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의미를 넘어 새로운 질문이 필요했다.” <종로의 기적>(2010), <공동정범>(2016)의 이혁상 감독에게 이제는 프로그래머라는 직함 또한 무척 자연스럽다. 지난해에 이어 5월 18일 개막한 제6회 디아스포라영화제 역시 영화제의 유일한 프로그래머인 이혁상 프로그래머의 든든한 존재감에 힘입는 중이다. 디아스포라영화제의 본뜻에 더욱 첨예하게 다가가려는 노력과 동시대의 목소리 안에 산재하는 모두의 디아스포라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올해는 더욱 또렷한 공명을 자아낸다. 공안사범으로 쫓겨 일본으로 도망친 청년이 우연히 재일조선인들의 마을에 스며드는 영화 <조선의 태양>을 준비 중이기도 한 이혁상 프로그래머에게 영화제 안과 밖, 감독과 프로그래머, 개인과 사회를 넘나드는 다양한 고민을 청해 들었다.
-먼저 지난해로 돌아가보자. 처음 프로그래머직을 수락한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
=강석필 인천영상위원회 사무국장의 역할이 컸는데, 내가 그분의 스탭 제의를 두번이나 고사한 적이 있다. (웃음) 지지난해 말 전화해서 부탁이 있다고 하기에 ‘이번엔 무슨 일이든 해야겠구나’ 결심했다. 나 자신이 성소수자로서 넓은 의미의 디아스포라적 개념에 매료된 것도 사실이다. 사회적으로 쉽게 배제되면서 정주(定住)를 고민하는 이들의 영화에 관심이 갔다.
-지난해의 경험을 발판삼아 올해 특별히 염두에 둔 부분도 있었을 것 같다.
=프로그래머 첫해는 개인적으로는 좌충우돌이었다. 아주 사소하게는 영화 스크리너를 요청하고 받는 것, 배급사별 성향을 파악하는 것 등 모든 일들에 새롭게 적응하고 공부하는 시기였다. 지난해 특히 신경 쓴 것이 있다면 디아스포라의 본뜻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지난해가 강화의 과정이었다면 올해는 새로운 질문을 시작하려 한다. 디아스포라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문제제기를 해봤다. ‘환대를 넘어, 그다음은?’ 사실 디아스포라의 본래 개념,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의 문제를 생각하면 너무 남 이야기 같지 않나. 우리 것으로, 우리 시선으로 보고 싶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 최근 한국영화에서 도드라진 집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 재개발과 같은 도시 문제에 집중해본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해 프로그래밍이 좋다는 반응이 많았다. 자평을 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관객도 좋아해주는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으로서 내 정체성이 반영된 부분도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선 어쩔 수 없이 관객의 반응을 고민하게 된다. 그런 마인드가 프로그래머 일에도 반영된 건 아닐까. 디아스포라 개념 자체에 생소한 관객도 많은데 영화의 화법이 지나치게 실험적이면 오히려 이슈의 핵심에 다가가지 못할 수 있겠다는 걱정이 있었다. 나 역시 <공동정범> 당시 1차 편집본 중에는 꽤 아방가르드한 버전이 있었다. (웃음) 창작자로서 새로운 예술적 지평에 도달하고 싶은 욕심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결국은 매번 영화의 목적에 대해, 지금 단계에서 관객에게 도달시켜야만 하는 1순위가 무언가를 고민하며 원점으로 회귀하게 된다.
-올해 신설된 ‘시네마 피크닉’ 섹션도 그 연장선이라고 보면 될까. ‘디아스포라의 눈’에 초청된 객원 프로그래머 명단도 친숙하다.
=아무래도 인천은 전주나 부산에 비해 영화제를 위해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는 여행의 느낌이 적지 않나. 관객 유치를 고민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남녀노소 모두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저변확대를 도모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올해 ‘디아스포라의 눈’ 섹션은 애초에 여성 프로그래머(김혜리 기자, 은하선 작가, 김이나 작사가)로만 구성해보자는 생각으로 꾸렸다. 특히 <까칠남녀>에서 하차를 통보받은 은하선 작가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공적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디아스포라영화들이 더욱 활발히 제작되고 있는 것 같다. 올해 특별히 눈에 띄는 지역이 있었나.
=베를린국제영화제가 대단했다. 유럽은 지중해를 건너 오는 난민들이 많고, 난민과 이주민 문제를 피부로 접촉한 시간이 길기 때문인지 제작되는 영화들이 확실히 많고 다양하다. 독일 정부의 노력이 영화들에서도 느껴지더라. 프랑스 역시 기민하게 반응 중이다. 우리 영화제에도 <프랑스에서 한철>의 마하마트 하룬 살레 감독이 내한하기도 한다. 유럽의 선주민들도, 디아스포라 당사자들도 활발하게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것이 현재 유럽 대륙의 모습이다.
-주거지가 불안정한 한국 청년들의 세태가 감지되는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단편영화는 특히 당대 이슈를 흡수해서 빠르게 나오기 때문에 동시대 청년 문제가 활발히 거론된다. 이건 탈북자들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맡으면서 가장 관심 갔던 부분이 집 없는 여성들에 대한 묘사가 많다는 거였다. 그 당시에 이미 프로그래머로서 직업의식이 장착되었던 건지 디아스포라영화제와 연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올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섹션이 그렇게 탄생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연계된 청년감독들의 토크 포럼도 신선하게 느껴진다.
=<버블 패밀리>의 마민지, <개의 역사>의 김보람, <소공녀>의 전고운 감독까지 모두 한국의 청년 여성감독들이 자신의 세대롤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현하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나 역시 이 이슈에 대해 고민하고 듣고 싶었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을 다룬 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의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이 함께 하는, 여성 게스트가 ‘전진 배치’된 섹션이다.
-인천아트플랫폼 일대에서 열리는 영화제답게 전시 프로그램에도 주력하고 있는데, 올해 특별히 애착이 가는 전시가 있나.
=지난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파독간호사의 삶을 담은 전시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의 일부를 가져왔다. 그중 노년의 두 여성이 손을 잡고 서 있는 사진이 있는데, 이번에 사진 속의 두분을 모시게 됐다. 알고 보니 레즈비언 커플이더라. 많은 파독 광부, 간호사들이 이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일에 머무르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마 레즈비언으로서 삶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현대적 의미의 체류권 투쟁이 아닐까.
-첫 번째 극영화 <조선의 태양>을 준비 중인데, 디아스포라영화제 작품들이 새로운 영감을 주나.
=강석필 사무국장이 프로그래머직을 제안할 때부터 “<조선의 태양>도 디아스포라영화 아니야?”라고 하더라. (웃음) 일단 영화제가 끝나고 현실을 다시 살펴야 할 것 같다. 남북관계가 평화 모드로 접어들면서 개인적으로 내 작품은 위기를 맞았다. (웃음) 일단은 좋은 영화를 많이 보게 되니까 다양한 감독의 연출적인 솜씨, 테크닉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남는 건 디아스포라적 이슈와 인물을 바라보는 감독의 태도다. 주변부에 머무르는 존재들, 기득권만이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누리지 못하는 인물들이 겪는 혐오와 차별을 감독으로서 어떻게 바라보고 재현할 것인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준다. 영화제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부분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지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에 이어 다시 영화제를 찾는 재일조선인 학자 서경식 교수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영화제 추천작을 꼽는다면.
=<86일의 69분>은 노르웨이에서 온 애길 라슨 감독의 작품인데, 86일간 펼쳐지는 시리아 난민의 긴 여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현장 다큐멘터리다. <승려 W>도 주목할 만한데 불교 국가 미얀마에서 로힝야족에 가해지는 잔인한 테러에 앞장서는 승려 W가 나온다. 바벳 슈로더 감독의 ‘악의 3부작’ 완결편이기도 하고, 종교와 인간에 대한 진중한 고민이 담겨 있다.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선동하는 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