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출신, 좋은 직장, 좋은 집안. 여느 드라마였다면 번듯한 조건이지만, 안판석 감독의 리얼 월드 안에서 이 남자의 사정은 좀 달라진다. 진아(손예진)의 전 남자친구 이규민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이규민을 연기한 배우 오륭은 진아를 중심으로 직장 내 여성이 겪는 현실을 실감나게 그려, 시청률 6.2%로 인기를 얻고 있는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 얼핏 진아와 준희(정해인)의 달달한 연애에 걸림돌인 것 같지만, 그런 의미에서 되레 그들의 사랑에 가속을 붙여주는 역할이다. 변변한 출연작도 없는데 이렇게 주목받는 지금이 “기적이다”라는 오륭. 연기에 대한 그의 변을 들어보니, 기적보다 노력이 앞서는 배우다.
-전 여자친구를 향한 이규민의 패악질이 도를 넘었다. 살면서 들을 욕을 이번 역할로 다 듣는 거 아닌가.
=이규민은 정말 내가 봐도 나쁜 놈이고 지질하다. 아는 사람들도 “너 원래 이런 사람이었냐”며 욕도 하고 하도 맞아서 짠하다는 분도 있고. 덕분에 ‘지질한 연기 하나는 끝내준다’는 격려도 얻었다. 정말 손예진, 정해인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는 내가 봐도 달달하더라. 나도 그거 보면서 연애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내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또 막 떨리고 그런다. 배우로서 욕먹는 게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 (웃음)
-필모그래피가 많지 않은데, 안판석 감독의 전작 <아내의 자격> <풍문으로 들었소>에 출연한 인연으로 이번 캐스팅도 이루어졌다고.
=<아내의 자격> 때 비리 영어강사로,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는 로펌의 비서 역할로 출연했다. 잠깐인데도 감독님이 잘한다고 응원해주셨다. 이번 작품 캐스팅 전에, 감독님이 늦은 밤에 전화를 하셨다. “나쁜 놈이야. 악역인데 아주 좋아. 한번 해봐” 하시며 곧 연락 갈 거라고 하시더라. 전화 받고 한잠도 못 잤었다.
-이규민이 가진 ‘지질함’을 보신 건 아닐까.
=이규민에 평소 내 모습이 있을 거다. (웃음) 그런데 대본이 정말 디테일하다. 대사뿐만 아니라 행동, 속마음까지 모두 지문에 있다. 감독님이 “이런 놈들은 이렇게 해” 하셨는데, 징징되는 그 느낌이 대본에 다 있다. 감독님의 현장은 거의 리허설 없이 동선, 대사만 체크하고 한번에 간다. 기회가 많지 않다보니 현장이 정말 전쟁터다. 손예진씨에게 ‘곤약 같다’고 말하는 장면을 과하게 준비해갔더니 감독님이 “진실하게 해보자”며 조언을 주시더라.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연기의 중력>으로 남자연기상을 수상했다. 무명 배우 태석으로 출연해 연기의 중압감을 표현하며 호평받았다.
=그 트로피가 우리 집 가보다. 중학생 때부터 대학 때까지 미국에서 지냈다. 경제학을 공부했고 군 제대 후 본 연극에 매료되어 연기를 시작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에서 공부했다. 사실 지금까지 직업을 배우라고 말하는 게 힘들었다. 연기를 그만둘까도 고민했다. 수상하고 안판석 감독님께 문자를 드렸더니, 바로 전화로 축하를 해주셨고 그게 큰 힘이 됐다.
-차기작 캐스팅에는 좀 변화가 있나.
=전혀 없다. (웃음) 오늘이 내 생애 첫 인터뷰인데, 인터뷰 요청 들어오고서도 의아하더라. 이렇게 각인된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처럼 캐릭터가 영화 자체가 되는 그런 연기도 해보고 싶고, 나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연기를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궁금증 하나. 오륭은 예명인가.
=본명이다. 오히려 너무 예명 같고 멋부린 이름 같아서 평범한 이름을 잠깐 쓰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다시 이 이름으로 돌아왔다.
영화 2016 <연기의 중력> TV 2018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2015 <풍문으로 들었소> 2012 <아내의 자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