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도, 담배도. ‘취향’을 포기할 수 없어 대신 집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친구 집을 전전하는 20대 여성 미소. 전고운 감독은 미생물이 서식지를 찾아다니는 미소서식지(Microhabitat)의 그 미소에서 이 독특한 여성의 이름을 불러왔다. 집, 직장, 남편 같은, 또래의 여성에게 당연히 부과되는 ‘해야 할’ 것들에서 벗어난 미소의 선택을 통해서 전고운 감독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성이 처한 현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현재를 보여주고자 한다. 긍정적인 캐릭터와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더해진 결과, 영화는 갑갑한 현실에 갇히는 대신 차별화된 시각을 제공해준다. <소공녀>가 가진 차별점이자 대중과 호응할 수 있는 접점도 여기 있다. <소공녀>는 건국대학교 영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한 전고운 감독의 장편 입봉작으로 <족구왕>(2013), <범죄의 여왕>(2015)을 만든 광화문시네마의 작품이다.
-<소공녀>의 소재는 어디에서 착상했고, 시나리오를 썼나.
=딱 해야겠다 이런 시점이 있었다기보다 지난 30여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영화인으로 살아오면서 느낀 중간 보고서가 아니었나 싶다. 치솟는 집값에 열받고, 담배 피우는 여자에 대한 천박한 시선에 분노해왔다. 일을 하면서도 계급, 남녀차별 같은 문제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막상 그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보니 이 안에 내가 20대 때 좋아했던 것들, 우정, 사랑, 돈, 집, 이런 것들이 모두 담겨 있더라. (웃음) 그런 모든 것들이 이 영화의 소재가 됐다.
-미소는 월세가 오르자 거기에 맞춰서 기호품인 위스키, 담배를 줄이는 대신 집을 나와 친구 집을 전전한다. 다소 비약적인 설정으로도 보이는데 미소의 선택에 어떻게 정당성을 부여했나.
=캐릭터의 출발을 돌아보면 바로 나였다. 보다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한 목표가 있었고, 20대 때는 그래서 소비하는 것을 참고 안 먹고, 안 사는 데 익숙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니 스트레스가 심하더라. 미소는 20대 때의 나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였다. 그래서 나와는 확연히 다르고 멋진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희망 따위 없어도 돼, 치열하게 싸워줄 테다, 진짜 좆까’, 이런 건데 대놓고 하면 사람들이 반감을 품을테니 어떻게 하면 돌려서 이야기할까, 그런 적절함을 찾아나갔다. 예를 들면 담뱃값 인상이 박근혜 정권 때였는데, 당시 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이 정말 컸다. 그런 것들을 조금은 ‘돌려치기’해서 설정으로 가져간 것도 있다.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고 이 부분을 감지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미소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위스키나 담배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감독 본인의 취향이 반영된 건가.
=비싼 술은, 특히 ‘거지’ 주제에 꾸면 안 되는 꿈이다. 시작은 영화적인 덕후 기질에서였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대학살의 신>을 보면 교양 있는 이들이 막 싸우다가 위스키를 마시는데, 저게 뭔데 싶어서 마시다가 그 맛을 알게 됐다. 나도 촬영 때 위스키를 하루 2~3잔씩 먹었는데 힘들 때 그게 위로가 되더라. 담배는 이 사회에서 담배 피우는 여성을 너무 부정적으로 소비한다는 생각에 넣게 됐다. <타짜>의 정 마담처럼 ‘센 여자’들을 설정할 때 꼭 담배를 쥐어준다. 실제 담배는 순한 여자도 착한 여자도, 그냥 피우는 기호식품일 뿐인데 말이다. 정말 ‘담배 피우는 여자 3부작’을 찍고 싶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설정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나 나름의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은은하게 반영하고 싶었다.
-이솜이 연기한 미소는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가진 것은 없지만 궁색함이 드러나지 않는다. 미소의 스타일링에 의도적으로 그 ‘당당함’,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다.
=가난하다고 누추해 보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미소라는 캐릭터가 주인공으로서 관객의 마음을 최대한 빠르게 가져와야 했다. 흰머리가 되는 설정도 비주얼적인 측면이 컸다. 여성 캐릭터가 백발로 담배를 피우면서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을 생각했는데, 그런 비주얼만 보여줘도 카타르시스가 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취미를 갖고도, 그래도 끝까지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미소가 집을 나와 일용직으로 전전하는 건 적극적인 선택일 수도 있지만 기존 사회에 편입되지 않고 포기한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미소가 하는 선택은 어디까지로 설정했나.
=포기도 아주 큰 선택인 것 같다. 나 역시 영화 일을 하는 게 힘들다고 하고 포기하면 되는데 그걸 그만둘 용기가 없더라. 한국 사회에서는 물론 포기는 패배를 의미한다. 그런데 포기가 나쁜 건 아니라고 봤다. 부모님 세대가 ‘집부터’ 갖춘다고 고집하는 것도, 현재의 젊은이들이 ‘지금부터’ 를 중요시하는 거 둘 다 맞다고 본다. 안 좋은 것은 그런 선택의 순간 없이 그저 휩쓸려가는 것이다. 취직할 때 되니 취직하고 결혼할 때 되니 결혼하고 그렇게 의지 없이 흘러가는 경우를 많이 봤다. 이 영화의 선택이 절대적이라는 주장이 아니라 나와 다른 선택도 무시하지 않는, 나와 다른 것도 인정해줬으면 하는 시각이 반영됐다.
-소위 말하는 N포 세대의 청춘이 가진 문제를 반영하고 있지만 리얼함보다는 판타지성을 살려 흥미를 더한다. 영화적인 재미를 주면서 관객에게 다가가려는 화법으로 보였다.
=워낙 진지하고 어두운 작품들을 좋아하는데, 나조차 이제는 그런 작품을 보는 게 힘들더라. 그런 시선이 세련됐다는 생각이 좀 지워진 것 같다. 문제의식을 가지되 너무 세지 않게, 은은한 표현방식을 통해 신선하고 세련되게 보일 수 있게 해보자, 그런 고민을 많이 했다. 무엇보다 신인이자 여성감독의 작품이라는 의식도 컸다. 사랑받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야 배급사도 잡힐 것 같고, 흥행도 되고 차기작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더라. 그 접점을 열심히 찾아서 만든 게 <소공녀>였다.
-광화문시네마의 공동대표이자 다른 작품들에 ‘품앗이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번에도 서로 협력하는 체제로 일했다.
=<범죄의 여왕> 때는 내가 각색을 했고, 특히 미경(박지영) 캐릭터 등 여성 캐릭터를 디벨롭했었다. 나나 김태곤 감독(<1999, 면회> <굿바이 싱글>)이 주로 시나리오 쓰는 역할을 많이 한다. 이번엔 그들이 내 작품에 그렇게 참여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여성감독으로서 광화문시네마가 만든 시스템이 없었다면, 내가 영화를 찍을 수 있었을까 싶다. 정말 운이 좋고, 글이 좋아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스탭들을 모을 수 있었을까, 이렇게 좋은 배우들을 다 섭외할 수 있었을까. 아마 신인, 여성감독은 무시하기 십상이었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슬프지만 광화문시네마 덕에 그런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내겐 정말 우산 같은 존재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공녀>가 CGV아트하우스상을 수상하며 배급 지원을 받게 됐다. 첫 작품인데 개봉까지 수월하게 진행됐다.
=엘리트 코스라고들 하더라.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고, 수상도 하고, 서울독립영화제에 가서 호평도 받고. 살아오면서 받지 못한 시선을 받으니 마치 깜깜한 동굴 속에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와서 눈이 부신 상태인 것 같다. 2년간 <소공녀> 만들고 개봉하기까지 수입이 하나도 없었다.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와서, 차기작 계획도 없고 그저 이 영화 개봉에 올인하고 있다. 그런데 고생한 스탭, 배우들을 위해서, 또 한국영화에서 부족한 여성 캐릭터를 위해서라도 이 영화가 부디 잘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