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 상승적 구도가 의미하는 것
2018-04-19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왜 그들은 하늘을 날아야 했나

방식이 다를 뿐 브루노 뒤몽은 스탠리 큐브릭과 같은 부류의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며 인간에게 본질이 있다면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영화에서 직접적인 해답을 찾으려 애썼다.

브루노 뒤몽이 바뀌고 있다. <까미유 끌로델>(2013) 이후 시작된 그의 변화는,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던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아르테TV>의 방영분만 비교해보면, 2014년 방영된 뒤몽의 <릴 퀸퀸>은 2013년 같은 채널에서 방송된 제인 캠피온의 <톱 오브 더 레이크>를 훨씬 상회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악센트가 제거된 억양, 서스펜스를 제외시킨 구성, 다중 플롯을 자제하고 다중의 인물을 내세우는 전략은 그가 여전히 로베르 브레송의 후예임을 증명해준다. 하지만 겉보기에 뒤몽은 완전하게 달라졌다. <릴 퀸퀸>이 그렇듯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은 허허실실하게 만드는 코미디영화다. 그럼에도 이전보다 더 적나라하게 브루노 뒤몽을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한가지의 대비에 신경이 쓰였다. 다름 아닌 하향과 상향의 상반된 방향성이다. 등나무를 바라보며 앙드레(파브리스 루치니)가 외치는 “만물은 자란다”는 순수한 전제는, 결말에 이르러 정말로 ‘하늘을 나는 사람’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무엇이 그들을 날아오르게 했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했다.

마을에서 잇따라 실종사건이 발생하자, 형사 마생(디디에 데프레)은 다음 사건을 예측하려 한다. 첫 번째 희생자가 릴 출신이고 두 번째가 루베에서 왔으니 다음 차례는 투르쿠앵 사람일 거라고 그는 말한다. 이 추리는 간단하게 빗나간다. 어부 가족에게 희생되는 세 번째 인물은 다름 아닌 릴에서 온 젊은이들이다. 그날 오전에 어부 가족들은 부드러운 어린 자들을 먹자고 결정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규칙성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언뜻 카니발리즘의 극단적 설정에 파묻힐 우려가 있지만, 이후 계속되는 ‘예상을 뒤엎는 결말의 제시’는 앞부분의 어긋남이 단순한 실수가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침 뱉는 귀부인, 바닥을 뒹구는 소녀들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저속하거나 우아한 행위가 계층적 특징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르주아 가문의 구성원들이 고귀할 것이라는 일반 추론을 밀어낸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을 구해낸 어부를 ‘구세주’라 칭하면서 판단 분류의 오류를 역이용한다(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블랙코미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빗나감에 대한 질문 중 하나로 ‘하늘로의 승천이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필 수 있다.

일상적 규칙들이 의미하는 바

언뜻 하늘을 향한 상승은 성스러운 기호라고 취급된다. 성모상 바로 위로 이자벨이 날아오르자 앙드레는 “나의 천사”라 탄식하는데, 이때의 추론은 꽤나 정당해 보인다. 비교해, 등받이 의자에서 땅으로 고꾸라지는 크리스티앙을 향해 오드는 “벌 받은 것”이라 단정짓는데, 그가 진정 잘못된 마음가짐에 대한 처벌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니, 오히려 억지스러운 인과관계의 연결이 사태를 복잡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오판은 또다시 형사에게서 발견된다. “난 허탕을 치면 몸이 부풀어”라고 말하는 이 사내는 아마도 다른 이유로 덩치가 커진 것 같다. 하지만 끝까지 그는 “허탕을 치니 부풀었다”고 절망한다. 결과적으로 거의 모든 인물들이 믿는 진실은 이렇듯 삐걱거린다. 그들이 추측하는 원인이 틀렸고, 명시적 표기의 부분마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집아이’를 뜻하는 마루트(브랜든 라비에빌)나 ‘아무개’를 뜻하는 마생이란 이름도 필연적이진 않다. 그저 호칭으로 사용될 뿐이다.

우연한 무언가가 가로막더라도

만일 이 작품을 언어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본질을 말하는 영화라 전제한다면, 이가 최근 유행하는 미학적 조류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가상을 전제하는 사실주의의 경향, 육체성을 위시하는 포스트모던의 인식론 그리고 경험론적 심리학의 영화들과 전혀 반대 위치에 서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작품을 지극히 구조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대신 본질론에 대한 통찰을 가정하고 살피면, 스토리가 보여주는 다소 기이한 지점들은 해결된다. 예를 들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다 알게 된다는 원칙, 수레는 막내가 밀어야 한다는 관례, 감자는 씻은 후 깎아야 한다는 일상적 규칙들은 모두 ‘본질적이지 않다’는 면에서 의미 없는 말들이 된다. 게다가 이 의미 없는 규칙들은 이후 극단적으로 발전한다. 인간이 날 수 있다, 아니다의 문제가 그러하고, 크리스티앙이 앙드레의 처남인지 사촌인지 구분하는 문제 그리고 빌리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파악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이지 않지만) 나열되기 때문에 중요한 듯 인식되는 사례들이다. 우연한 결과를 통해 영화는 외연의 세계에 갇히는데, 따라서 세계를 포괄하는 좀더 넓은 지평을 관객은 찾아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할지 알지만,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크리스티앙의 대사는 어쩌면 감독인 브루노 뒤몽이 믿는 본질주의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인 것 같다.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절대 갖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핵심에 대해 되짚어야 하는 이유다. 앞서 보았듯 남성이나 여성 등의 상황적인 차이는 이곳에서 오히려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인간이 속한 ‘영역’의 갈래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영화는 요란하게 소리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 넓게는 (<릴 퀸퀸>에서 보여주었던) 인종을 포괄하는 출신의 문제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슬프게도 이 점을 반론하기는 어렵다.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은 1910년의 휴가철을 배경으로 삼는데, 당시는 세계대전의 끔찍한 음울함이 스멀스멀 세계를 홀리던 시기였다. 아무리 사랑한다 하더라도, 고요한 풍경 속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피 흘리며 다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쟁 후에, 다른 양상으로 모습을 바꾼 또 다른 전쟁이 인간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플랑드르>(2006)에서 이미 우리는 비슷한 주제를 살핀 적이 있다.

하늘을 날건 땅으로 고꾸라지건 아무리 반복해도 나열 자체가 규칙이 될 수는 없다. 대신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본질적 영역이 이 세계를 사로잡는다. 이러한 결말을 허무하다고 평할 필요는 없다. 대신 처음의 질문, 왜 그들이 하늘을 날아야 했는지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이 장면은 급작스레 등장하지 않는다. 날갯짓하는 앙드레의 슬랩스틱, 해변을 달리는 바람차의 메커니즘 그리고 ‘성모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자벨의 상승이 차례로 나타난다. 인물들이 대사를 통해 전달하듯 슬랙 베이는 “이상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기묘한 것이 아니다. 본질적 충돌의 원리가 잠재되어 있는 장소일 따름이다. 즉, 실체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더라도 성모상이 가리키는 추리의 영역이 또 다른 상승의 구도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빌리(라프)는 앙드레의 길을 따라 북부 명문가의 관례를 따를 수도, 예수의 삶을 환유하는 구원자가 될 수도 있다. 우연한 무언가가 그를 가로막더라도,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공허를 가로지르는 자연의 침묵에 동의하며, 이 아이를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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