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상냥함이 못 견디게 좋지만, 또 그 애매함 때문에 상처받는 관계. <나라타주>는 정확한 연애의 감정으로 서로에게 돌진하는, 순정만화 원작의 일본 영화들과 달리 무척 모호하게 감정을 쌓아가는 멜로영화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 <클로즈드 노트>(2007),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2016)의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이 원작 소설에서 매력을 느낀 지점도 바로 그 불투명한 인물의 상태였다. 영화에서 연애란 이즈미(아리무라 가스미)가 과거를 회상하는 나라타주(내레이션과 몽타주) 기법을 통해 소환된다. 대사 대신 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극중 언급되는 영화들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이웃집 여인>(1981), 빅토르 에리세의 <남쪽>(1982),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1955)의 흔적이 흩어져 있다.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은 최근의 직선적인 영화들과는 다른 멜로를 만들고 싶었고, 그 정서를 나루세 미키오에게서 찾았다. <나라타주> 홍보차 한국을 찾은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을 만났다.
-원작이 발간된 2005년부터 영화화를 준비했다고 들었다. 다른 사람이 영화화할까봐 당시 판권까지 미리 사두었다고 하던데 원작의 어떤 부분에 끌렸는지 궁금하다.
=당시 어떤 영화사와 함께 모 여배우를 주연으로 각본까지 써두었는데 진행이 안 됐다. 원작자 시마모토 리오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각본이 제일 처음 나와 각본가가 썼던 대본이었고 그걸로 영화화를 했으면 좋겠다는 원작자의 강한 의지가 있었다. 연애에 대한 보편적인 감정이 원작에 있다고 봤다. 누구나 거치는 연애의 답답한 감정 말이다. 연애란 것이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닌데, 그 추한 부분까지도 알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이즈미가 일하는 배급사에 여러 영화 포스터들이 있는데,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가 특별히 눈에 띄었다. 이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하야마 선생과 이즈미가 교류할 때 서로를 이어주는 공통의 화제가 영화였다. 이즈미는 하야마 선생님과 취향을 공유하기 위해 무리해서 예술영화들을 많이 보고 그 영향으로 배급사에 취직한다. 촬영을 할 때 친분이 있는 사람을 통해 사용허가를 받을 수 있는 영화가 다르덴 형제의 포스터였다. 발견했는지 모르겠지만 배급사 이름도 ‘발타자르’다.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라는 영화에서 가져온 설정이다. 나름대로 즐기면서 그런 이름들을 영화에 숨겨뒀다.
-이즈미와 하야마 선생님이 1년 만에 다시 만나서 나누는 대화에서, 원작에서는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를 말하는데, 영화에서는 <이웃집 여인>(1981)의 대사를 인용한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괴롭지만 당신 없인 살 수 없어요.” 이 대사가 이즈미의 마음을 대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야마 선생의 집에도 그 영화의 DVD를 의식적으로 배치했다. <이웃집 여인>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표현하는 영화다. 이 영화만으로도 이즈미의 감정에 답이 나왔다고 해야 할까. 선생님을 기절할 만큼 좋아하지만 그래서 마음이 아픈 감정이다. 여자의 무서운 일면이라고 할까. 선생님에게 속마음을 훅 말하는데,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코너에 몰리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웃집 여자> 외에 여러 영화들이 삽입되어 있다. 원작과 영화 모두에 등장하는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2000)나 빅토르 에리세의 <남쪽>은 당신도 좋아하는 영화인가.
=<남쪽>은 좋아하는 영화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어둠 속의 댄서>는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다. (웃음)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중요하게 다뤄지는 영화가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이다. 이즈미가 혼자 보는 영화가 <부운>인 이유가 있나.
=이즈미가 혼자 영화를 본다면 어떤 걸 볼까 생각했을 때 <부운>이 떠올랐다. 일본의 멜로영화 중 가장 사랑하는 영화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에서 참고한 것이 남자는 우유부단하고 여자는 사랑에 대해 한결같다는 것이다. <부운>을 안 본 관객도 우리 영화를 보고 <부운>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좋겠다 생각했다.
-어쩌면 <나라타주>에는 시네필 유키사다 이사오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하야마 집에 있는 DVD 리스트들이 그렇다. 한국 김기영 감독의 DVD 박스 세트도 있더라.
=맞다. (웃음) 김기영 감독 DVD는 영화상으로 실수일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시대 설정이 2007년인데 그 당시에는 일본에 아직 김기영 감독 DVD가 출시되지 않았다. 만들 당시에는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할 줄 모르고 그냥 좋아해서 배치한 거다. (웃음) 그 DVD 세트는 봉준호 감독에게서 선물받았다.
-이즈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영화라 여주인공이 특히 중요했을 것 같다. 아리무라 가스미와의 작업은 어땠나.
=아리무라 가스미는 다부진 배우다. 사실 시나리오를 읽고 감정표현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현장에서 전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만 울음을 참는 장면에서는 여배우의 얼굴이 못나 보일 수밖에 없는데, 그녀가 “어떻게 보이냐”고 물었다. 그런 장면에서 “못나 보이지만, 너무 좋았다”고 하면 아주 만족해하고 기뻐했던 게 기억난다.
-하야마 선생이 우유부단하다면, 오노(사카구치 겐타로)는 지나치게 맹목적이다. 사랑에 있어서 상반되는 두 남자는 사실 여성 관객이 보기에 이해가 안 되는 인물들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야마 선생은 현재 일본의 남성상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부분,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곁에서 맴도는 남성들이 일본에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표현은 안 하지만 내면에는 뜨거운 감정이 있는 남자를 그리고 싶었다.
-마쓰모토 준과 사카구치 겐타로 모두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이미지와 다른 역할을 맡았다.
=마쓰모토 준은 눈빛이 강하고 반짝반짝한 이미지가 있어서 하야마 선생 역에 상상하지 않았던 배우다. 프로듀서가 추천했는데, 본인도 시나리오를 읽고 “나는 재벌 2세의 이미지가 강한데 괜찮겠냐”고 하더라. 배우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드는 작업을 같이 해보자고 얘기했고 거기에 본인도 매력을 느꼈다. 사카구치 겐타로는 기존에 온화하고 상냥한 역할이 많았는데 반대의 역할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읽고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날것의 연애 감정,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완전히 그러지 못하는 부분에 배우들도 공감했다. 연애의 판타지를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것을 완전히 덜어냈다. 마쓰모토 준, 사카구치 겐타로, 아리무라 가스미는 모두 일본에서 톱스타들이다. 이런 억압된 감정들을 연기하는 것이 이들 배우들에겐 하나의 도전이었다.
-이 영화를 당신의 ‘멜로영화의 집대성’이라고 소개했더라.
=현대사회에서 연애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게 어려워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 일본 사회 역시 뜨겁게 사랑을 해서 그 위대함을 호소하는 작품을 만들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SNS도 그렇고, 예전에 비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달라졌다. 멜로영화를 동경해서 영화를 만들던 시절은 <나라타주>로 종지부를 찍는 기분이다.
-<나라타주>의 다음 작품인 <리버스 엣지>가 올해 제68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만화 원작으로 알고 있는데, 당신의 첫 만화 원작 영화 아닌가.
=<리버스 엣지>는 존경하는 만화가 오카자키 교코의 작품이다. 1990년대 크리에이터를 지망했던 사람들 중에 이분의 만화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다. 이 작품은 주인공을 맡은 배우 니카이도 후미가 꼭 하고 싶은 기획이라며 나에게 의뢰했다. 똑바로 걸어갈 수 없는, 어딘가 부족한 청춘들의 이야기다. 한국에서도 언젠가 관객과 만나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