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음식이 키워드인 영화치곤 드물게 <케이크메이커>(2017)는 과자와 빵을 군침 도는 스펙터클로 쓰지 않는다. <케이크메이커>의 케이크와 쿠키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데에 익숙하고 사랑에 관해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인물의 성격을 설명한다. 베를린의 파티셰 토마스(팀 칼코프)는 차분하게 계량하고 우직하게 반죽을 치대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데에 익숙하다. 정기적으로 베를린에 출장 오는 이스라엘 비즈니스맨 오렌(로이 밀러)과 특별한 사이가 된 토마스는 어느 날 비보를 접하게 되고 무작정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 감독은 토마스 역에 팀 칼코프를 캐스팅하고 살을 찌워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의 몸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남성적이면서도 둥근 실루엣, 단것을 좋아하고 세상사에 미숙한 아기 같은 인상을 원해서였다.
04/30
마블의 10년, 18편의 히어로 영화를 종합하는 3차 올스타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 2018)는 더이상 영화라고 부르기에 어색하다. 일단 관객은 영화의 평판을 기다리지 않고 ‘최고의 가성비’를 보장하는 뷔페 식당에 줄을 서듯 표를 산다. 히어로 무비가 독립된 장르로 성립한다면 서사를 짓는 방식이 전통적인 시나리오 작법에서 이탈해버렸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한 지는 오래됐지만 <인피니티 워>는 직계 전편 <어벤져스>(2012)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4)과 비교해도 특이점에 다다른 인상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미 살육이 한바탕 지나간 다음이다. 처음 1분간은 “왜 쿠키 영상이 앞에 있지?”라고 당황하는 관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동요한 까닭은 순서가 아니었다. <토르: 라그나로크>(2017)를 “아스가르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각성으로 의미심장하게 마무리해놓고 바로 그 사람들의 대다수를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몰살시키는 각본의 냉혹함이었다. 보통의 속편이라면 이 전개가 과연 가능했을까? 곧이어 살아남은 토르(크리스 헴스워스)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팀에 의해 구조되는데, 방금 절친과 혈육을 포함해 동족의 절반 이상을 잃은 그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고의 장난꾸러기들과 한 프레임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농담에 농담으로 대응한다. <인피니티 워>는 이같은 전개가 흠으로 여겨지는 은하계 바깥으로 마블 영화가 발을 들였음을 입증한다. 지구는 물론 우주 인구의 절반이 절멸할지도 모르는 <인피니티 워>의 위기는 어느 때보다 심대하다. 더불어 위협의 주체 타노스(조시 브롤린)는 언급한 첫 장면부터, 어벤져스 가운데 최강인 헐크(마크 러팔로)나 토르보다 힘세고 로키(톰 히들스턴)의 책략에는 간지럼도 타지 않는 막강함을 전시한다. 그런데 나는 150분 동안 우주의 운명은 물론 개별 캐릭터의 안위에 대해 한톨도 염려하지 않았다. 그나마 걱정한 대상이 있다면 감독과 작가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러지? 네 번째 <어벤져스>에서는 더 거창한 위기를 어떻게 만들 참이지?” - 어떻게든 해결했으니 내가 영화를 지금 보고 있을 것 아닌가 싶어 그조차 곧 잊었다. 나의 불감증은 첫째 <프리 파이어>(2016)의 벤 휘틀리 감독이 지적한 이른바 ‘고통 공감 체감의 법칙’에서 연유한다. 스크린 속 재앙의 규모가 크고 허황될수록 관객이 겪는 상상의 통증과 위기감은 줄어든다는 공식이다. CG로 그린 학살보다 <프리 파이어>의 빗맞은 총상과 까진 무릎이 아프고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의 계단에 튀어나와 있는 못이 무섭다. 무감동의 다른 이유는 명백하다. <스파이더맨: 홈커밍>과 <블랙팬서>의 속편 제작 뉴스가 나온 지 오랜 상황에서 톰 홀랜드가 아무리 연기를 잘한들 피터 파커의 소멸에 눈물을 흘리긴 힘들고, 장려한 와칸다 문명이 이렇게 무너지는 것인가 통탄하기도 어렵다. 지금까지의 프랜차이즈 영화라면 기피할 선택이지만, 마블 스튜디오는 그들의 관객이 연연하는 바가 더이상 서사적 긴장도 심지어 캐릭터의 연속성도 아님을 확신하는 듯하다. 예의상이라도 서스펜스를 조성하기는커녕 루소 형제 감독은 아예 대놓고 솔로 무비 속편이 예고된 캐릭터를 소멸당하는 절반에 넣는다. 차라리 서스펜스는 스크린 밖에 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크리스 에반스는 몇편을 재계약할 것인가? <인피니티 워>는 마블의 근작 <토르: 라그나로크>와 <블랙팬서>에 비하면 의무적 선방에 가까운 심심한 영화지만, 마블이 고안한 새롭고 기묘한 블록버스터의 양식을 보여주는 예로서는 당연히 최적이다. 뭐랄까, 영화가 생물이라면 인간의 욕구와 수요에 따라 유전자가 조작된 개체, GMO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05/01
악당 캐릭터가 허약하다는 비판에 마블 스튜디오는 나름 열심히 응답해온 바, 근작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의 벌처(마이클 키튼), <토르: 라그나로크>의 헬라(케이트 블란쳇)와 준악역 그랜드 마스터(제프 골드블럼), <블랙팬서>의 킬몽거(마이클 B. 조던)에 이어 <인피니티 워>의 타노스는 역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빌런 가운데 상위권에 포함되는 캐릭터다. 적어도 논리를 가진 악당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그 논리가 정당한가 아닌가는 차치하고. 타노스는 최소한 “내가 제일 강해져서 세상을 다 가질래”라고 우기는 악당은 아니다. 과밀해서 패망한 별 출신인 타노스는 자원에 비해 인구가 과잉해 우주가 불행하다고 판단하고 자청해서 인구 절반을 솎아내는 고난의 사명을 짊어지기로 한다. 완전 파괴는 아니고 반만 파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라고 해야 할지 신선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타노스는 학창 시절 사회탐구 영역 서양경제사 시간에 맬서스의 <인구론>까지만 듣고 졸아버린 것이 분명하다. 공간, 시간, 리얼리티, 영혼, 마인드, 파워를 관장하는 스톤을 손에 넣는다면 자원을 증산하거나 에너지를 합성할 수 없을까? 인구의 절반이 소멸하면 인적 자원- 에너지와 능력- 도 사라지지 않나? 하다못해 가족계획은? 무엇보다 인구가 절반으로 줄면 공정한 분배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지구의 지배적 생산양식 자본주의는 수요가 반 토막나면 당장 무너질 텐데 대안이 있나? 어쨌거나 타노스의 ‘인구론’은 적어도 영화에 넣어야 하는 히어로가 너무 늘어나 괴로운 루소 형제 감독의 심금을 울린 것이 분명하다. 머릿수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이쯤되면 분명하지만 지금 나는 호평받는 타노스 캐릭터를 트집잡는 중이다. 강할지 몰라도 타노스는 유능한 리더는 아니다. <인피니티 워>에서 단 며칠 만에 인피니티 스톤 다섯개를 한꺼번에 손에 넣을 거면서, 지금까지 10년이나 소득 없는 아웃소싱을 고집한 이유가 뭐람? 다만 비열함에서 타노스는 출중한 악당이다. 타노스는 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헌신을 이용해 인피니티 스톤을 입수한다. 로키 앞에서 토르를 고문하고, 가모라(조이 살다나)에게 비명지르는 동생을 보여준다. 그러나 악당으로서 타노스가 제일 잔인하고 독창적인 부분은 협박 자체가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한 숭고한 희생의 위안마저 짓밟는다는 점이다. 스타로드(크리스 프랫)는 고뇌 끝에 가모라를 포기하지만 그것이 신기루임을 발견하고 좌절한다. 비전(폴 베타니)의 파트너 스칼렛 위치(엘리자베스 올슨) 역시 같은 비운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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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함의 이면
검소한 프랜차이즈로 자리잡은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의 ‘트립 투 시리즈’는,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공금으로 미식을 즐기며 즉흥 코미디를 겨루는 여행기다. 미식과 상황극 코미디 외에 연작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제3의 성분은 노년에 다가가는 두 중년남의 인생 감각이다. 가정을 이룬 아버지 롭은 덜 유명해도 안정된 사생활에 만족하는 반면, 오스카 후보에도 올랐던 스티브는 끊임없이 성취를 확인하고 멋진 인상을 유지하려 한다. 대부분 두 사람이 말로 치는 탁구로 이뤄진 <트립 투 스페인>(2017)에 외부자가 끼어든 인상적 신이 있으니 스페인 거리에서 버스킹하던 영국 청년이 합석하는 대목이다. 젊기에 돈이 없지만, 젊기에 체력 좋고 여유로운 청년은 현지인만큼 스페인어에 능하고 자연스럽게 이방의 삶을 즐기고 있다. 책에서 얻은 교양으로 계획한 세련된 여행에 자부심을 가졌던 스티브는 돌연 열등감을 느끼고 자리를 뜬다. 남겨진 롭은 스티브를 이해한다. 그는 다 가질 수 없음을 수용했지만 스티브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