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트릭스 포터의 삶을 다룬 <미스 포터>(2007)의 첫 장면.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어떻게 아이를 위한 책을 쓸 수 있느냐”고 출판업자가 묻는다. 당시나 지금이나 꽤나 무례하고도 편견이 가득한 질문임에도, 현실 출판 시장에서는 자기 아이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소박함에서 시작하여 대박난 사례가 많다. <곰돌이 푸>(2011), <토마스와 친구들> 시리즈부터 <해리 포터>에 이르기까지(해리 포터의 성을 베아트릭스 포터에게서 따왔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좋은 부모가 훌륭한 작품을 쓴다는 절대 공식은 없을 터(아마 실패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어쨌든 <피터 래빗> 이야기를 준비할 당시, 베아트릭스 포터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훗날 자신의 조력자였던 윌리엄 힐러스와 결혼을 하기는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자식이 없었다(결혼 후에도 아이는 없었다). 그렇지만 어릴 적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교사의 아이들이나 사촌을 위해 들려주던 이야기에서 발전한 것들이 제법 있었다. <피터 래빗> 이야기가 출간된 당시를 흔히 빅토리아 시대로 일컫는 건 약간의 어폐가 있지만(<피터 래빗> 첫번째 이야기는 빅토리아 여왕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02년에 나왔다), 아무튼 전통적 대가족에서 산업도시의 핵가족으로 변하면서 ‘이야기’가 지닌 성격도 집안 어른이 말로 들려주던 것으로부터 대량 출판된 책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영화라는 새로운 볼거리는 도시민을 위한 오락거리로 퍼져나갔다. 베아트릭스 포터가 그림 속에 담았던 동물들은 머잖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태로 스크린 위를 휘저을 것이다(특히 토끼와 생쥐는 애니메이션계의 스타가 될 테지).
순수하거나 평화로운 전원생활은 없다
자, 그러면 이제 영화 <피터 래빗>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의 신선함은 굳이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드라마 <셜록>의 매력을 알고 있다. 19세기의 텍스트가 21세기로 시대를 갈아탔다고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다는 걸 이미 경험했다. 그러나 원작 <피터 래빗>을 읽지 않고, 삽화의 스타일만 아는 사람들로서는 영화 <피터 래빗>에 적잖이 당황하거나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아니, 원작을 읽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영화 속 주인공 피터 래빗을 비롯해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동물 친구들이 전혀 순수하거나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다. 혹여 <곰돌이 푸>나 <밤비>(1942)를 기대했다면, 동심 파괴를 겪었으려나? 베아트릭스 포터의 원작 자체가 결코 평화와 행복과 사랑이 흘러넘치도록 쓰여지지 않았거니와 좀더 완곡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두개의 겹을 지닌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낙원, 다른 하나는 풍자. 그러니까 빅토리아 시대의 산업화된 풍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힐링’) 낭만적 자연이 펼쳐진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고, 산업혁명 무렵의 도시 이야기를 자연에 빗댄 우화로 읽을 수도 있다. 혹여 누군가는 포터를 에밀리 브론테의 옆에 둘 수도 있고, 누군가는 찰스 디킨스쪽으로 옮겨둘 수도 있다. 원작 <피터 래빗>이 원래 그런 식이다. 숲속 친구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일탈과 위협과 거친 훈육이 얽히고설킨 세상사의 만화경과도 같다. 어른 동물들은 잔머리를 굴려가며 자신의 이익을 더 남기려 들고, 어린 동물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서 말썽을 부린다. 그래서 꼬리가 잘려나가기도 하고, 회초리를 맞기도 한다. 피터 래빗의 아빠가 맥그리거 할아버지에게 붙잡혀 파이가 되었다는 이야기의 시작부터가 잔혹하게 들릴 수 있다. 피터 래빗의 엄마와 이웃 어른들도 먹고살려고 바삐 일을 한다. 그러니까 원작에서 ‘그 좋았던 옛날의 낙원’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아이들은 도시의 뒷골목을 누비듯 숲과 이웃 인간의 마당을 기웃대며 온갖 사건과 소동을 겪을 수밖에.
소동극이 아닌 난동의 폭력 신이 된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피터 래빗>이 좀더 하드보일드로 기운 까닭은, 현재라는 시간대로 옮겨오면서 뭔가 그럴듯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결코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원작처럼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로케이션 무대로 삼고, 맥그리거 할아버지도 오롯이 등장하는 가운데, 할아버지에 맞서 피터 래빗 무리를 돌보는 여인 비를 베아트릭스 포터의 분신처럼 설정한 것은 꽤나 흥미롭다. 그런데 맥그리거 할아버지의 돌연사, 그로 인해 뜻밖의 상속인인 토마스가 들어서면서 이야기는 조금씩 틀어진다. 21세기 <나 홀로 집에>로 변한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과 말썽쟁이 토끼들의 관계는 꼰대와 10대 문제아 그룹 간의 전쟁으로 바뀌어간다. 전기 울타리를 둘러싼 전쟁, 그리고 (아마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논란거리인) 치명적인 알레르기 공략. 이러한 진행은 영화 <피터 래빗>이 ‘스크루볼 카툰’의 장르적 규칙을 취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토끼 캐릭터가 등장하는 <벅스 버니> 시리즈처럼. 벅스 버니는 철저히 인간과 대립하면서 스크루볼 카툰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장르에서는 폭력이나 생존을 둘러싼 윤리적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저 쫓고 쫓기고 골탕먹이는 난장판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게 핵심이다. 그 속에서 대립하는 캐릭터들은 상대에게 한방이라도 더 날리기 위해 온갖 계책과 술수를 짜내며, 이를 위한 설정과 장치를 치밀한 동선과 타이밍을 통해 배치해 마치 불꽃놀이와 같은 통쾌함과 유쾌함을 뽑아낸다(그래서 척 존스라는 애니메이션 감독은 그 어떤 감독들보다 애니메이터 사이에서 추앙받는다). 이러한 스크루볼 장르가 할리우드 카툰에 특화되었다면, 아드만 스튜디오는 <월래스 & 그로밋: 거대토끼의 저주>(2005)를 통해 좀더 생활 밀착형 영국식 토끼 소동극으로 풀어냈다고 볼 수 있다. 할리우드의 킹콩을 영국인들의 가드닝 취미와 결합하여 한바탕 놀아본 셈이다.
그런데 <피터 래빗>은 다시 할리우드 장르로 돌아가면서,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단순한 합성을 따르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실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애니메이션 이미지가 실사와 뚜렷하게 분리되었다면(예컨대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나 <스페이스 잼>(1996) 같은 식 말이다), 조금 낡아 보이기는 해도 관객에게는 즐거운 소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나 <피터 래빗>은 컴퓨터그래픽스와 실제를 깔끔하게 합쳐냈다. <패딩턴> 시리즈처럼 말이다. 그러다보니 작품 속 소동은 난동이 되고, 짓궂은 골탕 먹이기는 고약한 폭력 신이 되고 말았다(인간이 동물에게, 동물이 인간에게, 서로 한방씩). 한마디로 판타지 문법으로 가볍게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영악했고, 집요했다. 우리를 더욱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현실과 픽션이 뒤엉킨 세계가 사실은 베아트릭스 포터가 피터 래빗을 비롯한 숲속 동물들을 바라보던 시선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포터에게 동물들은 그저 우화나 은유가 아니라 현실에 실재하며(자신이 기르던 토끼, 고슴도치, 생쥐), 그들의 평소 모습을 그대로 옮긴 것이 원작 <피터 래빗>이었다(라고 줄곧 고백했다). 게다가 영화 <피터 래빗>은 작품 속 화자의 목소리를 베아트릭스 포터나 (그녀의 분신인) 여주인공 비가 아니라, 피터 래빗의 누이 토끼로 설정하고, 후일담으로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마치 관객이 영화관 속에서 겪었을 기대와 혼란과 난감함을 이미 꿰뚫어봤다는 식으로 능청을 떤다. 영화는 영악했고, 우리는 순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