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쓰는 대로 현실이 되는 작가의 연애담, <루비 스팍스>로 떠올린 판타지 로맨스 영화 5편
2018-05-23
글 : 심미성 (온라인뉴스2팀 기자)

<루비 스팍스>

실제 연인인 배우 폴 다노, 조 카잔 두 사람이 보여준 사랑스러운 판타지 로맨스 <루비 스팍스>가 6년 만에 국내 개봉했다. 슬럼프에 빠진 천재 작가 캘빈(폴 다노), 어느 날 그가 소설 속에서 창조한 완벽한 이상형 ‘루비’가 실제로 나타난다. 상상하고 쓰는 대로 변신하는 여자친구 루비(조 카잔), 그러나 루비는 점차 정체성과 주체성을 잃어가고 그녀를 위해 캘빈은 그녀를 마음껏 조종할 수는 없게 된다.

<루비 스팍스>

<루비 스팍스>는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이상형과의 연애라는 꿈같은 설정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에서 판타지의 힘이란 바로 이런 구석에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비현실적인 전개로 현실의 맥을 짚어내는 것. <루비 스팍스>처럼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현실을 노래하는 로맨스 영화 5편을 떠올려 봤다.

<이터널 선샤인> (2004)

기발한 상상력을 겸비한 로맨스 무비들을 언급하면서 <이터널 선샤인>을 빼놓고 말하기는 힘들다. 조엘(짐 캐리)은 어느 날 출근길에 갑자기 몬탁(Montauk)으로 가는 기차에 즉흥적으로 탑승한다. 그렇게 도착한 몬탁 해변에서 파란 머리의 여자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를 만나고 둘은 자연스레 이끌린다. 뻔한 어구로 소개한 이 영화의 도입부가 평범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한 사람의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 에피소드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회사를 땡땡이 칠만큼 대범하지도, 즉흥적이지도 못한 성격의 조엘이 불현듯 몬탁행 기차를 타버린 이유. 클레멘타인을 만나 통성명을 하고도 클레멘타인 노래를 떠올리지조차 못하는 이유. 이 모든 의뭉스러운 점엔 까닭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터널 선샤인>에는 여러 번 볼수록 더 많이 보이는 영화라는 찬사가 따라붙는다. 달콤한 연애의 시작에서 권태로 향하는 이야기가 아닌, 권태로 시작해 다시 출발점에서 끝나는 영화의 구조. 기억을 지운다는 상상을 SF적인 연출로 풀어가는 아름다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미셸 공드리 특유의 환상적 세계에 정점을 찍는 영화다.

<미드나잇 인 파리> (2011)

아마도 우디 앨런의 수많은 영화들 가운데 동시대 관객들에게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소설가 데뷔를 꿈꾸는 시나리오 작가 길(오언 윌슨)은 약혼녀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와 예비 장인 부부가 동반한 파리 여행을 떠난다. 파리의 예술적 흥취에 빠진 길과 현실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약혼녀 이네즈는 우연히 만난 폴 부부와 함께 파리를 둘러보게 되는데, 이 틈에 잘 섞이지 못하는 길은 홀로 밤 산책을 한다. 자정이 되자 길 앞에 도착한 구형 푸조 자동차는 길이 아름다운 황금기라고 믿는 1920년대에 그를 데려다 놓는다.

우디 앨런의 발칙한 상상은 급기야 시대를 뛰어넘는 현대판 요술 마차를 만드는 데 이르렀다. 문학과 예술이 부흥하던 1920년대는 헤밍웨이,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루이스 부뉴엘 등, 소설을 쓰던 길의 눈과 귀를 뺏기에 충분한 예술가들의 향연이 매일 열린다. 예술을 동경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역사 속에서만 접하던 그 시대를 갈망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디 앨런은 <미드나잇 인 파리>를 통해 과거의 향수에 젖은 인간은 늘 있어왔고 때론 그것이 덧없기도 하다는 걸 보여준다. 한 감상주의자의 과거 여행을 환상적이고도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관통하며, 훗날 귀중한 과거가 될 자산이기도 한 현재의 것들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뼈 있는 농담을 던진다.

<어바웃 타임> (2013)

<미드나잇 인 파리>의 사랑스러운 이네즈, 레이첼 맥아담스를 <어바웃 타임>에서도 볼 수 있다. <노팅 힐>(1999)의 각본, <러브 액츄얼리>(2003)의 연출을 맡았던 로맨틱 코미디의 장인 리차드 커티스는 2013년 작 <어바웃 타임>으로 타임 리프와 로맨스를 결합했다. 모태솔로인 팀(돔놀 글리슨)은 성인이 되자 아버지로부터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가문 대대로 이어져 왔다는 충격적인 비밀을 듣는다. 마음대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됐지만 팀의 소원은 소박하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매 순간의 선택에 따라 개인의 운명이 결정된다면, 선택을 번복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원하는 대로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행운인 셈이다. 그러나 <어바웃 타임>의 팀이 메리(레이첼 맥아담스)와 결실을 맺기까지의 여정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시간을 몇 번이고 돌려봐도 어쩔 수 없는 야속한 변수들.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 운명 바꾸기의 엇박은 다시금 ‘지금’, ‘현재’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다만 영화는 실수투성이의 팀에게도 기록할만한 명장면을 남겨준다. <어바웃 타임>이 남긴 프러포즈 신과 결혼식 신은 아직까지도 여성들의 대표적인 판타지로 회자되고 있으니 말이다.

<더 랍스터> (2015)

지금부터는 조금 색다른 판타지 로맨스에 대한 소개다. 첫 타자는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 그의 작품에 세워진 세계관에는 평범함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감독의 성향이 보인다. 가까운 미래, 커플이 되지 못한 자는 동물로 변하게 된다. 아내에게 이혼당한 데이비드(콜린 파렐)의 손에는 개의 목줄이 들려있다. 데이비드는 짝을 찾지 못해 개가 된 형을 데리고 커플 메이킹 호텔에 입성한다. 유예기간은 45일, 그는 이곳에서 짝을 찾지 못하면 그가 선택한 동물, 랍스터가 되고 만다. 하지만 시간의 압박 속에 노력해봐도 쉽지 않고 데이비드는 숲으로 도망쳐 외톨이 부대에 합류한다.

란티모스의 영화에는 현실의 반대편에 지어진 새로운 세계가 있다. 새로운 규칙, 새로운 이름, 새로운 언어. 그러나 이 세계는 다시 현실 세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익숙한 상식과 사회의 질서를 뒤엎는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거의 무표정이며 딱딱한 어조로 대사를 전한다. <더 랍스터>는 의도적으로 낯섦을 유발하는 방식을 택하며 관객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말하자면 남녀의 결합을 강요하는 체제와, 체제를 세뇌하는 사상 교육과, 억압으로부터 대항하는 외톨이 부대의 혁명과, 그리고 그 혁명 부대를 존속시키는 또 하나의 억압에 던져진 질문들이다. 은유와 상징으로 설계돼 있지만 단 하나의 질문이나 대답을 선언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 바로 영화 <더 랍스터>가 이룬 성과일 것이다.

<고스트 스토리> (2017)

제목만으로 호러 영화가 아닐까 싶은 착각을 안기는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사실상 영혼의 시공간을 따라가는 로드무비다. 작곡가인 C(케이시 애플렉)와 연인 M(루니 마라)은 단란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C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M은 무거운 슬픔에 잠긴다. 이후의 이야기는 M이 슬픔 속에 살아가는 내용과 유령이 돼 둘의 공간에 남은 C의 시선이 전부다. 시종 고요한 몰입감을 불러 일으키는 <고스트 스토리>는 남겨진 사람이 아닌 세상을 떠난 ‘고스트’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아이디어만으로도 흥미로운 영화다.

두 눈이 뚫린 하얀 천을 뒤집어쓴 ‘고스트’. <고스트 스토리>의 고스트는 실로 상투적인 유령의 형태 그대로 시각화됐지만, 말 그대로 너무 쉬운 발상이기에 오히려 영화에선 독특한 인상을 남긴다. <고스트 스토리>가 뮤직비디오 한 편 예산에 버금가는 단돈 1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일 수 있었던 가장 큰 공은 CG를 최소화하고 흰 천을 두른 고스트의 이미지를 떠올린 점에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하얀 천은 영화의 말미에 큰 울림을 선사해 다시 한번 효력을 발휘한다. 지독한 외로움과 기다림의 끝에, 표정도 말도 없던 고스트는 단 하나의 시적인 자취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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