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이 칸의 밤을 환하게 불태웠다. 16일 저녁 6시30분(현지시간) 뤼미에르 극장에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의 첫 상영이 시작됐다. 2007년 <밀양>으로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2010년 <시>로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이창동 감독은 세 번째로 경쟁부문 레드카펫을 밟았다. 공개 전부터 영화 외적인 요소로 크고 작은 구설에 올랐던 만큼 이창동 감독과 유아인, 스티브 연, 전종서는 레드카펫에서 살짝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영이 끝난 뒤 분위기는 일변했다. 뤼미에르 대극장을 가득 메운 박수갈채는 오랫동안 이어지자 이창동 감독과 배우들도 벅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파인하우스필름의 이준동 대표는 프로듀서이자 칸 영화제 자문위원인 고 피에르 르시앙의 뱃지를 치켜들며 헌사를 보냈다. 고 피에르 르시앙은 “2018년은 반드시 그의 해가 될 것”이라며 장문의 글을 통해 이창동 감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내기도 했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 역시 “순수한 미장센으로서 영화의 역할을 다하며 관객의 지적능력을 기대하는 시적이고 미스터리한 영화”라며 찬사를 보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각색한 <버닝>은 두 남녀와 정체불명의 남자 사이의 비밀스런 관계를 그린 영화다.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는 우연히 어릴 적 동네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종수는 밝지만 공허한 분위기를 풍기는 해미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해미는 종수에게 고양이를 부탁한 채 돌연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얼마 뒤 해미는 젊고 부유하지만 뭘 하는지 의심스러운 남자 벤(스티븐 연)과 함께 귀국한다. 세 남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그린 이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보다는 차라리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나 루스 렌델의 소설에 가까운 미스터리 스릴러를 골격으로 하고 있다. <버닝>은 죄악감을 불태우는 이야기다. 인간의 죄의식에 대한 질문을 꾸준히 이어가던 이창동 감독이 이 원작에 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 있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윌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하늘까지 치솟는 불길의 장려한 배덕감을 그렸다. 영화의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는 좀 더 음산하고 축축한 정서에 휩싸여 있다. 이에 반해 이창동 감독의 비전은 뼛속으로부터 울리는 긴장감의 공기를 골자로 한다. 영화 전반에 깔린 낮은 고동을 축으로 밀도 있고 날카로운 드라마가 생성된다.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과 유사하게 죄의식의 형상을 더듬지만 윤리와 도덕을 소재로 한 직접적인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다. 죄의식 주체의 내면을 직접 파고드는 대신 죄의식을 둘러싼 상황과 풍경, 비유하자면 퍼져나가는 파장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쪽에 가깝다. 미니멀한 스토리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밀도의 장면들로 채워져 있으며 각 장면마다 상징적인 요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촘촘한 메타포의 그물을 형성한다. 특히 음악과 사운드의 조율이 실로 탁월하다.
시사 직후 반응은 폭발적이다. 아직 매체들의 리뷰가 나오지 않은 상태지만 트위터를 통해 쏟아지는 평은 대부분 찬사로 가득하다. 호평과 혹평이 동시에 지적하는 부분은 이 영화가 매우 클래식하다는 점이다. 한쪽에서는 이를 근거로 “영화적인 것 밖에 없는 영화”라며 환호하고, 다른 쪽에서는 “옛날영화처럼 길고 지루하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기자 시사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빠르게 나갔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으며 극장을 나오자마자 활발한 토론과 함께 SNS를 통해 감상을 전했다. <버닝>은 현지시간 17일 기자회견을 진행한다. 71회 칸 국제영화제는 오는 20일 폐막작 상영과 함께 경쟁 부문 수상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현지 반응
-한마디로 지금까지 칸 영화제 상영 중 최고. 미니멀리스적 서사지만 긴장은 최고. 훌륭한 촬영. 대단한 음악. 역할을 완전히 소화한 배우. 아마도 내 생각엔 황금종려상. _<가디언> 피터 브래드쇼.
-거인의 작품. 외형적으로 단순해보이지만 대단한 밀도. 아름답고, 영화적이고, 지적이다. 이런 영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아마도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_<르 필름> 루카스 누네스.
-이창동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시나리오 작법, 분위기, 연출, 연기의 모범이다. 이런 서사를 무리하게 늘어뜨리지 않으며너도 길게 이어가는 것은 놀랄만한 능숙함의 증거다. _<시네마티저> 오렐리앙 알랭.
-이창동의 <버닝>은 정말 대단하다. 어쩌면 한 15분 정도 길어보이고 몇몇 부분은 지나치게 작가적이지만 정말 아름답게 잘 구성된 작품이다. _<텔레라마> 다비드 오노라.
-좀 길다고 할 수 있지만 <버닝>은 아마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나의 황금종려상이다. 이 영화에는 진짜 영화적인 것 밖에 없다. _<프르미에> 줄리앙 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