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이광국의 <봄날은 간다>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2018-05-21
글 : 이광국 (영화감독)

감독 허진호 / 출연 이영애, 유지태 / 제작연도 2001년

2016년 어느 늦은 봄날. 스무살이나 먹은 나의 낡은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하며 무작정 묵호항으로 출발했다. 이미 해가 떨어진 후였다. 깜깜한 고속도로를 조심스럽게 달리며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를 떠올렸다. 상우가 은수에게 달려가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저녁에 나는 <봄날은 간다>의 상우와 은수를 간절히 다시 만나고 싶었다. 묵호항의 아파트 앞에 가면 창문에 몸을 걸치고 손을 흔들어주던 은수와, 택시에서 비틀거리며 내려 은수를 안던 상우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은수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무작정 출발을 했던 터라 혹시 낡은 아파트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 아파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위에 새로 생긴 아파트들이 은수의 낡은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렇게 세월을 견디며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했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유난히 인적이 없었다. 은수의 아파트 앞에 서자 마치 내가 스크린 안으로 걸어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상우처럼 달려오기는 했지만 막상 은수의 아파트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저 불 꺼진 창문 너머에 아직 은수가 살고 있을까. 한참을 서 있었지만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별의 순간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봄이 될 때마다 지나간 인연들이 떠오르는 것은 내가 겪었던 여러 이별들이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이 화창한 봄날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별을 경험할 때마다 왜 나의 마음이 혹은 상대의 마음이 변했는지 끊임없이 질문해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고, 결국은 서투르고 투박하게 끝을 내며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상처받은 쪽을 택했었다. 여러 번 반복이 되어도 이 이기적이고 비겁한 습관은 나아지지 않았다.

은수의 아파트를 무작정 찾아갔던 까닭은, 사과를 하기에는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지나간 인연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다는 너무나 흔한 이 표현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생기 있는 이미지로 바뀌어 다른 시공간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 진행 중일 것만 같은…. 만나는 것 못지않게 헤어지는 것도 근사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것은 허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비겁하지 않고, 솔직한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나간 인연들과 짝을 맞추어 떠오르는 그 봄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들에게 내 이기심과 비겁함을 사과하고 싶다.

다시 봄이 왔고, <봄날은 간다>가 재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우와 은수가 여전히 살아 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반갑다. 영화를 만들면서 흔히 말하는 인생영화 한편이 있는지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당황한다. 정말 나에게 그런 영화 한편이 있을까? 아니 그 한편을 정말 고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한편을 고를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좋은 영화들을 만날 때마다 한동안은 그 영화가 미치는 영향 아래서 나도 언젠가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온전히 살아 있는, 그리고 살아가는 누군가를 담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광국 영화감독.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2017), <꿈보다 해몽>(2014), <로맨스 조>(2011)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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