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오연서의 주목할 작품을 꼽으라면 영화보다는 몇몇 드라마의 캐릭터가 먼저 떠오른다. 아무래도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먼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2012년에 MBC와 KBS 연기대상에서 각각 여자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뒤, 2014년에는 <왔다! 장보리>로 그해 MBC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까지 수상했으니 드라마에 비해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지 못한 영화 작업이 못내 아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학생 시절 이미 걸그룹 LUV로 데뷔해 인기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본 그이기에 스스로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꾸준하게 활동해왔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동안 영화 <치즈인더트랩>의 홍설과 같은 캐릭터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홍설은 지금의 20대 여성 혹은 학생들의 솔직 담백한 일상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기보다 꽤 마음의 심지가 단단한 캐릭터다. 단단한 마음이 홍설과 닮아 있는 오연서와 진심을 담아 연기한 이번 영화에 대해, 그리고 오연서 자신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드라마 <화유기>가 최근에 종영했다. 작품 안팎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얼마 전까지 <화유기> 촬영장에 있었다. 유난히 추웠던 올겨울에 촬영하느라 우선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그외에는 영화 현장에서의 CG 촬영과 달리 사실상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드라마 현장의 여건상 좋은 퀄리티의 CG를 기대할 수 없었던 아쉬움은 있다.
-그런 와중에 요괴 손오공(이승기)과 사랑에 빠진 인간 진선미를 표현해내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진선미는 어릴 때부터 친구도 가족도 없이 살면서 귀신을 본다고 손가락질당하고 늘 숨어지내듯 살아야 했다. 모든 걸 껴안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착한 성격이라 표현의 제한이 많았다. 그럼에도 진선미 덕분에 조선시대와 개화기의 경성 등 여러 시대를 오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 즐거웠다. 처음 이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국가대표2>(2016)에서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다가 문제를 일으켜 여자 아이스하키팀으로 좌천당하는 캐릭터 채경을 연기했다.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을 보는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너무 큰 이슈들이 드라마와 같은 시간대에 터지다보니 사실 <화유기>의 가장 큰 경쟁상대였다. (웃음) 이번 올림픽은 여자 선수들의 활약이 대단했고, 또 남북단일팀이 출전하기도 해서 <국가대표2>가 더 많이 떠올랐다. 아이스하키는 여자 선수들이 참여하는 경기 중에서도 육체적으로 고된 종목이다. 그들의 노력을 결과와 상관없이 응원해준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드라마화되기 이전부터 이미 원작 웹툰의 주인공 홍설의 가상 캐스팅 배우로 가장 많이 언급됐었다. 막상 시나리오를 받고는 어땠나.
=그저 외모가 약간 닮아서였던 것 같다. 시나리오도 좋았지만 그간 로맨스를 내세우는 한국영화가 별로 없었고 여배우들의 역할 선택에도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만난 작품이라 더 끌렸다. 이 자리에서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 영화는 전지적 홍설 시점에서 펼쳐지는 영화다. (웃음)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캐릭터라서 욕심이 났다. <화유기>의 진선미에 비하면 조금은 평범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캠퍼스 생활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나 자신의 아쉬움을 해소하는 현장이었다.
-웹툰과 시나리오를 비교해보고 난 느낌은 어땠나.
=방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무엇을 보여줄지 말지를 선택한 것 같다. 영화는 유정(박해진)과 홍설이 어떻게 친해지고 어떻게 사랑을 시작하는지 정도만 표현된 것 같다. 그들의 미래를 열어놓을 수 있는 영화라고나 할까.
-원작의 많은 팬들은 홍설의 솔직 담백한 연애담뿐만 아니라 대학 생활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남자들의 행태를 통해서 성장하는 홍설의 모습에 열광했다. 그런 의미에서 직접 홍설을 연기해보니 그녀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되나.
=일단 홍설은 똑똑한데 고민이 많다. 뭐든 혼자 고민하고 눈치보며 결정한다. 그녀를 연기하면서 나라면 간단하다고 여길 문제도 홍설이나 다른 독자 혹은 관객은 그렇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홍설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안되나?’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팬들은 그것이 바로 홍설의 매력이라고들 이야기하더라.
-촬영에 앞서 김제영 감독은 어떤 홍설을 주문하던가. 다시 말해 웹툰의 홍설과 영화의 홍설, 뭐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나.
=감독님은 오연서만의 홍설을 보고 싶다고 했다. 웹툰이라는 틀이 있고 또 그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가진 표정과 말투가 툭툭 튀어나왔으면 좋겠다, 그게 더 매력적일 것 같다고 이야기하셔서 현장에서도 내 모습을 보이려고 자연스럽게 솔직해졌던 것 같다.
-홍설은 수상해 보이는 유정 선배의 진심도 파악해야 하고 스토커 같은 남자도 피해다녀야 하는 등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닌다. 그녀가 처한 여러 가지 상황에서 가장 마음이 쓰였던 부분이 있다면.
=물론 폭력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가 가장 걱정되지만 직접 겪어봐서 감정이입한 장면이 있다면 홍설이 신발가게 쇼윈도에서 사고 싶은 구두를 물끄러미 보는 장면을 꼽고 싶다. 그 나이에 얼마나 사고 싶고 예뻐보이고 싶을까. 다들 나보고 이런 고민 안 해봤을 거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나이에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민, 미래에 대해 갈팡질팡하는 마음, 숱한 소문과 오해 속에서 캠퍼스 연애를 할 때의 괴로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그런 상황을 나 역시 잘 알고 있기에 자연히 마음이 쓰였다.
-흔히 <치즈인더트랩>을 ‘로맨스릴러’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아마도 연애하면서 노출되는 수많은 폭력적인 상황을 묘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붙은 별명 같다. 홍설이 연애를 하면서 사랑과 학대를 구분할 줄 알게 되는 것, 또 다른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게 될 때의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 그것이 성숙한 연애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홍설의 연애를 어떻게 바라보며 연기했나.
=두 사람의 연애는 우리가 흔히 어릴 때 겪는 연애라고 하지 않나. 위험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나쁜 남자에 끌리던 때를 지나 지금의 나는 편안하고 따뜻한 사람을 찾게 된다. 어릴 때는 솔직하기가 힘들다. 누구에게나 나의 단점이나 바닥을 들키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려면 정말 솔직해져야 한다. 홍설과 유정이 어려웠던 것은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해 배려나 어림짐작,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이었던 것 같다. 겪어보니 솔직할 때 가장 좋은 결과가 있다고 감히 이야기한다.
-홍설이나 유정은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에 고민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인데 극중 유정이나 홍설처럼 배우로서, 연예인으로서 스스로 가장 오해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나.
=어릴 때는 외모 때문에 차가워 보인다, 깍쟁이 같다, 새침할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그래서 더 밝게 지내려 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상처도 받고 날카롭게 대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나를 갉아먹는 행동이었더라. 지금은 많이 편해졌다. 최대한 상처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TV드라마 <엽기적인 그녀>의 혜명 공주를 비롯해서 <돌아와요 아저씨>, 첫 지상파 미니시리즈 주인공을 맡았던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신율/개봉, <왔다! 장보리>의 보리, <오자룡이 간다>의 나공주, 트렌디한 싸가지라고 불렸던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방말숙 등 정말 다양한 역할을 거쳤다. 가장 마음에 남는 인물을 꼽는다면.
=지금은 <돌아와요 아저씨>의 홍난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고생도 제일 많이 했고 캐릭터의 설정이 쉽게 맡을 수 없는 역할이다. (웃음) 성별도 바뀌고 여자랑 로맨스도 해보는 등 정말 많은 경험을 안겨줘서 고마웠고 또 무척 힘들었다. 오연서의 색다른 면을 보여줄 수 있었다. 특별히 고마운 캐릭터는 <왔다! 장보리>다. 보리를 연기하면서 모성애 연기에도 도전해봤고, 50부작이라는 드라마의 호흡은 어려웠지만 그다음 작품하는 데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내가 시골 출신이라서 그런지 보리가 시골을 배경으로 보여준 모습들이 익숙한 감성이라서 좋았다.
-인스타그램의 머리말에 ‘내내 어여쁘소서’라는 문구를 썼던데.
=이상 시인의 시 <이런 시>의 한 구절이다. 그가 사랑했던 금홍에게 바치는 시인데 예쁘다기보다는 어여쁘게 나이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적어봤다. (휴대폰을 꺼내 시를 검색해 소리내어 읽으며)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라는 이 마지막 구절, 너무 좋지 않나. 인스타그램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써두고 있다.
-본명이 ‘해님’이다. 누가 지어주었나.
=24절기 중에 하지에 태어났는데 엄마가 해처럼 제일 크고 밝게 자라라는 뜻에서 지어주셨다. 팬카페 이름은 그래서 ‘햇님달님’, 카페 주소는 내 별명이자 닉네임을 따서 ‘위드햇반’이라고 지었다. 그래서인지 겨울이 너무 싫다. 지난겨울 촬영장이 너무 추웠다. 올해는 꼭 쉬어야겠다.
-만화 이야기를 안 물어볼 수가 없다. 인스타그램에 직접 ‘만화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다’고 올리기도 했다.
=덕후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웃음) 나는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뭔가를 수집했다. 볼펜이나 스티커를 모으다가 어느 날 만화책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만화책만 읽고 있더라. 추리소설에 빠지니 또 그것만 파고. 친구들에게 만화방 가자고 하면 아무도 좋아하질 않아서 외로웠다. 지금도 시간나면 애니메이션을 찾아본다. 아직 덜 자랐는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아주 유용하다.
-가장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꼽는다면.
=<은혼>의 주인공 사카타 긴토키가 이상형이다. (웃음) <오소마츠군>의 오소마츠상, <슬램덩크>의 강백호처럼 마음이 따뜻하고, 평소에는 덜렁거리지만 할 때는 또 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해마다 4월 1일이면 장국영 사진을 올리며 그의 기일을 기리기도 하던데.
=장국영의 영화 중 특히 <성월동화>(1999)를 좋아한다. 물론 더 좋은 영화가 많지만 이 영화가 나의 감성에 잘 맞았다. <씨네21>에서 올해 장국영 15주기를 기념해 시네마 투어를 한다는 소식도 봤다. (웃음) 그렇게 팬들이 모여서 서로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것, 너무 재미있다. 나는 본격적인 장국영 투어를 해보지는 못했고 생전에 그가 다녔다는 딤섬집은 가본 적 있다.
-이렇게 좋아하는 게 많은데 왜 인터뷰 때마다 취미가 없다고 이야기했나.
=사실 내 꿈은 아무것도 안 하며 사는 거다. (웃음) 집에서 혼자 영화보고 만화도 보며 살고 싶은 게 인생의 목표다. 대부분 집에서 조용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보니 인터뷰 때마다 취미를 찾고 싶다고 했던 것은 동적인 활동을 찾고 싶다는 뜻이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이미 생활 그 자체니까.
-배우 오연서의 지난 활동을 돌아보면,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 것 같나.
=종종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좋은 역할이 눈에 띄면 또 하고 싶어진다. 오랜 무명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시간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 여유를 찾으려고는 하는데 잘 안된다. 내 인생의 목표가 놀고 먹기라고 이야기했지만 궁극의 목표인 행복해지고 싶어서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얼마나 행복하겠나? (웃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
-올겨울은 쉬어야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차기작이나 올해의 계획에 대해 말해달라.
=아직까지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잠시 동안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다. 머리가 마음에 많이 차 있는데 조금은 비워내고 난 후에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래야 작품을 봐도 달라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잠도 자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면서 재충전하고 싶다.
-좀더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1년에 한편씩은 꼭 하고 싶다. 분량에 상관없이 작은 역할이라도 좋고 존경하는 선배들과도 함께 연기해 보고 싶다. 내게 딱 맞는 옷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다. 감독님들, 저, 되게 괜찮은 배우예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