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윈터보텀의 여행영화를 만끽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2010년 방영된 TV시리즈 <더 트립>을 영화화한 <트립 투 잉글랜드>(2010)에서 출발한 나들이는 <트립 투 이탈리아>(2014)를 거쳐 어느덧 스페인까지 와버렸다. 2018년에 당도한 세 번째 시리즈를 보고 있자니, 새삼 한국 방송가의 트렌드인 다큐멘터리형 예능, 미식 예능의 원조 격을 마주한 듯한 감흥이 든다. 웬만한 사람들에게 이미 친숙하고, 웬만하면 사랑하지 않기가 힘든 구성이다. 그럼에도 <트립 투 스페인>(2017)은 여전히 의외의 생경함을 던진다. 그사이 배우들이 50대에 진입했고, 여행지의 풍경 너머로 세상은 더 엄혹해진 것이다. 코미디 듀오의 걸출한 입담과 재간 외에도 들여다볼 것이 많은, 믿고 보는 프랜차이즈 여행영화 <트립 투 스페인>의 매력을 소개한다.
‘트립 투 시리즈’ 세편의 영화는 모두 전화기를 든 채 발코니에 서 있는 스티브 쿠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여행의 출발은 아주 간단하다. “<옵서버>에서 의뢰가 왔는데… 갈래?”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 모두 가족이나 연인이 있는 중년 남성이지만, 어쩐 일인지 코앞에 도착한 여행 비즈니스에서 매번 도움을 요청할 만만한 상대는 둘뿐이다. 영국 북부로 떠날 땐 쿠건이 제안했고, 이탈리아로 떠날 땐 방향이 바뀌었다가 이번 스페인 편에선 다시 쿠건이 전화기를 든다. 유력 신문에 들어갈 탐방 특집 기사를 위해 영국 최고의 코미디 배우들이 6일간 여행을 떠나 미식과 문화, 풍경을 즐기는 컨셉이다. <트립 투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 여행을 떠났던 두 사람이 속편 징크스를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번 편에선 <뉴욕타임스>까지 합세해 둘의 여행을 돕는다. 아마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시피 두 남자는 곧바로 스페인 북부 지방으로 이동해 하루에 하나씩 지역과 레스토랑을 옮겨다니며 수다 삼매경에 빠져든다. 전작에서 4년이 흐른 이번 편에선 롭 브라이든의 딸 클로이가 훌쩍 자란 것과 더불어 그에게 갓난 아들이 하나 더 생겼다. 육아에 지친 브라이든이 소파에 몸을 구겨넣은 채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를 받는 동안, 쿠건은 한결 신수가 훤한 모습으로 짧은 머리칼을 경쾌하게 쓸어넘긴다. 뉴욕 스케줄이 어쩌고, 마틴 스코시즈와의 만남이 어쩌고, 내 매니저가 어쩌고 한참을 깐죽대던 스티브 쿠건의 마지막 말이 익숙한 동시에 얄밉다. “아 맞다. 근데 넌 매니저 없지?”
영국 코미디 배우들의 노련한 콤비 플레이
1965년생 동갑내기인 두 배우는 각자의 포지션을 겨루느라 괜한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는다. 듀오의 숙명을 받아들인 노련한 배우의 콤비 플레이가 편안하고 즐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덕분이다. <트립 투 스페인>에서 여행과 관계의 주도권은 언제나 스티브 쿠건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다. 숙소 선정에 민감하고(당연한 듯 언제나 좋은 방을 선점하고), 커리어에 대한 야망과 불안이 극심한 쿠건은 브라이든 앞에서 민망할 정도의 자기애를 애써 감추지 않는다. 쿠건에 비해 수용적인 브라이든은 그런 쿠건의 모습도 농담을 곁들여 ‘살려’준다. 그는 신랄한 비평과 조롱을 일삼다가도 적절한 타이밍에 한 걸음 물러서 기꺼이 쿠건의 동반자 역할을 자처한다. 스페인에 간 두 사람이 ‘돈키호테와 산초’ 분장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했을 때, 시리즈를 지켜봐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브라이든이 당나귀를 탄 산초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호화로운 풍경과 수다의 충돌
모든 걸 차치하고서, <트립 투 스페인>은 잘 만든 여행영화다. 유쾌함을 잃지 않는 두명의 깨끗한 남성이 탁 트인 도로를 타고 스페인을 순례하는 여정에 아쉬움을 찾기란 힘든 일이다. 마드리드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산탄데르에서 몸을 푼 여행객은 어느새 쿠엥카, 그라나다를 거쳐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말라가에 당도한다. 영국 북부에서 시작한 이들의 여행이 8년 사이 유럽 대륙의 남쪽 끝자락까지 이른 것이다. 북에서 남으로 엿새만에 빠르게 이동하는 일정 덕분에 쿠건과 브라이든의 대화 소재는 음식에서 문화로, 예술에서 역사로 빠르게 널뛴다.
<트립 투 스페인>에선 스페인의 이국적이고 다채로운 역사, 문화가 다양하게 언급된다.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은 사전답사를 통해 유적지와 레스토랑에 관한 정보를 모았고, 스페인의 역사를 정리해 배우들에게 파일을 건넸다. 배우들은 “즉흥 대화가 풍성해질 수 있게 감독이 건넨 ‘숙제’를 충실히 해냈다”.(영국 일간지 <가디언>) 스페인 종교재판을 주도한 중세의 왕 페르난도 2세가 태어난 소스 델 레이 카톨리코 지역에선 엉뚱할 정도로 신랄하게 재판을 재연하는가 하면, 안달루시아 지방의 쿠엥카 성곽 등을 누비며 무어인들의 흔적을 느끼다 말고 갑자기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충만하되 정답이나 본질을 향한 대화는 아니다. 매번 올바르고 정확하며 세심하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 불균질함과 대중없음으로 인해 여행지의 대화는 비로소 편하고 즐거워진다.
미식을 가장한 예술 애호가들의 여행
최초의 컨셉이 미식 여행이었던 만큼 이들에게 매일의 점심 식사는 아주 중요한 일과다. 훌륭한 버터는 “인생을 다시 살게” 해주고, 잘 익은 초리소(스페인식 소시지)에 소비뇽 블랑을 곁들이는 순간은 더없이 행복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트립 투 이탈리아>에서 “사실 우린 음식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잖아”라고 자조한 바 있다. 그들은 게걸스럽게 접시를 해치우고 경탄을 내뱉을 뿐 미식의 세계에 그리 몰두하지 않는다. <옵서버>와 <뉴욕타임스> 입장에선 꽤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꼼꼼한 탐방보다는 마음가는 대로 눈에 담고 입으로 곱씹은 뒤, 미련 없이 다음 목적지로 떠나는 말 많은 나그네의 여행에 가깝다. 대신 두 사람의 집요한 관심은 영국의 뛰어난 문학가들을 향한다. <트립 투 잉글랜드>에서 워즈워스와 콜리지, <트립 투 이탈리아>에서 바이런과 셸리의 자취를 좇은 쿠건과 브라이든은 이번 영화에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산초를 자처하며 조지 오웰과 로리 리를 예찬한다. 쿠건은 스페인 여행기로 책을 내고 말겠다는 꽤 부담스러운 포부를 갖고 있는데, 그가 부적처럼 한 손에 끼고 다니는 책이 바로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로 활동한 로리 리의 기행문 <한여름 아침의 보행>이다. 스페인 내전을 언급할 땐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 녹여낸 엄격한 기록 문학의 정수를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끝없는 모사와 만담의 향연
스페인의 모든 것들이 쿠건과 브라이든에겐 상황극의 소재가 된다. 입만 열면 성대모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국 배우들과 뮤지션에 대해선 엄청난 모사율을 자랑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이클 케인이다. 1편 <트립 투 잉글랜드>에서 시작해 2편에서도 재활용하더니 3편까지 끝내 슬쩍 등장시킨다. 이쯤 되면 마이클 케인의 입장문이 필요한 수준 아닌가 싶다. 양심에 찔린 듯 스페인 편의 주력 대상은 앤서니 홉킨스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로 삼았다. 물론 전작부터 등장한 알 파치노, 말론 브랜도 우려먹기도 열심이다. 페르난도 2세가 지냈던 건축물에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992)에서 잔혹한 종교재판장을 연기한 말론 브랜도가 튀어나오고, 피카소가 태어난 말라가 지방에선 <피카소>(1996)의 주연이었던 앤서니 홉킨스가 부활한다. 이번 편의 상황극은 꽤 수위가 높은 편이다. 식사 도중 나치를 풍자하고,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이비드 보위를 따라해 기어이 웃음을 터뜨린다. 역시 막역한 동료와의 수다 속에선 어떤 농담도 심판대 위에 오르지 않는다.
어디까지 진짜일까?
‘트립 투 시리즈’는 인디영화계와 할리우드, 장르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데 거침이 없는 영국의 거장 마이클 윈터보텀의 노하우가 집약된 작품이다. 윈터보텀 감독이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을 처음 만난 건, 펑크 정신에 충실한 80년대 영국 뮤지션들의 혼돈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24시간 파티피플>(2002)을 통해서 였다. 맨체스터의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교묘히 오갔던 그 작품처럼, ‘트립 투 시리즈’ 역시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혼동될 만큼 다큐멘터리적 연출에 능한 윈터보텀의 장기가 빛을 발한다. <트립 투 스페인>엔 대본이 없다. 대략적인 주제의 사전 논의를 거친 뒤 두 배우의 즉흥적인 대화를 방대하게 촬영하고, 편집을 거쳐 이를 다듬어낸다. 멀티카메라가 다각도에서 받아낸 코미디 배우들의 얼굴엔 활기가 가득하다. 유독 분주하고 생생한 기운이 도드라지는 <트립 투 스페인>의 식사 장면에선 얼마만큼 실제 ‘현장’을 담았는지가 궁금해진다. 윈터보텀 감독은 레스토랑이 자연스럽게 운영 중인 상태에서 들어가 “주방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동안 촬영을 준비하고,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이 이를 인지하도록 내버려두기”(미국 격주간지 <스트레인저>)를 즐겼다. 손님으로 꽉 찬 식당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세 번째 속편이 만들어지는 동안 이전부터 쿠건과 브라이든 곁에 함께해온 주요 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하기 때문에 허구의 세계는 더욱 공고한 핍진성을 갖춰나간다. 무엇보다 훈훈한 건, 전에 비해 한층 더 끈끈해진 두 사람의 관계다. 3편의 여유 혹은 50대의 변화라 해도 좋다. 각자의 톡 쏘는 유머에 참지 않고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터뜨려주는, 전에 없던 다정함이 생겨버렸다.
여행의 우울까지 껴안다
쿠건은 여행 출발부터 뱃멀미로 토악질을 하고, 브라이든은 계속되는 보행에 무릎이 아프다. 페르난도 2세가 죽음을 맞이한 알함브라 궁전의 영적인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은 문득 서로의 노쇠한 육체를 상기한다. 청승맞게 추억이 불쑥 찾아오는 건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가족과 연인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도 않다. 그런 와중에 <트립 투 스페인>은 중년의 위기에 관해 보다 건강한 방식의 고민을 다짐한다. 중년 남성의 고충과 약점을 다루면서 피할 수 없었던 나르시시즘적 면모를 더욱 덜어낸 것이 이번 스페인 편이다. 쿠건과 브라이든은 난데없이 젊은 여성과 바람을 피우는 방황 대신 한 풍경이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한참 경박한 수다를 떨고 자리에서 일어나 스페인의 대성당으로 들어가면, 이내 서늘하고 경건한 침묵이 찾아온다. 조금 더 귀띔하자면 <트립 투 스페인>은 전작들에 비해 6일간의 여정 끝에 이어지는 새로운 시간의 첫머리도 조금 더 길게 보여준다. 그 결말은 꽤 혼란스럽고 논쟁적이기까지 하다. 어쩌면 3편을 완결이라 단정 짓는 관객을 향한 4편의 선전포고일 수도 있겠다.
영국의 코미디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
스티브 쿠건은 영국 코미디 쇼 <앨런 파트리지>의 푼수 진행자로 출연한 뒤 유명 인사의 반열에 올랐다. 90년대 후반을 시작으로 영국 아카데미 어워드(BAFTA) 코미디 부문 최우수 남자연기상을 두번 수상하며 할리우드까지 속전속결로 진출한 그다. 영국 코미디언 특유의 기품과 익살을 무기로 <박물관이 살아있다!>(2006), <트로픽 썬더>(2008) 등에서 안정적인 할리우드 입성을 과시했지만 쿠건의 관심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작과 각본까지 이어졌다.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등에 각색상 후보로 이름을 올린 <필로미나의 기적>(2013)의 이력은 <트립 투 스페인>에서 작가적 자의식과 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촉매제가 됐다.
롭 브라이든의 이름은 ‘트립 투 시리즈’가 아니라면 한국 관객에게 약간은 생소할 법하다. <BBC> 라디오 DJ로 업계에 발을 들인 브라이든은 TV쇼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성우로 활동하며 안방극장에 친숙한 코미디 배우의 커리어를 쌓았다. 2013년 대영제국훈장을 받기도 한 그의 이미지는 스티브 쿠건에 비하면 좀더 정감 가고 친근한 코미디언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