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이면서도 강인함을 품은 얼굴. 줄리엣 비노쉬는 탁월한 연기력과 예술적 감수성을 겸비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배우다. 예술가 집안에 태어나 자란 영향 때문인지 비노쉬는 일찍이 배우의 길을 택했다. 데뷔 초부터 장 뤽 고다르, 레오 까락스 등 프랑스 영화사의 큰 흐름을 주도하던 거장들의 뮤즈로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보유한 그녀다. 칸, 베를린, 베니스 등 3대 국제영화제에서 모두 여우주연상을 석권한 최초의 수상자라는 타이틀도 그녀의 것이다.
올해로 데뷔 35년 차를 맞은 그녀의 행보는 갈수록 도전적이다. 곧 개봉할 클레어 드니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렛 더 선샤인 인>에서 비노쉬는 사랑에 진취적인 여성 ‘이자벨’로 돌아온다. 예고편에 담긴 비노쉬의 현실 연기와 “로맨스 없는 로맨틱 코미디(<씨네21> 김혜리)”라는 한 마디 코멘트에 <렛 더 선샤인 인>을 얼른 확인하고 싶어진다. 아래는 줄리엣 비노쉬가 빛낸 많은 영화 가운데 필견을 요하는 네 편의 영화에 대한 소개다. (연도순)
<퐁네프의 연인들> 레오 까락스 / 1991
사랑하던 사람을 잃고 방황하며 그림을 그리는 여자 미셸(줄리엣 비노쉬), 거처 없이 떠도는 홈리스 곡예사 알렉스(드니 라방). 두 사람은 파리 센 강의 아홉 번째 다리 퐁네프 위에서 만나 사랑을 쌓아간다. 내일이 없이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은 3년 뒤 크리스마스에 퐁네프 다리에서 재회를 약속한다.
많은 영화 팬들에게 최고의 사랑영화로 기억될 하나의 이야기, 레오 까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이다. 미셸과 알렉스 사이에는 한 가닥 사랑이라는 관념 이외에 어떤 현실적인 것들도 끼어들지 않는다. 시력을 잃어가는 여자 미셸을 연기한 줄리엣 비노쉬. 대사나 스토리로 설명되기보다는 영상언어를 통해 형언할 수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가던 레오 까락스의 영화에서 그녀는 감정의 진폭을 온몸으로 앓는 미셸이 된다. 레오 까락스만이 꿈꿀 수 있는 독자적 세계관에 그녀가 내뿜는 대범하고도 투명한 이미지는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한 편의 영상 시와 같던 영화 <나쁜 피>(1986) 이후, 까락스 감독과는 두 번째 이자 마지막으로 함께한 영화가 됐다.
<세 가지 색: 블루>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 1993
유명 작곡가 파트리스의 부인 줄리(줄리엣 비노쉬)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떠나보낸다. 거대한 상실에 직면한 그녀는 좀처럼 슬픔을 견디지 못한다. 줄리는 남편이 생전에 작업하던 작품을 처분하고, 남편의 동료 올리비에(베누아 레전트)를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 모두에게 잊히고 조용히 살기 바랐지만 주변 곳곳에 도사린 남편과 딸의 흔적이 그녀를 자꾸 붙잡는다. 남편의 유작을 완성하려 하는 올리비에를 줄리는 필사적으로 막으려는데, 어느 날 남편에게 숨겨둔 연인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세 가지 색: 블루>는 동구권의 작가주의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3연작 가운데 하나다. 프랑스 국기에 새겨진 이념의 색, ‘파랑(자유)’, ‘하양(평등)’, ‘빨강(박애)’에서 착안한 프로젝트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사회적 자유가 아닌 개인적인 자유를 뜻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줄리가 상실의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그렸기 때문이다. 줄리엣 비노쉬는 <세 가지 색: 블루>에서 사랑과 상실에 빠진 여성을 연기했다. 비노쉬는 이 영화의 돌벽에 손을 긁어 상처를 내는 장면에서 실제로 자신의 맨손을 긁으며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면 상에 나타난 피는 실제였다. 그녀의 열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일화다.
<사랑을 카피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2010
<기막힌 복제품>이란 책을 출간한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는 강연차 이탈리아 투스카니를 방문한다. 그의 책을 흥미롭게 읽은 골동품 가게의 주인 엘르(줄리엣 비노쉬)는 하루 동안 투스카니를 소개해 주겠다고 자청해 그와 시간을 보낸다. 끊임없는 대화로 서로를 알아간 두 사람은 진짜 부부인 척하는 장난스러운 역할극을 시작한다. 그 역할극은 점차 진지해지고, 진실과 거짓이 모호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남긴 영화에서도 줄리엣 비노쉬를 만날 수 있다. 단순함과 실험적인 영화를 넘나들던 키아로스타미의 작품 세계에서, <사랑을 카피하다>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비노쉬가 연기한 ‘줄리’는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경외를 가진 골동품 상인이다. 그녀가 가진 가치관은 복제(copy) 된 가짜의 속성을 긍정하는 작가 제임스와 연거푸 충돌한다. 지적인 토론과 농담이 오가는 영화에서 비노쉬의 연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사랑을 카피하다>로 줄리엣 비노쉬는 제63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된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올리비에 아사야스 / 2014
20년 차 배우 마리아 엔더스(줄리엣 비노쉬). 그녀는 20년 전 출연했던 연극의 리메이크에서 어린 주인공 ‘시그리드’가 아닌 나이 든 상사 ‘헬레나’ 역을 제안받는다. 고민 끝에 수락하지만 시그리드의 젊음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게다가 시그리드 역에 할리우드 스캔들 메이커 조앤(클로이 모레츠)이 캐스팅되자 경멸과 질투는 커져간다. 마리아는 잔인하고 이기적인 시그리드보다 솔직하고 인간적인 헬레나가 더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매니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 끊임없이 충돌한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마리아는 복잡한 심리상태에 놓인 인물이다. 배우가 배우를 연기하는 아이러니. 게다가 실제로 비노쉬는 오랜 경력만큼 나이를 먹은 대배우이기 때문에 마리아 역에 줄리엣 비노쉬의 캐스팅은 절묘하다. 찬란하게 젊었던 과거를 쉽게 놓지 못하는 마리아, 줄리엣 비노쉬와 그녀의 심리를 옆에서 지켜보는 매니저를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호연이 훌륭한 아사야스의 수작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과 줄리엣 비노쉬의 인연은 오래됐다. 아사야스는 줄리엣 비노쉬의 데뷔작 앙드레 테시네의 <랑데부>(1985)에서 각본을 썼다. 이후 <사랑해, 파리>(2006), <여름의 조각들>(2008)을 연출하며 비노쉬를 주인공으로 기용했고,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협업을 거쳐, 올해 신작 <이-북>으로 또 한번 뭉칠 예정이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의 신뢰가 얼마나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