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무쌍하여 5분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화를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기호와 상징, 대사 하나하나에 꼼꼼히 주석을 달아가는, 그래서 본문 텍스트보다 주해의 텍스트가 훨씬 두꺼워지는 독해법이 그 하나. 미리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보고, 동명의 원작 소설을 읽고, 다섯권의 만화까지 보면서 철저히 대비하는 전투태세 모드도 여기에 속한다. 하나, 그러기엔 우리의 밤은 짧다(만화책은 절판이다). 다른 하나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기호에 현혹되지 않고 그저 각 파편들의 장면과 사건, 진행 속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방법. 그러다보면 어느새 익숙해진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관객이라면 둘 중 하나의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후자를 추천한다. 어쨌든 우리의 밤은 짧으니까).
앨리스를 위한 장진 주사
주인공, “검은 머리 아가씨”를 이상한 나라에 빨려들어간 앨리스로 여겨도 무방하리라.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 앞으로 마구 튀어나오는 인물들은 뜬금없다. 각자가 지닌 사연을 들어본다 한들 그 인물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도 없고, 그들이 벌이는 상황 전체를 더 잘 파악할 수도 없다. 그저 앨리스를 따라가면서 그녀에게 닥치는 사건들과 그다음 사건으로의 전개를 바라보는 수밖에. 마찬가지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인물들도 저마다의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넘쳐나지만, 우리의 머리와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 그저 사연을 뱉어내는 비트에 맞춰 우리 몸을 흔드는 게 낫다.
다행히 마지막 5분을 남겨두고 이제껏 휘몰아쳤던 사건들을 큰 덩어리로 분류해준다. 술내음 물씬한 폰토초(교토의 대표적인 밤문화 거리)의 봄, 매운맛과 함께하는 여름날의 헌책시장, 게릴라 무대로 야단법석인 대학 축제의 가을, 그리고 지독한 감기에 시달리는 겨울. 정신없이 휩쓸려 떠내려온 관객일지라도 그제야 어느 정도 이야기의 얼개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밤을 벗어난 밝은 시간대로 마무리짓는 마지막 장면은 더없이 차분하고, 왠지 설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침없이 내달린 롤러코스터가 정차할 즈음의 평온함 혹은 토끼굴에서 벗어나 잠에서 깨어난 앨리스가 맛보았을 고요함이 이러하리라.
화는 대립과 어긋남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인다. 남과 여는 어긋나고, 향수에 젖은 기성세대와 무기력한 젊은 세대는 대립한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밤마실을 떠나는 주인공은 대책 없이 순수해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유일하게 온전해 보인다. 길 잃은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마침내 자신의 길을 잃지 않은 비결이다.
봄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을 이끌어가는 파티와 축제는 여러모로 ‘반문화’의 성향을 띤다. 여기서 반문화는 치밀하게 기획한 전략이 아니라 난센스와 부조리에 가깝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반문화는 (기성세대가 젊었을 때) 권태에서 벗어나려는 객기이거나 (지금의 젊은 세대 입장에서) 희망이 없기에 뱉어내는 탄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문화는 바짝 말라 시들어버린 청춘을 위한 마지막 심폐소생술이기도 하다. 떠들썩한 난장판마저 사라진다면 삶은 지독한 독감에 시달리다가 무너지고 말 테다. 그나마 술잔을 부딪치고, 연애를 응원하고, 헌책일지언정 그 가치를 아는 누군가에게 전하려들 때 어긋남과 대립은 (잠시) 해소된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 모두는 정신없는 거리에서도 그 무언가를 함께, 은연중에 원하고 있었다.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 포스트 곤 사토시
예전 인터뷰에서 유아사 마사아키는 자신을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곤 사토시에 가깝다고 일컬었다(두살 차이가 난다). 곤 사토시가 오시이 마모루로부터 출발하여 자신만의 차별성을 만들어낸 것처럼, 곤 사토시로부터 유아사 마사야키는 또 다른 변별점을 찾아냈을까? 오시이 마모루, 곤 사토시, 유아사 마사아키를 하나의 공통군으로 묶는 것이 가능할까? 그들의 대척점에 미야자키 하야오를 세운다면 무엇인가 어렴풋한 경계선이 떠오를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서는 쌍방간 대립을 극복하면서 (이전보다 나은) 하나의 균형적인 질서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강렬하다. 때로는 그 질서를 위해서 위계적 협동(그리고 희생)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리고 테크놀로지는 가급적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반면 오시이 마모루, 곤 사토시, 유아사 마사아키의 작품들에서는, 대립을 극복하고 질서를 수립하겠다는 기획은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결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공통적으로 이들에게는 체계/체제/세계의 완성보다는 네트워크의 작동이 훨씬 부각된다. 네트워크 회로 속에서 다양한 권력과 이해관계가 쉴새 없이 돌아간다. 현재라는 상황은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고 그 속에서 힘이 재편되는 잠정적인 상태이다. 테크놀로지는 네트워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망의 단면들을 중계하는 미디어로 쓰인다. 이러한 공통점 속에서 실제의 익숙한 공간(실명으로 등장하는 도시, 그리고 골목)은 어느 순간에 복잡한 미로가 되고, 사람들은 숨가쁘게 숨바꼭질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오시이 마모루는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구분을 거의 허물어버리는 반면, 곤 사토시는 영화의 편집 문법을 더욱 정밀히 가공하되 애니메이션만의 표현 가능성과 결합시킨다.
그렇다면 유아사 마사아키는? 그에게는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돌아가려는 기운이 강하다. 그래서 대놓고 두 가지 대비되는 스타일, 소위 ‘극화 스타일’과 ‘카툰-일러스트 스타일’로 작품을 만들어간다. 전자에는 인물들이 겪는 현재의 사건이, 후자에는 감정과 정서, 과거의 기억이 담긴다. 그런데 유아사 마사아키의 극화체는 사실적인 재현 대신, 그것을 한껏 과장시키고 비틀고 뒤튼다. 풍경은 광각의 왜곡상으로, 인물의 엉뚱한 몸짓은 늘어난 팔다리로 표현되며, 공간적 깊이감은 납작한 레이어들을 얹어놓는 식으로 대체된다. 어차피 사건들이란 결코 현실적이지 않으니까. 주목할 것은 카툰-일러스트 스타일이다. 그 원류를 찾자면 1950~60년대의 모던 카툰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거기에는 데즈카 오사무가 기다리고 있다. 당시 새로운 애니메이션 미학으로 떠오르던 모던 카툰 스타일로 자신만의 미적 실험을 하던 데즈카 오사무의 탐색은 아쉽게도 <철완 아톰>의 TV시리즈 작업 때문에 멈췄다. 유아사 마사아키는 거기에 색감을 더욱 강렬히 끌어올려서 자기 작품의 한축으로 삼는다.
요컨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대립으로 가득하되 어느 하나의 배제나 극복이 아닌 공존을 추구한다. 스토리 면에서든, 스타일 면에서든 말이다. 불안정해 보일지언정 그게 삶이다. 인생이 하룻밤에 축약되어 있다면 낮은 무엇일까? 밤과 붙어 있는 낮도 인생이겠지. 그리고 현실논리가 지배하는 시간대가 낮이라면 밤은 그로부터 억눌려왔던 욕망이 작동하는 시간대일 테고. 혹여 누군가에게는 낮과 밤의 논리가 반대일 수도 있겠고,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이네. 안 그런가요, 검은 머리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