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슬픔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2018-03-15
글 : 박지훈 (영화평론가)
오래된 미래

영화는 “퓨처랜드에 새 차가 들어왔대!”라는 한 아이의 외침으로 시작된다. 그 소식을 들은 아이들은 신나게 퓨처랜드(미래의 땅)로 뛰어간다. 그리고 퓨처랜드에서 아이들은 차에 침을 뱉으며 논다. 영화는 30분간 아이들이 해맑게, 오래된 방식으로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유년의 추억이 떠오른다.

유년 시절의 많은 부분은 환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아이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마약중독자들이 쓰는 버려진 콘도를 “수백년 전에 지어진 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댄스룸”을 발견하고, 마약중독자들이 버리고 간 약솜은 “유령 응가”가 된다. 아이들은 버려진 콘도에서 중세시대 궁전을 보는 것이다. 어른에게는 단지 유용성으로 측정되는 모든 것들에 아이들은 환상을 심고, 전설을 함축한 세계로 바꾸어놓는다. 이것이 아이들이 삭막한 모텔에서 계속 웃을 수 있는 이유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며 세계는 점차 좁아져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긍정적인 인물인 바비(윌럼 더포)도 마찬가지다. 바비는 자신을 보러 온 아들을 단지 잔업이 필요한 인부로 취급한다. 바비는 아들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비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모든 어른들은 관계 맺기에 서툴다. 몇 마디만 하고서도 바로 친구가 되는 아이들과 대조적이다. 어른들의 관계 맺기는 어렵지만 관계 끊기는 너무도 쉽다. 핼리(브리아 비나이트)의 친구 애슐리(멜라 머더)가 딱 그랬다.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와 관계를 끊는 것, 그것은 어쩌면 어른다운 행동일지도 모른다. 핼리가 애슐리의 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핼리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계로부터의 추방

관계를 끊는 것은 한편으론 추방으로 작동한다. 영화에서 핼리에게 이루어진 세개의 추방이 있다. 핼리는 먼저 국가로부터 복지혜택을 받지 못한다. 구직 활동을 하지 않는 실업자에게는 복지혜택을 줄 수 없다는 선고는 핼리에게 일차적인 추방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 호텔 주변에서 향수를 팔지만 호텔 경비원에게 추방당한다. 노동으로부터의 추방이다. 마지막으로 인간관계로부터 추방된다. 핼리에게 유일한 친구인 애슐리가 등을 돌림으로써 핼리는 모든 관계를 잃는다. 핼리는 영화의 말미에서 바비가 쫓아낸 새처럼 세계에서 추방당한 채 서 있을 뿐이다. 파편화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의 추방은 너무도 손쉽게 이루어진다. 그 후에 무니를 핼리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아동복지국 직원들이 찾아온다. 복지국 직원이 보기에 핼리는 아이를 학대, 유기하는 엄마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니가 핼리와 헤어지는 것이 무니의 복지에 더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는 핼리가 무니와 살고 싶다고 말할 때에는 왜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는가. 왜 국가는 오직 추방을 위해서만 작동하는가. 숀 베이커 감독은 핼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쉬운 일보다 더 어렵고 근원적인 고민의 지점을 보여준다. 단지 국가 또는 한 주체에 의한 추방이 아니라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추방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무니의 시점이 활용된다. 무니는 엄마가 왜 향수를 다 버리고 왔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왜 애슐리의 가게에서 싸온 아까운 음식들을 버리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가 버린 것이 아니라 가져올 수 없었음을, 무니는 이해하지 못한다. 무니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무니의 목욕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무니가 혼자 목욕을 하는 장면에서 외화면으로 성매수 남성이 들어온다. 외화면의 성매수 남성은 무니를 발견하고 무니는 성매수 남성을 본다. 이때 관객의 위치는 일순간 성매수 남성의 위치와 동일해진다. 즉 무니의 시선을 받게 됨과 동시에 무니의 위치에서 무니가 보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영화의 공간이 외화면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로써 관객은 무니가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무니가 보지 못하는 것과 무니가 보는 것을 모두 보게 된다.

어른들은 울음을 참는다

무니는 어른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본다.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니는 이렇게 말한다. “난 어른들이 울기 직전에 어떤 표정을 하는지 알아.” 무니는 왜 그런 표정을 알게 되었을까. 당연히도 무니에게 가장 가까운 어른인 핼리의 우는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핼리의 우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무니의 말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핼리의 지난 삶을 생각해볼 수 있을 뿐이다. 영화의 현재 시점에서 핼리는 우는 대신 욕을 하고 가운뎃손가락을 내밀거나 폭력을 사용한다. 폭력은 핼리가 울음을 참는 방법인 것이다. 이것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핼리에게는 핼리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무니가 혼자 목욕하는 숏 이후에 카메라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무니와 젠시(발레리아 코토)를 보여준다. 비가 그친 뒤 무니는 젠시와 함께 무지개를 본다. 그리고 무니가 말한다. “무지개 끝에는 황금이 있대.” 이 희망적인 대사 안에는 슬픔이 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벼랑 끝에 있는 핼리의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무지개 끝에 왜 하필이면 황금이 있어야 할까? 무니는 이미 핼리의 가난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지개를 보며 꿈을 꾸는 일뿐이다. 무니는 무력한 관찰자이고, 그래서 무니의 환상에는 슬픔이 섞여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슬픔은 단지 아이의 무력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슬픔은 프레임 바깥에 있는 관객의 사유에서 나온다. 무니와 젠시가 쓰러진 나무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에서 무니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왜 이 나무를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니까.” 그리고 카메라는 무니와 젠시가 앉은 풍경을 롱숏으로 보여준다. 쓰러진 거대한 나무는 고정되어 있고, 나뭇잎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무니와 젠시는 재잘재잘 떠든다. 자란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고, 유년 시절이란 결국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라는 나무 위에 걸터앉은 무니와 젠시는 시간의 흐름 위에 점처럼 찍힌 순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는 고정된 나무는 불변하는 무엇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시간은 흐르고, 누구나 자랄 수밖에 없다는 불변의 이치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순간들은 언제나 시간의 영속성 위에 잠시 걸터앉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나뭇잎처럼 끝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떨어진다. 그렇기에 무니와 젠시의 세계도 영원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어른들은 이것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언젠가 무니는 어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엄마를 이해하게 됨과 동시에 아이의 세계를 잃게 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그랬듯이. 관객이 느끼는 슬픔은 시간에 대한 이와 같은 사유에서 발생한다.

이 사유가 이끌어내는 질문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왜 우리는 관계를 잃으며 살아갈까? 왜 우리는 더이상 “다 같이 가족처럼” 지낼 수 없게 되었을까?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점점 더 비인간적이 되어가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세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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