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매리언(로리 멧커프)과 딸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사이의 갈등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딸은 독립하길 원하고 엄마는 가족 모두가 함께하길 바란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2017)에는 ‘모녀’라는 낯익은 단어가 채 담지 못하는 감정의 얼룩들이 존재한다. 엄마는 딸이 어서 성장하길 바라지만 운전도, 계란 프라이도 혼자서 하지 못하게 한다. 딸이 자기 몰래 뉴욕의 대학에 지원한 것에 화가 나서 말을 하지 않는 매리언의 모습은 절친에게 토라졌던 줄리(비니 펠드스타인)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흉을 볼까봐 편지를 전하지 못하는 모습은 크리스틴이 제나(오데야 러시)를 대하던 모습과도 얼마간 닮았다. 그러나 서운함, 배신감, 동경 중 그 어떤 것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완벽하게 설명하진 못할 것이다. 기하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줄리의 마음을 단순히 ‘질투’로 정의할 수 없듯, 딸을 대하는 매리언의 마음도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엄마를 대하는 크리스틴의 태도도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엄마에게 “근데 좋아하냐고” 물어본다. 사랑이 혈연관계에 종속되는 감정이라면, 호감은 관계를 벗어나 개인의 취향에 의존하는 감정이다. 크리스틴은 매리언이 자신을 딸이 아닌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좋아해주길 바란다. ‘레이디 버드’라는 예명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크리스틴은 매리언이 자신의 예명을 무시하자 차에서 뛰어내린다. 오로지 매리언만이 크리스틴을 이 정도로 폭발시킨다. 그러나 정작 뉴욕에 도착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본명으로 소개한다. ‘레이디 버드’는 새크라멘토에서, 특히 엄마 앞에서 의미를 가지는 이름이다. 엄마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동시에 호감도 얻고 싶은 복잡한 마음을 단순히 ‘사춘기’라는 단어 하나에 담을 수 있을까. 영화는 여러 갈래로 향하는 감정의 결을 하나하나 쓰다듬는다. 두 여자는 서로로부터 얼마간 떨어진 영역 안에서 서로를 끊임없이 응시한다.
어른의 시간
그러나 영원히 화합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들 사이에도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들 사이의 간극을 넘나들며 모녀를 하나로 잇는 것은 어떤 행동들이다. 영화에서 친밀한 사람들은 같은 행동을 하지만, 외로운 이들은 홀로 행동한다. 눈물을 터뜨리는 르비아치 신부의 앞에는 애석하게도 그와 같은 표정으로 울음 짓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연기 수업은 이 외로운 남자가 함께 울어줄 누군가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닐까.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셰릴의 처지는 그녀가 피우는 “담배이면서 담배가 아닌 것 같은” 허브 담배와 닮았다. 그녀는 가끔 맥퍼슨 가족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 혼자 멀뚱하게 서 있다. 크리스틴은 제나의 그룹 사이에서 곧잘 이상하다는 말을 듣지만, 줄리는 그녀와 같은 행동을 즐겨 한다. 줄리는 크리스틴과 함께 성찬떡을 먹고 춤을 추며, 심지어는 그녀를 따라 자기 이름에 따옴표를 친다. 크리스틴과 같은 행동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엄마 매리언이다. 영화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잠든 모녀의 모습에서 시작되며, 이 장면은 예쁜 드레스를 집어들고 마주 보며 서 있는 모녀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를 향하여 거울처럼 닮은 행동을 한다. 함께 집을 둘러보는 그들의 모습은 예쁜 집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크리스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매리언도 그녀와 같은 꿈을 꾸던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두 모녀의 유사성이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그들이 친구의 비밀을 감싸안으며 위로하는 장면이다. 크리스틴이 우는 대니를 다독일 때 매리언은 르비아치 신부를 위로한다.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음악은 크리스틴이 운전을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한번 흘러나온다. 새크라멘토의 전경을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얼굴 위로 엄마 매리언의 얼굴이 겹쳐진다. 두 모녀 사이에 놓인 동일성은 행동을 넘어 감성에도 번지며, 마침내 시간을 거슬러서 서로에게 닿는다. 두 여자가 무수한 “같음”을 반복하며 쌓아올리는 유대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나는 사라 수녀가 크리스틴에게 던진 말을 약간 비틀어보고 싶다. 같은 행동을 하는 것. 그것이 결국 사랑 아닐까.
크리스틴은 방 벽면 가득한 낙서들을 하얗게 덮으며 어른의 시기를 맞는다. 그러나 새크라멘토의 구석구석을 더듬던 카메라는 까마귀 클럽의 네온사인을 잠시 비출 뿐이다. 생각보다 어른의 시간은 간단하고 시시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동경하던 뉴욕에 마침내 도착한 크리스틴은 그곳에서 새크라멘토를 본다. 악수하는 버릇을 언급하는 남자는 전 남자친구 카일을, 브루스 별은 첫사랑 대니를, 응급실의 간호사는 엄마 매리언을, 성당의 성가대는 그들이 함께했던 서투른 뮤지컬을 떠올리게 한다. 눈에 붕대를 감은 어린 소년의 얼굴은 오빠 미구엘을 닮았다. 미구엘도 소년과 같이 상처를 안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크리스틴이 벗어나고 싶었던 일상이 그녀의 일부가 되었음을 본다. 그녀는 가족에게 전화하여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예쁘다고 말한다. 엄마 매리언도 서투른 고백을 한다. “레이디 버드라는 너의 이름이 참 예뻐.” 그 고백은 자신을 좋아하냐고 묻던 딸의 질문에 대한 엄마의 뒤늦은 응답이다. 너무 가까워서 서로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들은 공간(뉴욕과 새크라멘토 사이)과 시간(유년기와 성년 사이)의 거리를 맞이하고서 서로를 온전히 바라보고 인정한다. 그러나 거리두기는 이별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공항에서 크리스틴을 배웅할 때 매리언이 입은 붉은 치마는 크리스틴이 프롬(미국 고등학교의 무도회)에서 입었던 붉은색 드레스와도 닮았다. 이 영화를 두 여자의 프롬으로 봐도 좋을까. 서로로부터, 또 유년기로부터 작별하는 두 여자의 마지막 춤으로 말이다. <레이디 버드>가 성장기를 다룬 영화인 이유는 그것이 딸뿐만 아니라 엄마,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의 성장을 다루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닮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녀의 세계나 친구 사이의 미묘함, 혹은 전쟁을 과감히 전경화하는 선택은 내게 그다지 새롭지 않다. <레이디 버드>가 가진 특별함은 오히려 그것이 던지는 질문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엄마” 혹은 “딸”이라는 단어에 가려서 감히 묻지 못했던 질문을 우리에게 해사하게 건네어온다. 엄마의 이름을 경유하지 않고 저 늙은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딸의 이름을 버리고도 저 어린 여자를 좋아할 수 있을까. 영화는 기이한 예명 하나를 그들의 사이에 던져둔 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가 하나의 답 대신에 무수히 많은 행동에 도착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영화가 내게 보여준 풍경에 대하여 말해보고 싶다. 모녀란 결국 긴 시간을 건너서 서로의 닮음을 확인하고 위로하는 두 여자를 이르는 말이 아닐까. 영화가 끝나기 직전, 크리스틴은 매리언에게 하나의 질문을 건넨다. “엄마도 새크라멘토를 처음 운전할 때 감상에 젖어들었어?” 그녀는 지금 지독히도 떠나고 싶었던 풍경을 바라보며 지독히도 멀어지고 싶었던 이를 다시 생각하고 있다. 나와 닮은 당신은 흘러간 어느 순간에 나와 닮은 감정을 느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