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소공녀>의 영어 제목 마이크로해비타트(Microhabitat)는 미미한 서식지를 의미한다. 애벌레에게 거처 겸 식량이 되는 낙엽이나 작은 동식물이 연명할 환경이 되는 통나무 조각이 예다. <소공녀>의 미소(이솜)도 신세지거나 다치지 않고 오직 ‘서식’하고자 한다. 가사도우미 일로 집세를 내고 일과 후 담배와 위스키를 맛볼 수 있다면 족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담뱃값이 뛰자 미소는 집과 기호품 중 더 큰 행복을 택하고 방을 뺀다. 여행 가방에 생필품을 꾸려넣은 미소는 친구들을 하나씩 방문해 달걀 한판과 가사노동을 숙식과 교환한다. 그녀의 선택은 합리적이고 누구도 해치지 않으나, 사람들은 미소가 사는 방식을 불편해하며 자꾸 ‘상식적’ 삶에 끌어들이려 한다. 동화 <소공녀>의 세라처럼 미소는 어떤 처지에서도 품위를 지키는 인간이다. 그녀는 뭔가를 갖기 위해 삶의 소신을 꺾거나 아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02/22
숀 베이커 감독의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지난해 가을 영화제에서 미리 본 나는, 첫눈에 반한 자의 저주받은 숙명에 따라 시시콜콜한 뒷이야기를 캐고 다니게 됐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핼리(브리아 비나이트) 모녀는, 2008년 미국 금융 위기로 양산된 ‘숨은 홈리스’의 일원이다. 숨은 홈리스란, 노숙은 하지 않으나 자동차와 모텔, 가족의 집을 전전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 디즈니월드 주변 퇴락한 모텔촌을 공동작가 크리스 버고시와 돌아다니던 숀 베이커는 굳은 얼굴의 한 아저씨에게 제지당했다고 한다. 남자의 손에는 야구 방망이인지 전동 드릴인지 충분히 무기가 될 물건이 들려 있었다. 사실인즉 한 모텔 관리인인 남자는 수상쩍은 두 백인 중년 남자로부터 보호자 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호하려던 것이었다. 숀 베이커가 직접 겪은 이 상황은, 매직캐슬 모텔 매니저 바비(윌럼 더포)가 배회하는 성도착자를 아이들로부터 떼어놓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한 시퀀스가 되었다. 그리고 피고용인으로서 한계를 잘 알면서도 곤궁한 처지의 투숙객들에게 마음을 쓰는 이 실제 관리인은,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취재원이 됐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영화를 준비한다는 일행의 말을 들은 그는 “영화? 우리 모텔에 배우 앤드루 가필드도 묵었는데”라는 말로 감독과 작가를 식겁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 후반작업 중이던 문제의 영화는 역시 플로리다주 올랜도 지역을 배경으로 집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라민 바흐러니 감독의 <라스트 홈>(2014). 심지어 관리인은 바흐러니 감독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바꿔주었고 숀 베이커는 두 영화의 차이를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고 한다.
6살 무니 역의 브루클린 프린스도 나를 검색의 개미지옥에 빠뜨렸다. 올랜도 출신의 이 배우는 경력자로서 오디션에 응했는데, 나중에 친구 스쿠티 역으로 발탁된 크리스토퍼 리베라와 같은 면접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소년이 오디션을 위해 힘을 내야 한다며 푸시업을 시작하자 브루클린 프린스는 질세라 쭈그려 앉기 운동을 하며 준비체조에 합세했고 그날 감독은 프로듀서에게 무니를 발견했다는 낭보를 알렸다. 브루클린은 리서치에도 철저한 연기자로 모텔촌에 사는 또래 친구들에게 연기에 대한 조언과 모니터링도 구했다고 한다. <할리우드 리포터> 팟캐스트에 초대된 브루클린 프린스의 인터뷰는, 조숙한 어린 배우에게 심드렁한 관객의 입가에도 미소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역할 모델로 엘르 패닝, 다코타 패닝, 에마 왓슨, 데이지 리들리, 갤 가돗을 거명하는 프린스는 지난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엘르 패닝이 자기를 만나러 영화잡지 사무실까지 왔던 행복한 기억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언제가 나를 정말 정말 보고 싶어 하는 다른 배우가 있다면, 엘르처럼 꼭 만나러 가서 기쁘게 해줄 거예요. 비행기를 타야 하더라도요.” 칸국제영화제 월드 프리미어에 참여해 커다란 극장에 만장한 관객과 같이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본 소감을 묻자 프린스는 별거 없다는 듯 “우리 집 텔레비전도 되게 커요”라고 대꾸했다. 살짝 당황한 진행자가 재차 묻자 이 배우는 어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안다는 투로 “숀이 내 감독이라 감사했고 내가 옳은 길을 택해서 만족스러웠어요. 나도 이제 스토리를 들려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어요. 다음 계획이요? 그건 신의 손에 달렸죠.” 언니로 모셔야겠다고 생각하려는 참에 브루클린 프린스는 특종을 건네주듯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세계 최초의 어린이 감독이 되고 싶어요!”
02/24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숀 베이커 감독 필모그래피에서 처음으로 100만달러가 넘는 예산으로 제작됐다. 본래 2012년작 <스타렛>을 마치고 촬영에 들어가길 희망했으나, 아이폰5S로 찍은 <탠저린>(2015)이 독립영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다음에야 제작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전작 다섯편의 예산을 몽땅 합친 것보다 넉넉한- 그래봤자 영화산업 전체로 보면 초저예산인- 제작비를 갖게 된 숀 베이커는 곧장 35mm 필름 촬영을 선택했다. 단, 엄마와 억지로 헤어지게 된 무니와 작별 통보를 들은 젠시(발레리아 코토)가 손을 잡고 디즈니월드 안으로 달려들어가는 마지막 장면만은 아이폰으로 찍었다. 매체에 무심한 관객이 보더라도 즉각 알아챌 수 있도록 화면의 질감과 시야는 확연히 달라진다. 무엇보다 아이폰을 다시 사용한 불가피한 이유는, 디즈니월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촬영이어서 필름 카메라를 반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신의 특별함은, 극중에서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매직캐슬 모텔과 디즈니 매직 킹덤의 경계를 아이들이 처음으로 뛰어넘는 광경이라는 데에 있다. 관광객을 직통으로 실어 나르는 헬기는 무니의 동네를 스치지도 않으며, 엄마 핼리는 하늘의 그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끝내 붙잡혀 돌아오고야 말 아이들의 질주를 엔딩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디즈니월드 장면은 무책임한 엔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선행한 100여분을 주시한 관객이라면, 그해 여름 이후 핼리와 무니의 행로를 예고하는 것은 다른 프로젝트의 영역임도 직감할 것이다.
사후적인 정당화일 수 있지만, 숀 베이커 감독은 “이때까지 영화가 아이들의 현실이라면, 라스트신은 아이들의 머릿속으로 관객을 데려간다”고 말한다. 알렉시스 사베 촬영감독은- 아이폰6S 플러스의 롤링 셔터 기능을 사용했다고 인터뷰는 전한다- <탠저린>과 대조되는 덜컹이는 화면을 티나게 구현했다. 클로즈업도 시점숏도 거의 없는 이 영화는, 촬영기를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렌즈를 여섯살의 키 높이로 대뜸 낮춤으로써 인물의 주관적 시점을 표현한 셈이다. 돌아보면 과연 그때까지 무니와 친구들은 디즈니월드에 발을 들이지 못하지만, 매직 킹덤의 공기를 숨쉬며 논다. 유령 하우스 대신 건설이 중단된 콘도에서 위험천만한 놀이를 즐기고, 사파리 대신 국도변의 소떼를 구경한다. 심지어 놀이동산 입구에서 자유이용권 팔찌를 팔기도 한다. 그처럼 의식 안에서만 존재했던 마법의 왕국으로 무니와 젠시가 뛰어들어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통쾌한 해방감을 잠시 맛본다. 감독의 전작 <스타렛>에는 주인공이 계획하는 파리 여행이, <탠저린>에는 알렉산드라가 꾸는 가수의 꿈이 비슷한 자리에 있었다. 이것은 영국의 켄 로치, 마이크 리의 영화가 결코 보여주지 않는 무지개다. 동시에 우리는 무니와 젠시를 따라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하고 멈춘다. 그곳은 관리인 바비 아저씨와 감독 숀 베이커의 자리이기도 하다.
좋아요
조찬 회동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는 모든 면에서 지극히 시의적절한 할리우드 리버럴 드라마이자, 이미지와 움직임을 다루는 달인의 쇼케이스이며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라는 두 거물의 본질을 실어나르는 최상의 비이클이기까지 하다. 세 번째를 확인시키는 장면은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와 새로운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이 극중 최초로 마주앉는 간단한 아침 미팅 신만으로도 관객은 마음 놓고 기대치를 높일 수 있다. 두 인물은 선의의 동료이지만 편집과 경영의 입장을 각기 대변하는 맞수이기도 하다. 원칙주의자 벤은, 캐서린이 장사꾼 사주가 아님은 알지만, 연성 기사에 관한 캐서린의 작은 의견도 딱 잘라 거절한다. 여기서 벤은 방어적이고 캐서린은 치고 들어갈 만큼 공격적이지 않다. 체념에 익숙한 캐서린의 예의바른 상냥함은 그녀의 단단한 심지를 가린다. 대화는 군데군데 오디오를 겹치며 마디 없이 흐른다. 슬쩍슬쩍 손등을 스치다 이뤄지는 악수 같다. 겉보기엔 톰 행크스가 주도하는 장면이나, 기실 행크스는 그에게 친숙한 인물형을 가볍게 연기하며 메릴 스트립의 새로운 시도에 공간을 내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