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감독이 서울환경영화제(5월 17~23일)의 새로운 집행위원장이 됐다.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영화제를 찾은 적은 많지만 특정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15회를 맞은 서울환경영화제는 영화제 영문명을 GFFIS(Green Film Festival in Seoul)에서 SEFF (Seoul Eco Film Festival)로 바꾸었고,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이 맡았던 집행위원장 자리를 이명세 감독에게 넘겨주는 ‘변화’를 시도했다. 이명세 신임 집행위원장은 ‘환경의 외연은 넓히고 영화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제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누가 서울환경영화제의 신임 집행위원장 아니랄까봐, 인터뷰가 진행된 촬영 스튜디오에도 그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아닌 개인 텀블러를 들고 왔다. 환경에 대한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한명의 시민으로서, 올해 서울환경영화제를 이끌어갈 집행위원장으로서, 그리고 <M>(2007) 이후 10년 만에 JTBC 예능 프로그램 <전체관람가>에 출연해 단편 <그대 없이는 못 살아>를 선보인 영화감독으로서, 이명세 감독은 그간 묵혀둔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서울환경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신분으로 홍보 일선에 나서고 있다.
=서울환경영화제가 의미 있는 영화제고 좋은 영화제라고 해도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오진 않는다. 영화도 마찬가지고 결국엔 홍보를 잘하는 게 중요하다. 이번에 영화제 맡으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홍보였다.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떻게 서울환경영화제 집행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나.
=전부터 이곳저곳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청은 있었다. 그런데 현업에서 일도 해야 하고, 성격상 이름만 걸어두는 건 못해서 사양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있지 않나. 살면서 좋은 일을 하고 살아야겠다는 마음. 1년에 한두번씩 재능기부 형식으로 강의를 한다거나 그런 건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환경도 우리가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 문제고, 환경에 대한 마음의 빚 같은 게 있었다. 서울환경영화제처럼 좋은 취지의 영화제를 알리는 게 좋지 않은가, 그 마음의 빚으로 참여하게 됐다.
-서울환경영화제와의 직접적 인연은 없었던 건가.
=전혀. 직접적으로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샴푸를 쓰지 않는다거나 텀블러를 쓰려고 노력은 해왔다. 영화 현장에서도 그랬다. 컵에 이름을 써서 재사용한다거나 장갑을 빨아 쓴다거나. 근데 스탭들에게 ‘장갑 빨아 쓰라’고 하면 괜히 잔소리가 되더라. (웃음) 영화 현장에 가보면 알지만 한번 쓰고 버리는 게 정말 많다. 예전엔 특히나 영화팀이 촬영하고 지나가면 엉망이 돼버릴 때도 많았고.
-일찍부터 ‘에코 현장’을 주도한 셈이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몸에 밴 습관 같은 거다. 어려운 시절을 겪은 우리 부모님 세대도 그렇고, 아껴 쓰고 나눠 쓰는 게 몸에 뱄다. 나 역시 그렇고.
-서울환경영화제를 어떻게 만들어가고 싶다는 청사진도 그렸을 것 같다.
=영화제는 기본적으로 축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축제로서의 영화제를 강조하려 한다. 영화가 이야기되지 않는 시대인 것 같다. 앞서 홍보가 중요하다고 얘기했지만 그게 본질은 아니다. 영화를 위해 홍보를 하는 건데 언젠가부터 영화는 사라져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해 <전체관람가>에 출연하면서 만난 후배 감독들과도 비슷한 얘기를 나눴다. 영화에 대해 너무 이야기가 안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부터 영화는 산업논리의 대상으로만 얘기되고 있다. 영화제 역시 외형만 커져가는 느낌이다. 어떤 배우들이 왔다더라, 누가 왔다더라 하는 얘기는 있는데 정작 영화 얘기는 없다. 시사회 뒤풀이 자리에서도 흥행 얘기만 주로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이 좋았다 나빴다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흥행 얘기, 배우의 출연료 얘기나 한다. 이제는 영화잡지도 <씨네21> 하나만 남지 않았나. 그런데 20자평만으로 어떻게 영화를 이야기하겠나. (웃음) 아무튼 올해 서울환경영화제가 감독들에게도 관객에게도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로 <전체관람가>에 참여한 감독들의 단편도 <전체관람가>라는 이름으로 상영한다.
-영화제 공식 트레일러 <오감도>를 직접 연출했다.
=머릿속 아이디어는 거창했는데 생각만큼 결과가 잘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오늘날의 환경 문제를 생각했을 때 상징적으로 떠오른 게 이상의 <오감도>와 히치콕의 <새>(1963)였다. <오감도>의 시선이 새의 시점이라는 해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새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트레일러에 담았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2017) 등에 출연한 일본 배우 가도와키 무기가 트레일러에 출연하는데, 이 배우의 눈빛을 한 장면으로 쓰면 좋겠다 싶어서 출연 제의를 했다. 그런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배우들에게 한 장면만 출연해달라고 부탁을 못하겠더라. 나이가 드니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다. 예전엔 강동원이 됐든 어떤 배우가 됐든 앞모습 말고 뒷모습만 찍자, 이런 패기가 있었는데. (웃음)
-매회 서울환경영화제 트레일러를 시리즈처럼 감독님이 연출해도 좋을 것 같다.
=전략적으로 이번에 만든 트레일러를 3년은 써먹자고 말했다. 내년에 새로 편집해서 또 쓰자고. 명색이 환경영화제인데 트레일러를 한번 만들고 버리면 곤란하지 않냐, 리사이클링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웃음) 매번 새로운 걸 만드는 것도 재밌겠지만 영화제 트레일러가 하나의 브랜드처럼 인식돼도 좋을 것 같다. 단일 이미지, 단일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고.
-영화제 추천작을 몇편 꼽아준다면.
=추천작이라기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들을 소개하면 어떻겠나. 개인적으로 ‘에코 푸드’와 ‘에코 패밀리’ 섹션의 영화들을 보고 싶다. 음식과 가족, 장인에 대한 이야기는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들이다. 음식영화를 찍고 싶은 욕심도 있다. 빔 벤더스 감독이 만든 사진가 세바스치앙 살가두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도 추천하고 싶고. <엄마의 공책> <플라스틱 차이나> <소녀 독수리 사냥꾼> <마운틴> <전체관람가>도 추천한다. 올해 상영작이 56편인데, 물론 많은 영화를 상영하는 것 또한 영화제의 능력이겠지만, 좋은 영화를 집중적으로 더 많이 보여주는 것도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영작 편수를 늘리는 것에 집착하지 말자고 했다.
-지난해 JTBC에서 방송된 <전체관람가> 얘기를 해보자. 방송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단편영화 연출 제의를 받았을 때 어떤 고민들을 했나.
=고민 안 했다. 너무 오래 쉬었잖아. (웃음) 언제든지 막다른 상황, 막바지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 한국에서 영화를 찍을 수 없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영화 제안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생각들. 영화를 찍을 수 있으면 무조건 갈 마음이 있다. <전체관람가>도 마찬가지였다. 제작진에서 제안한 건 20분짜리 단편을 만들면 되고, 주어진 조건하에서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면 된다는 것. 그런데 와이 낫? 그런 조건인데 왜 출연을 안 하겠나. 물론 방송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쑥스러운 일이지만 그것도 해보자, 싶더라. 스탠리 큐브릭이 얘기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그런 거다. 내가 싫은 게 뭔지만 잘 알고 있으면 된다. 무얼 끝까지 양보할 수 없는지. 후배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어쨌든 <전체관람가>는 감독의 연출권을 100%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재밌는 기회였다.
-<전체관람가>를 통해 만든 단편 <그대 없이는 못 살아>는 <M> 이후 10년 만에 공식적으로 선보이는 작품이었고, 40년 만에 만든 단편이었다. ‘오랜만에 찍으니까 신인감독이 된 기분’이라고도 말했다.
=그저 ‘찍는다’는 것에만 집중했다. 요즘 현장은 시간에 대해서도 철저하다고 하니까 시간을 잘 활용해서 쓰는 훈련도 하고. (웃음) 배우들이나 스탭들이 너무 즐겁게 참여해줘서 초창기에 영화하던 느낌도 들었고. 힘들어도 웃고 같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던 시간들이 참 좋았다. 요즘 현장은 예전 현장 같지 않아서 영화 찍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영화가 산업이지만 또한 예술인데, 너무 획일화된 잣대로만 영화를 대하는 건 곤란하지 않은가 싶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백일장에서 글 써내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품을 만든다는 건 백일장에서 한 시간 안에 무조건 써내야 하는 글짓기 같은 게 아닌데. 연기라는 것도 ‘울어’ 하면 기계적으로 울어야 하는 게 아닌데. 진짜 영화를 잘 만들려는 창작자들은 세상의 혜택을 못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
-현장에서 시간에 쫓겨 감독들이 미장센에 공을 들일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요즘 한국영화들이 다 똑같지 않나. 여러 대의 카메라로 여러 사이즈의 숏을 찍어 편집 과정에서 조립하는 것 같은 영화들이 많다. 유명 프로듀서 데이비드 O. 셀즈닉과 히치콕이 영화적으로 치열하게 싸울 때, 히치콕은 누구도 편집하거나 자를 수 없게끔 창의적 숏들을 찍었다. 프로듀서가 마음대로 자를 수 없게 원신 원컷을 찍는다든지, 절대 손댈 수 없는 아름다운 미장센을 만들어낸다든지. 그렇게 선배 감독들은 영화라는 예술을 자본 속에서 지켜냈다. 감독들도 더 빛나야 한다. 제작자든, 평론가든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숏을 만들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영화를 만들고, 그게 영화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단편으로 10년 만에 귀환했다는 말은 한편으로 10년 동안 영화를 찍지 못한 사정이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스파이>(2013) 촬영 중 감독이 교체되며 하차하는 극단의 사태도 경험했는데, 일련의 일들을 겪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얘기해줄 수 있나.
=혼돈, 카오스의 상태가 뒤죽박죽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일순간 사라져 거대한 구멍이 생긴 것 같은 상태라는 글을 봤다. 뻥 하고 생긴 구멍. 그랬다. 여기가 내 놀이터였고 여기 내 친구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확 등을 돌린 상황. 30년 이상 내가 믿었던 것들, 30년 이상 발판 삼아 서 있었던 것들, 그것이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다. 그 일을 함께 겪은 사람들 역시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 했다.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창작자로서의 고집을 지켜가며 준비 중인 다음 작품이 있나.
=예전에 써둔 시나리오인데 작품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영화화) 희망이 좀 보이고 있어서 잘되지 않을까 싶다. 따뜻한 영화다. 추운 영화, 잔인한 영화는 하지 말아야겠다. 이제 따뜻한 영화해야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