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란도라는 한 남자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살아 있는 인간 가운데 가장 깊은 슬픔의 수렁에 빠진 이는 행복하게 동거하던 연인 마리나(다니엘라 베가)지만, 유족과 경찰은 마리나에게 당치 않은 의혹을 품고 모욕을 가하며 애도할 자격마저 박탈한다. 마리나는 트랜스우먼이고, 그들의 눈에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은 수상쩍고 불길한 추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판타스틱 우먼>은 그러나 마리나의 곤경을 거칠고 어둡게 표현하지 않는다. 가수이기도 한 그녀의 관점에 온전히 입각한 이 영화의 슬픔은 찬란하다. 2013년 중년 이혼녀의 이야기를 담은 <글로리아>로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수상했던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은 다섯 번째 장편 <판타스틱 우먼>으로 2017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도 최우수 각본상과 최고의 LGBTQ 상영작에 수여되는 테디상을 품에 안았다. 독일에 거주 중인 렐리오 감독의 <판타스틱 우먼> 크레딧에는 <토니 에드만>의 마렌 아데 그리고 피노체트 독재 이후 칠레영화계를 함께 대표하는 <재키> <네루다>의 파블로 라라인이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자신의 첫 영어영화인 신작 <불복종>(Disobedience)과 줄리언 무어 주연의 리메이크 <글로리아>까지, 세바스티안 렐리오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여성영화를 만드는 감독이기도 하다. <씨네21>은 <판타스틱 우먼>과 <불복종>이 나란히 상영된 2017년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그를 만났다. 이 부드럽고 지적인 감독의 모습을 다시 마주친 곳은 제90회 오스카상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이 호명되는 순간의 중계 화면이었다.
-<판타스틱 우먼>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떠올렸습니까.
=나는 <언노운 우먼> <영향 아래 있는 여자> 같은 1970년대스러운 영화 제목에 왠지 끌립니다. ‘여인’이 제목에 있음으로써 영화의 중심이 어디 있는지 관객에게 확고히 전하기도 하고요. 또 제목에 포함된 ‘판타스틱’이라는 수식어는 중의적입니다. 마리나는 ‘근사한’(fabulous) 여성이라는 점에서 판타스틱하고, 동시에 생물학적으로는 여자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욕망과 판타지를 끝내 현실로, 진정한 정체성으로 실현했다는 의미에서 판타스틱 우먼입니다.
-당신과 벤자민 에카자레타 촬영감독은 <판타스틱 우먼>의 화면 비율을 와이드 스크린으로 선택하고 프레임 중앙에 마리나를 자주 배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사회 주변부로 밀쳐져온 마리나라는 인물을 이 영화의 중심으로 확고히 세우고 싶었습니다. 잔 모로나 브리지트 바르도 같은 위대한 여성배우들처럼요. 그럼으로써 <판타스틱 우먼>이 다른 누구의 관점도 아닌 마리나의 이야기임을 선명히 했습니다.
-트랜스우먼 마리나는 매우 여성적이지만 그의 여성성은 관습을 벗어납니다. 마리나의 연인 올란도도 평범하고 순응적인 중년남으로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이성애 중심적 사회가 세워놓은 규범에 주저 없이 도전합니다. 마리나와 올란도를 연기할 배우들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길 바라며 찾았는지 궁금합니다.
=올란도는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이미 하나의 인생을 살아본 인물입니다. 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일단 진정한 사랑을 찾으면 주변의 모든 사람이 추방한다고 해도 그것을 지키려는 남자를 생각했습니다. 마리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배우 다니엘라 베가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 캐릭터입니다. 애초에 우리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트랜스우먼으로서 사는 경험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다니엘라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만남이 계속되면서 다니엘라의 삶이 시나리오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고, 결국 “주인공이 내 눈앞에 있는데 또 다른 여성배우를 굳이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판타스틱 우먼>은 마리나가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편 흥미롭게도 올란도는 이야기에서 상대적으로 일찍 퇴장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영화 내내 존재감을 갖습니다.
=몇몇 장면에서 올란도는 유령처럼 다시 등장합니다. <판타스틱 우먼>은 한 특정 장르에 들어맞지 않는 영화입니다. 스릴러이자 멜로드라마이고 칠레 사회의 리포트인 동시에 유령영화입니다. 나는 영화가 이런 속성을 주인공 다니엘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다니엘라의 유동성(fluidity)과 핍박에도 거듭 반동하며 일어서는 탄성이 감독인 내가 이 영화를 만들며 예술적으로 ‘헤플’(promiscuous)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웃음) 재미나게도 스페인어(<판타스틱 우먼>의 대사는 스페인어다)에서 장르를 의미하는 단어는 젠더라는 뜻도 갖고 있거든요. 전작 <글로리아>를 만들 때보다 필름메이커로서 자유롭다고 느꼈습니다.
-<판타스틱 우먼>에는 한줄 대사 없이도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함축적 이미지들이 무척 많습니다. 다니엘라가 바람을 거슬러 걸어가는 환상적 이미지나 다리 사이에 올려놓은 동그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는 아름다운 숏이 그렇습니다. 연출하면서 노골적으로 의미심장한 이미지가 될까봐 걱정하진 않았습니까.
=글쎄요. 한두번 정도는 염려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정말 직설적으로 던져야 하는 순간이 이따금 있다고 믿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세상이 두터운 안개에 둘러싸야 있는 듯 느껴지는 시대에는. 내게 그 숏들은 강력한 메타포입니다. 다니엘라가 마이클 잭슨처럼 바람을 거슬러 몸을 기울이는 장면을 찍으면서는 특히 즐거웠습니다. 방법이요? 말 못합니다. 비밀이니까. (웃음) 버스터 키튼 영화와 다른 무성 코미디를 염두에 두고 찍은 몇몇 신 중 하나입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판타스틱 우먼>은 초기 시네마와 프랑수아 트뤼포, 루이 말 그리고 여기저기 오마주를 숨기지 않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향 아래 있는 영화입니다.
-실제로 관객이 이 영화를 본 직후에 떠올릴 만한 이름은 페드로 알모도 바르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성소수자 멜로드라마일 텐데요.
=두 감독의 영화를 모두 깊이 존경하지만 <판타스틱 우먼>은 더 오래된 고전영화들과 가깝습니다.
-영화에는 올란도의 아들이 마리나를 육체적으로 위협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그와 친구들은 마리나의 얼굴을 테이프로 감아 일그러뜨리는 특이한 행위를 합니다. 감독은 이 선택으로 무엇을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 것인가요.
=마리나를 실제로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그녀가 겪는 굴욕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테이프에 의해 일그러진 마리나의 얼굴은 이 남자들이 인식하는 마리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올란도의 로커에서 마리나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장면에 대해 연출의도를 듣고 싶습니다.
=나는 영화 내부에 공백(void)을 만드는 일을 사랑합니다. 그것은 시네마 고유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시네마는 스크린에 존재하는 것들뿐만 아니라 부재하는 것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영화는 곧 그 공백을 메우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생각해보면 영화의 1초에는 24번의 구멍이 있죠. 언급한 장면의 공백은, 앞서 설명한 <판타스틱 우먼> 속 메타포들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