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플레이어2로 살아온 사람들의 <레디 플레이어 원>
2018-04-10
글 : 이종범 (만화가)
주인공의 감각

직업으로서의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관객 혹은 독자에게 어떤 체험을 시켜주게 될지 상상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정확하게 과녁의 중앙을 맞히지는 못하더라도 매번 얼추 과녁 안에 집어넣으려면 그런 종류의 상상력이 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레디 플레이어 원>이 다수의 열광적인 반응과 동시에 적지 않은 실망 역시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열광의 근거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적을 능력이 내게 없다. 반면 실망의 근거는 아마도 뻔한 내용 혹은 너무나 익숙한 구조일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 불만을 표하는 이들이 그 이유를 설명할 때에 ‘뻔한 이야기’라는 단어를 피하는 것은 쉽지 않다. 훈련받은 감상자로서 나는 식상함에 관대하지만 동시에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다. 이미 세상에 여러 번 나왔던 무언가를 반복하려면 감독에게는 그만큼의 이유가 필요하다. 즉, 감독이 하려는 이야기가 스타일이나 소재, 구조를 반복해도 될 만큼 중요한 이야기여야 한다. 수많은 영웅들과 추억 속의 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임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반가움과 추억의 쾌감, <레디 플레이어 원>에 그 이상의 존재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감독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권하는 주인공의 감각이다.

공감의 이입 VS 동경의 이입

대부분의 극 서사에서 주인공의 감각이라는 것은 기본요건, 즉 출발지점이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그것을 이야기의 출발지가 아닌 목적지에 놓는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주인공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친구와 2인용 비디오게임을 할 때에 플레이어2(2P)를 원하는 사람은 드물다. 게이머라면 플레이어1을 원한다. 하지만 히어로의 이름을 안고 태어난 웨이드 와츠(타이 셰리던)의 실상이 빈민가 컨테이너촌의 주민인 것처럼 현실 속의 우리 대부분은 귀한 의미의 이름을 안고 태어나 결국 플레이어2의 감각을 갖고 살아간다. 인간이 스토리에 빠져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조연성을 띤 현실의 삶을 확장시켜 주연성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작은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우리는 영화를 볼 때 누구를 주인공으로 인식할까. 별것 아닌 문제로 보이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스토리텔러들은 오랜 기간 고민해왔다. 게임의 경우 직접 조작 가능한 인물이 자동적으로 주인공성을 획득한다. 반면 영화나 만화 등의 이미지 서사에서는 좀더 다양한 방식이 발명되었다. 영화 포스터나 크레딧(만화로 치면 표지), 인지도 높은 배우(주인공의 외적 디자인) 같은 표면적인 수단도 있고 등장 방식이나 최초의 독백처럼 연출을 활용한 방법도 있다. 하지만 숙달된 캐릭터 창조자들은 그 이상을 해낸다.

이야기가 삶에 관한 은유라면 그 삶을 이야기로 만드는 동력은 ‘욕망’에 있다. 따라서 아무리 조연처럼 보이는 캐릭터라도 무언가를 가장 강렬하게 원하는 바로 그 순간 주연성을 획득한다. 만화 <슬램덩크>의 정대만이 처음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강백호가 순간적으로 정대만에게 주인공 자리를 빼앗기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다음 문제가 발생한다. 악당 혹은 안타고니스트가 가진 욕망이 주인공을 상회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러는 이 지점에서 이입의 질을 활용한다. 이입에는 경험이라는 재료가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타인의 삶에 이입한다. 그러나 여기엔 작은 아이러니가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경험이라는 재료가 쌓여감에 따라 이입이 더 잘되어야 하는데 역으로 경험이 적은 아이일수록 무언가에 이입하는 힘이 더 강력하다. 그 이유는 이입이 두 가지 종류로 나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공감의 이입과 동경의 이입이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인물에게 공감의 이입을 하게 되지만 동시에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에게는 동경의 이입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현실의 나를 벗어나 동경의 이입을 시켜주는 수많은 영웅들, 작품 속의 주인공이 된다. 접하는 작품마다 각기 다른 주인공들에게 스스로를 이입하면서 자아의 외연이 바라보고 있는 상을 확장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일상툰, 시트콤 안의 공감 속으로 점차 운신의 폭을 넓혀간다. 공감 가는 캐릭터와 동경하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되고 싶은 나와있는 그대로의 나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리고 보통 이 두 가지는 사이가 좋지 못하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모두는 있는 그대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를 현실과 오아시스 각각에서 오간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 가지의 나를 화해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영화 속 오아시스의 주민들 역시 두 세계의 접점을 금기시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 두 가지 모두를 필요로 한다. 공감되기만 하는 인물은 잠시 위로가 될지언정 공허하고 동경만 하게 되는 인물은 이야기를 유치하게 만든다. 그 두 가지 모습의 공존이 주인공의 요건이다. 그리고 어떻게 두 가지의 자신을 화해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궤적을 펼쳐주는 것은 지혜로운 창작자의 몫이다.

모든 주인공들을 위한 헌사

대중적인 이야기 안에 감독 개인의 고민을 깊게 새겨넣을 때 가장 유용한 도구 중 하나는 상징이다. 스필버그는 상징의 거장다운 직조를 보여준다. 관객이 이야기를 앞에서부터 따라갈 때 구조를 보고 있는 작가는 이야기를 뒤에서부터 거꾸로 쓴다. 첫 열쇠를 얻는 과정은 그 자체로 창작에 대한 은유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되고 싶은 나(아르테미스)의 얼굴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사만다)의 반점이 드러난다. 웨이드의 이상적인 자아상이 활개치던 오아시스에서 시작된 갈등은 현실 속에서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빈민가에서 마무리를 맞이한다. 이렇게 두 가지의 내가 화해할 때 우리는 주연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세상은 둠 아일랜드와 같고 그 앞에서 다시 플레이어2처럼 무기력해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나를 있게 해주었던 수많은 나들을 불러모아야 한다. 이 모든 나의 누적이 현재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캐릭터가 모여 최후의 돌격을 하는 후반부는 어딘가에서 늘 보아왔던 절정부이지만 평범한 작품이 현실적 제한으로 인해 보여줄 수 없었던 쾌락적 장면이며, 현실에서의 연대가 가지는 가능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아의 역사를 통합시키는 순간이다. 이러한 순간에 비로소 <레디 플레이어 원>은 추억 속의 캐릭터를 한자리에 모으는 단순한 쾌감을 넘어 지금을 있게한 수많은 나를 모아 세상과 대적하는 모든 주인공들을 위한 헌사가 되었다. 스필버그는 새로운 구조 속의 참신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대신 시간이 흘러도 반복되어야 하는 우리 삶의 정수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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