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끗한 수염이 세월이 만든 멋이라면 배려가 몸에 밴 태도는 의식적 노력의 체화 같았다. 말 또한 그랬다. 자신의 말이 혹여나 의도치 않게 타인을 찌르는 말이 될까 그는 조심 또 조심했다. 하지만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흥부>에서 정진영은 배려도 예의도 모르는, 권세에 눈이 먼 천박한 고위 관료 조항리를 연기한다. 조항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전 <흥부전>의 놀부를 영화적으로 각색한 캐릭터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형제의 연마저 종잇조각 찢듯 베어버리는 조항리는 이제껏 정진영이 연기한 적 없는 악역이다. 인간미 넘치는 웃음과 인간적 고뇌로 가득한 눈빛 대신 천박함과 악덕을 두른 정진영의 모습은 꽤 흥미롭다.
-<흥부>의 시나리오를 일찍 받아봤다던데 어떻게 영화에 출연하게 됐나.
=<흥부>를 제작한 최진 프로듀서가 이준익 감독 제작부 출신이다. <님은 먼곳에>(2008), <평양성>(2010) 등 여러 편에서 같이 작업한 인연이 있다. <흥부>가 영화사 궁의 창립작인데, 조항리 역을 꼭 해주면 좋겠다면서 시나리오를 건네주더라. 출연을 쉽게 결정하진 못했다. 당시 찍고 있던 작품도 있었고, 시나리오를 다시 정독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캐릭터를 풀어나가면 좋을지 고민했다. 감독님을 만나서 “한면만 가진 악역이라면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면을 가진 조항리를 연기하고 싶습니다” 했더니 “그렇게 갑시다” 하더라.
-어떤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나.
=고위 관료로서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모습도 있고, 한편으론 교활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도 있다. 그런 모습이 상황마다 다르게 표현되길 바랐다. 악역을 많이 연기하진 않았는데, 사실 악역이나 선한 역이나 어렵긴 마찬가지다.
-조항리를 연기할 때 참고한 현실의 인물들이 있다던데.
=지난해 5월에 영화 촬영을 시작했다. 촛불집회 이후 정권 교체가 이뤄질 즈음이었는데, 탄핵 정국 당시 뉴스에 많이 나오던 사람들, 고위 관료들 있잖나. <흥부>의 조항리를 보면서 그런 사람들이 떠올랐다. 권력 앞에 머리 조아리고, 잔머리 굴리고, 자신의 사리사욕이 중요한 그런 사람들을 지난 1~2년 사이 뉴스에서 너무 자주 봤다. (웃음) 특별히 희화화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인물의 현실적 정당성이 여기 있구나 하면서 연기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모사하거나 흉내내려 한 건 아니고 그 인물들의 특징이 한 캐릭터 안에서 드러나면 재밌겠다, 말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조항리 같은 악역의 경우 캐릭터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그 인간을 이해한다기보다 그 인간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알면 되는 거다. 그는 악착같이 무엇이든 챙기는 사람이다. 어떤 순간에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 이를테면 영화에서 조항리가 동생 조혁(김주혁)에게 엽전 꾸러미를 던져주는 장면이 있는데, 소품팀이 준비한 건 엽전 꾸러미 두개였다. 그런데 조항리라면 둘 다 안 줬을 것 같더라. 그래서 엽전을 줄 때 하나만 던져줬다. 이 사람은 그 찰나에도 그게 아까운 사람인 거지. 나는 그 인물을 연기하기로 한 배우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움직일까를 생각했지 그 사람을 좋아한 건 아니다. 사람들이 <왕의 남자>(2005)의 연산을 악역으로 보기도 하던데, 그때는 연산에 대해 한없이 연민을 가지고 연기했다. <특수본>(2011)의 경찰서장 황두수는 말이 안 되는 논리지만 자기만의 논리를 가진 확신범 캐릭터였고. 그런데 조항리는 기댈 명분도 없는 인물이다.
-캐릭터를 희화화한 게 아니라 했지만 천박한 양반의 모습을 드러낸 게 흥미로웠다.
=기본적으로 <흥부전>의 놀부를 베이스로 탄생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천박한 모습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더 천박해 보이는 장면들도 찍었다. 웃통을 벗는다거나. 결과적으로는 편집됐다. 처음엔 지금보다 좀더 가벼운 톤의 영화로 생각했는데, (김)주혁이 사건이 있은 후 영화가 처음보다는 차분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건 영화의 운명이다.
-왕 앞에서 형이 동생을 처단하는 장면이 있다. 조항리와 조혁의 스토리에선 굉장히 중요한 신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느낌도 들었다.
=어떤 기자들은 어떻게 왕 앞에서 칼을 휘두르냐고 그러더라. (웃음) 배우는 말이 되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말이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게 배우지. 예전엔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많이 따지면서 연기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바뀌었다. 그래서 연기할 때 의심하지 않았다.
-영화의 전체 그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감독이지만 캐릭터에 관해선 배우가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걸 발견하거나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하지 않나.
=그게 좋은 배우다. 배우는 그걸 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난 그렇게 좋은 배우는 아닌 것 같지만. (웃음) 이를테면 감독이 ‘붉은색 계통으로 칠해주세요’라고 했을 때 가장 적합한 빨강을 칠하는 게 배우다. 감독이 생각하는 인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을 찾고 칠하는 것. 그 색은 당연히 감독이 생각하는 색상표 안에 있어야 할 테고. 그게 배우와 감독의 관계가 아닐까. 기본적으로 현장에선 감독의 말을 100% 따르는 편이다.
-영화의 논리에 혹은 감독의 의견에 쉽게 동의되지 않는 순간도 있을 텐데.
=예전의 내 룰은 ‘딱 세번 이야기한다’였다. 시나리오 받았을 때, 리딩할 때, 촬영 전날. 그렇게 세번 얘기한다. 그래도 내 생각이 아니라고 하면 감독의 말을 따른다. 그런데 지금은 세번까지 안 간다. 한번 정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예전에 세번까지 얘기했던 이유는 아마도 논리를 찾으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논리보다 감정을 더 생각한다.
-고 김주혁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이 좋은 배우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슬픔이 밀려오더라. 같이 호흡을 맞춘 배우들은 그 슬픔이 얼마나 클까 싶었다.
=(그의 죽음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주혁이랑 맞붙는 장면은 두 장면 정도밖에 안 돼 촬영할 땐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고, 선한 사람이고, 무엇보다 좋은 배우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사고 나기 일주일인가 열흘 전쯤 <흥부> 포스터 촬영 때 다시 만났다. 그게 마지막으로 본 거였는데, 그날은 영화 촬영도 끝난터라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산다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이 친구와 더 좋은 우정을 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너무 어이가 없는 일이 벌어진 거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서서 후배들에게 연기에 대한 조언을 하는 성격은 아닌 것으로 안다. 사석에서도 후배들에게 연기 얘기는 잘 꺼내지 않는 편인가.
=현장에선 나이가 적든 많든 선후배가 아닌 동료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맡은 롤이 있고 각자 열심히 연기 준비를 해왔을 텐데 선배라고 툭 한마디 던지면 괜히 흔들릴 수 있다. 눈치 보게 되고. 그래서 연기에 대한 코멘트는 하지 않는다. 그저 동료로서 서로 합을 맞출 뿐이다. 사석에서도, 자칫하면 나이 먹고 하는 잔소리가 될까봐 조심하는 편이다. 나이가 들면 실제로 잔소리가 는다. (웃음) 사석에서 만난 젊은 친구들한테 하나라도 교훈을 남겨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슬슬 든다. 그게 나이 드신 분들이 갖는 호의에 대한 강박 같다. 어른으로서 도움이 돼야지 하는. 그런데 그 호의는 이해하나 어쩌면 그게 호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판도라>(2016)나 특별출연한 <택시운전사>(2017)처럼 시의성 있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 메시지가 분명한 작품에 더 끌리나.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들이 있다. 최근의 <강철비>(2017), <1987>(2017)도 그렇고, 내가 출연한 <판도라>나 <택시운전사>, <또 하나의 약속>(2013)도 그렇고. 그런데 영화가 꼭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볼 때도 그런 걸 특별히 고려하지 않는다. 다만 <택시운전사>처럼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이야기라서, 감독과 제작자와 그 어떤 인연도 없는데 고민 없이 특별출연을 하는 경우는 있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리버럴하게 보는 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메시지가 강한 영화를 주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웃음)
-의외로 상업오락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맞다. 충무로에서 배우로 뜨게 된 것도 <약속>(1998)에서 조폭 역할을 맡으면서였다. 충무로 영화를 하면서는 영화를 메시지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로서 꾸준함의 비결은 뭔가.
=연극을 하다가 <약속>으로 충무로 들어왔을 때가 35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은 나이가 아닌데 그땐 스스로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늦게 시작했다는 마음이 있어서 크게 흥분하거나 크게 휘둘릴 여유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좋은 분들을 계속 만났다. 이준익 감독과는 거의 10년을 전속배우처럼 일했고. (웃음) 내가 대단한 배우라서 정신없이 일이 밀려들어온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납득이 가는 작품들을 꾸준히 했다. 요즘은 예전보다 역할의 크기가 작아졌지만 오히려 한 작품에 오래 매이지 않아도 되니까 출연하는 영화의 편수는 더 많아졌다. 그것도 재미가 있다.
-최근엔 홍상수 감독의 미개봉 신작 <클레어의 카메라> <풀잎들>에 출연했다.
=<화려한 유혹>(2015)이란 드라마를 하고 나서 예술영화, 작은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절묘하게 홍 감독님한테 연락이 왔다. 좋은 예술적 자극이 됐다. 장률 감독님의 신작 <영아>도 찍었는데 아마 올해 개봉하지 않을까 싶다. 또 신인감독의 독립영화도 준비했는데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결국 엎어졌다. <흥부>나 <대장 김창수>(2017) 같은 영화도 찍었지만 최근 1, 2년 동안은 그렇게 작은 영화 위주의 작업을 했다.
-과거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을 오래 했는데, 요즘엔 그런 진행에 관심이 없나.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졸업했다고 생각한다.
-너무 일찍 졸업한 거 아닌가. (웃음) 특히 요즘은 시사교양 프로그램도 예능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새로운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4년 했다. 4년이면 대학을 졸업한다. (웃음) 그때 관둔 이유가, 점점 내 인생에서 그 프로그램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서였다. 계속 붙잡고 있으면 또 다른 도전을 안 할 것 같더라. <그것이 알고 싶다>로 인해서 얻은 것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안정이 되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도 시사 프로그램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지난해 <동네의 사생활>이란 교양 프로그램을 했는데 그건 딱 내가 좋아하는 과였다. 여행도 하고 역사 얘기도 하는. 그런데 시청률이 안 나와서 일찍 종영됐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 시청률을 다 가져갔지. (웃음)
-현재 강원도에서 영화 촬영 중이라고 들었다.
=<검은 사제들>(2015)을 만든 장재현 감독의 신작 <사바하>를 찍고 있다. 분량이 많진 않다. 두어번 더 촬영 나가면 된다. 오컬트적인 영화인데 나는 오컬트를 믿지 않는 형사로 나온다. 그 이후의 계획은 아직 확정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