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임태규의 <동경 이야기> 극장에서 만난 선생님
2018-05-28
글 : 임태규 (영화감독)

감독 오즈 야스지로 / 출연 류 지슈, 하라 세쓰코 / 제작연도 1953년

영화를 전공하던 한 대학생은 끊임없이 자신의 소질을 의심했고, 불안했다. 시네마테크에 가는 일은 그에게 몇 안 되는 위안거리 중 하나였다. 돼지 비린내가 들러붙은 국밥 골목을 지나 극장 옥상에 오르면 상영관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그 영화를 이미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를 만났다. 영화는 ‘죽음’마저도 일상으로 만들고는 초월한 듯한 태도로 삶의 깊이를 전달한다.

당시 나는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영화인가에 대한 물음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오즈의 영화가 그 물음에 대한 힌트를 던져주었다. 그의 영화는 누군가가 밥을 먹는 모습, 길을 걸어가는 모습, 공간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전달했다. 영화에 잘 포착된 어떤 디테일한 순간은 인물이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인물의 일상과 인생이 어떠할지 예측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영화가 가지는 매력 중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실감나게 표현한다는 말은 현실을 유사하게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다. 현실을 드러낸다는 것은 현실의 단면을 포착할 때 우리가 지각하지 못했거나 그냥 지나쳤던 지극히 작은 세부 지점까지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리얼함이란 우리가 의도하고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출현한다. 다시 말해 현실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모사하느냐가 아니라 현실의 모호성을 얼마나 풍요롭게 담아낼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두개의 리얼리티 사이에 서게 된다. 인간으로서는 실제 삶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관객으로서는 특정한 리얼리티를 지각하는 영화의 세계로 옮겨가게 된다. 리얼리티와 환영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세계를 통해 감정을 동시에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것, 심지어 관객으로 하여금 주위 삶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영화의 근본적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동경 이야기>는 그것을 실천해낸 영화였다.

<동경 이야기>가 세상에 나온 지 수십년이 지난 작금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폰으로 영화를 찍고, 누구나 편집을 할 수 있는 쉬운 편집 툴이 사용되고, 만들어낸 영화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인프라가 존재하는 순간에도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힘은 여전히 동일하다.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감독의 이름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이제 더욱이 ‘영화를 영화답게 하는 힘’이다. 화려하고 쿨해 보이는 포장지로 꾸민 팬시상품 말고 단순해 보이지만 독창적인 스타일이 아이폰을 손에 쥐고 태어난 세대들에게 통하는 영화적 언어일지도 모른다.

이제 막 두편의 독립영화를 만든 초보 감독으로서 나는 연출의 방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늘 고민한다. 그때마다 찾아보는 것이 오즈의 영화다. 그러고는 나를 관통하는 경외감에 스스로 놀란다. 대학 때 만난 <동경 이야기>는 그렇게 설렘으로 다가와서 강렬하게 감정으로 남았다가 이제는 늘 옆에 두고 찾아보는 선생님이 되었다.

얼마 전 한편의 오락영화를 보려고 동네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들렀다.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섰는데, 러닝타임 내내 단 한구석의 미덕도 발견하지 못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주차 확인 도장을 받으려고 상영관 출입구를 지나 박스오피스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달콤한 캐러멜 팝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순간 예전 시네마테크 가는 길에 묻어 있던 국밥 골목의 돼지 비린내가 떠올랐다. <동경 이야기>를 보고 나오는 날 우연히 만난 영화학도와 돼지국밥에 소주를 한잔 먹었었다. 그립다.

임태규 영화감독. 영화 <폭력의 씨앗>(2017), <파도치는 땅>(2018)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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