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영화라는 형식을 선택해야만 창작자의 비전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 이를테면 히치콕의 <싸이코>를 떠올려볼 만하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싸이코>의 연극 버전을 연출해달라 부탁했다고 가정해보자. 이걸 무대에 올려서 어떤 방식으로 연출하고 연기하더라도 노먼 베이츠가 마리온을 살해하는 전설적인 샤워 부스 장면을 <싸이코>처럼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이 장면을 보고 당대의 관객은 충격을 받았다. 엄청난 살해 장면을 목격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일흔여덟 가지 각도에서 촬영된 쉰두개의 쪼개진 컷들이 이어 붙어져 만들어진 몽타주 이미지였다. 쉰두개의 컷들 가운데 실제 노먼 베이츠의 칼이 마리온을 찌르는 신체 훼손 장면은 단 한장도 없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이걸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어디에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반면 굳이 영화라는 형식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구현이 가능한,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적인 영화들이 있다. 연극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들이 대개 그렇다. 히치콕의 <로프>나 마이크 니콜스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혹은 최근의 <대학살의 신>이나 <다우트> <맨 프롬 어스>와 같은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이런 영화들에는 전자와는 다른 종류의 매력이 있다. 최근의 관객은 그래서 결국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심판의 잣대를 들이밀어 평점으로 단죄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연극적인 영화의 경우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의 결과보다 인물의 상태와 대화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래서 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능케 한다. 덕분에 우리는 연극적인 영화를 통해 이미 알고 있던 배우를 재평가하거나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괴물 같은 배우를 발견하게 된다. 이 글은 그렇게 발견했던 어느 괴물 같은 배우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마이클 섀넌을 오래전 <버그>에서 처음 봤다. 충격적이었다. <엑소시스트>의 윌리엄 프리드킨이 여전히 문제적인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대목도 인상 깊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마이클 섀넌이라는 이름의 배우였다.
한번 보면 잊어버리기 어려운 타입의 남자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구부정한 모습인데 어딘가 남다른 구석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 언제 폭발하지 모를 형태의 소심함이 입가의 주름과 미간에 새겨져 있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면 그가 삶에서 애써 참아내고 있던 게 무엇이든지 다만 내 앞에서 터져나오지 않기만을 가슴 졸여 바라게 된다.
이 남자가 꼭 그랬다. 마이클 섀넌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영화든 드라마든 하다못해 인터뷰라도(그는 결코 웃는 일이 없다, 넌 대체 언제 웃느냐는 질문에 딸 앞에서는 웃는다고 답한 적이 있다), 나도 모르게 얼어붙게 된다. 그가 화를 낼 때면 소심해 보이는 주름들이 허물어지면서 핼러윈에 쓸 법한 괴물 마스크처럼 구겨졌다. 마이클 섀넌은 <버그>에서 압도적인 광기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그는 군 당국이 자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망상 장애를 겪으면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정신적, 신체적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파괴해버린다. 시종일관 뿜어내는 에너지가 관객을 다소 지치게 만들 만큼 과격하고 위험해 보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이클 섀넌의 연기를 지나치게 과잉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버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회의적인 관객마저도 이 생소한 배우가 인상 깊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단역과 작은 조연을 제외하면 할리우드 경력이 거의 없는, 처음 보는 배우가 윌리엄 프리드킨의 새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의 집중력으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앞에 당황스러웠다.
마이클 섀넌은 <사랑의 블랙홀>(나는 이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을 여태 단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아무도 싫어하지 않는 영화라는 게 가능할까, 라는 질문을 만날 때마다 나는 <사랑의 블랙홀>을 떠올린다)에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단역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그는 본래 영화가 아닌 연극 무대에서 커리어를 쌓아왔다. <사랑의 블랙홀> 이후로 할리우드와 연을 끊은 건 아니었고 단역 위주로 영화 작업에 꾸준히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영화 현장이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연극과 달리 단발성으로 끝이 나는 작업이라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2006년 연극 <버그>를 윌리엄 프리드킨이 영화화하기로 하면서 많은 게 바뀌었다. 연극 <버그>의 피터 에반스는 마이클 섀넌이 자주 연기했던 배역이었다. 그는 영화 버전 <버그>에서도 피터 에반스를 연기하게 되었다.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연극에서의 훌륭한 연기가 영화에서의 좋은 연기로 연결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매우 통찰력 있는 캐스팅이었던 셈이다. <버그>에서의 인상 깊은 연기에 힘입어 그의 이름은 조연배우들의 목록 가운데서도 감독의 이목을 잡아끌 만큼 특별한 아우라를 갖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시드니 루멧의 유작으로 남은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에 캐스팅되었다. 짧은 분량이었으나 역시 관객의 시선을 강탈할 만했다. 다음해 <레볼루셔너리 로드>, 그리고 마틴 스코시즈가 제작했던 끝내주는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 주요 배역으로 고정 출연하게 되면서 비로소 전국구 스타가 되기에 이른다.
이후의 마이클 섀넌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의 반백년 숙적 조드 장군을 연기했고 <녹터널 애니멀스>에서는 세상을 향한 피로도와 연민이 뒤엉켜 묘하게 비틀어진 형사를 연기했다. <엘비스와 대통령>에서는 닉슨을 연기하는 캐빈 스페이시를 상대로 정신이 온전치 않은 말년의 엘비스를 연기했고 최근에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세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 악당으로 등장했다. 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 속에서 그는 예의 익숙한 광기를 마음껏 드러내며 자칫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보일 만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낸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하는 <BBC> 드라마 <어 리틀 드러머 걸>에도 출연한다. 박찬욱이 존 르 카레 소설을 드라마로 만드는데 거기 마이클 섀넌이 나온다니, 흡사 윌리엄 와일러가 성서영화를 만드는데 찰턴 헤스턴이 캐스팅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제 더이상 그를 예전의 단역배우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는 듯 보인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라이징 스타가 아니다. 무대에서 시작해서 지금도 무대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은 배역부터 오랜 시간의 현장 훈련을 통과했다. 그래서 감독들이 그에게 갖는 신뢰감은 각별하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화면에 그의 얼굴이 비치면 일종의 경계어린 경외심과도 같은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입가 양옆으로 깊고 길게 팬 주름이 씰룩거릴 때마다 신이 난다. <보드워크 엠파이어>가 중반에 밑도 끝도 없이 늘어져 위협적일 정도로 재미가 떨어졌을 때마저 나는 마이클 섀넌을 보며 버티어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이클 섀넌의 영화는 여전히 <버그>다. 지금의 다소 정제되고 성숙해진 모습과는 달리 내 안에는 보여줄 것이 너무 많아서 안으로부터 밖을 향해 터져버릴 것 같다는 표정과 몸짓, 그 위험천만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테이크 쉘터>에 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매일 밤 폭풍에 관한 꿈을 꾸며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으로 조금씩 미쳐가는 아버지를 연기한다. 여기서 마이클 섀넌은 “폭풍이 오고 있다”는 절규로 시작하는, 아마도 셰익스피어 연극의 대사만큼 오래도록 손꼽힐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소박한 파티장. 주인공 가족이 도착한다. 사람들은 주인공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다소간의 긴장이 이어지다가 이윽고 한 사람이 주인공에게 시비를 건다. 여기서 이러지 말라며 주인공은 다툼을 회피한다. 결국 주먹질이 오고간다. 주인공이 한없이 소심하게 움츠려 있다가 폭발하듯 돌변한다.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카우보이 같은 표정과 남부 침례교회 목사의 말투로 <즐거운 학문> 속 광인의 선언과도 같은 비전을 토해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일갈을 모두와 함께 소리내어 읽어보고 싶다.
저기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지금껏 너희 가운데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풍이 말이다! 내가 거기 대비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말이다! 내가 미친 것 같아? 내가 도둑놈 같아? 가서 좋은 꿈들 꾸도록 해. 이 폭풍이 현실이 될 때, 아무것도 소용없어질 테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