘들’과 진상규명‘들’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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