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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꽃> 김재범 감독 - 평범한 이의 절박한 시대정신
2018-05-31
글 : 임수연
사진 : 백종헌
박래전 열사 30주기

김재범 감독은 박래전 열사와 같은 학교 4년 후배였지만, 생전에 얼굴을 본 적은 없다. 그가 아직 군대에 있던 19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박래전은 “광주는 살아 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친 후 분신했다. 김재범 감독은 학교 선배들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박래전의 10주기와 20주기 기념사업 때 후배로서 조금씩 참여를 해오며 열사에 대해 알아갔다. 어느덧 박래전 열사의 30주기를 앞두게 된 그는 ‘래전이 형이 살았던 생애의 두배 이상을 살게 됐는데 그동안 내가 뭘 했지?’라는 생각에 전보다 더 열심히 추모 사업을 준비했고, 그 결과 열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겨울꽃>까지 만들게 됐다. “박래전 열사가 우리에게 자신이 다 하지 못했던 것을 하라는 숙제를 남기고 간 것 같다”는 김재범 감독을 만났다.

-박래전기념사업회에서 박래전 열사 30주기 추모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큐멘터리도 만들게 됐다고.

=이제 곧 30주기니까 이제라도 박래전 열사가 생전에 쓴 편지나 시, 사진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록물을 정리해놓아야 하지 않겠냐고 86학번 동기 사이에서 말이 나왔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담아 작은 다큐멘터리로 만들자는 이야기로 이어진거다. 1년 전에 계획할 때는 15~20분 정도의 분량을 생각했다. 20주기 때 만든 짧은 다큐멘터리도 그 정도 분량이기도 했고. 그런데 열사의 동기·선후배 등을 취재하며 작품의 뼈대를 잡아나가다 보니 조금씩 욕심이 생기더라. 점점 제작 기간이 길어지고 러닝타임도 늘어났다. 최종 완성본은 87~88분 정도 분량이 될 듯하다.

-지난해 개봉한 <1987>(2017)은 촛불로 정권 교체를 얻어낸 당시 시민들의 상황과 겹치며 민주주의의 희망을 보여준 작품이다. <겨울꽃>은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 이야기를 담는다.

=1987년에도 많은 이들의 죽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적인 이유에서, 고문을 당하거나 최루탄에 맞아 죽은 것이었다. 1988년에는 서울대학교 조성만이 명동성당에서 투신하고, 단국대학교 최덕수가 분신을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장 노동자와 학생, 심지어 대학교수연합도 시청 앞에서 함께 행진을 하며 승리감을 맛보았던 1987년과 달리 1988년에는 그런 쟁취감이 전혀 없었다. 불과 1년 전까지 살아 있던 불씨들이 대부분 꺼져가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한시름을 놓았다며 안심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대로 제6공화국이 시작되고 올림픽을 치러도 되는 것인가 하고 학생들이 회의하던 때였다. 박래전 선배는 한 시대가 그냥 이렇게 끝나는 것이 못 미덥고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의 몸으로 방점을 찍어야 할 만큼 절박해진 것이다.

-열사가 분신하기 전 “광주는 살아 있다”고 외쳤다. 80년대 초반 학번이기에 더욱 광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의 초점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에 맞추어져 있나.

=80년대는 어떤 얘기를 다루든 광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80년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트라우마이자, 광주 시민들의 정신을 보여주는 자존감이었다. 제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가 개최되고 당시 노무현 국회의원이 많은 것을 밝혀내기도 했지만, 역시 정치권의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 광주 이야기만이 큰 비중으로 다뤄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열사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은.

=자기 목숨까지 끊을 생각을 한 사람이라면 굉장히 강한 인성과 결단력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박래전 열사와 1학년 때 함께 사회과학 세미나를 했던 사람들 말에 의하면 가두시위가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벌벌 떨 만큼 굉장히 겁이 많고 성격이 여린 사람이었다더라. 그런 사람이 불과 몇년 뒤에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결정을 한 것이다. 많은 열사들은 단 한번의 결단으로, 혹은 타고난 강인한 성격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박래전 열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당시 시대였다. 사회적 타살이다. 어떤 법학자는 공익적 자살이라는 표현도 쓰더라.

-고인은 원래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사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열사들이 그랬듯이 어떤 특별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박종철·이한열 열사처럼 이 선배도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래서 박래전 열사의 여러 모습을 모두 다큐멘터리에 담았다. 그를 직접 본 선배나 동기들의 인터뷰에서는 박래전 열사 역시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그런 평범한 학생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시인이 되고 싶다던 평범한 꿈마저 이루지 못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연출작이 다큐멘터리다.

=숭실대학교에는 영화 동아리가 없었다. 그래서 후배 몇명을 모아 90년대에 서클을 만들었다. 이때 영화 워크숍을 하다보니 이 일을 업으로 삼게 됐는데, 극영화 만드는 재주는 별로 없는 것 같더라. (웃음) 관객에게 감동을 주거나 돈을 벌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쓸 줄 아는 능력이 나에겐 없었다. 시나리오를 두세편 써보다가 금방 단념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됐다.

-그러다가 친일파로 분류되는 고 허영 감독에 대한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영화인>(1997), 한국 최초 여성 변호사 고 이태영을 다룬 <이.태.영>(1998), 고 조영래 인권변호사에 관한 추모 다큐멘터리 <진실의 불꽃>(2000) 등을 만들었다. 소재를 선택하는 특별한 방식이 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재능이 없다. 사실 난 영화에 대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시대에 이런 작품이 필요하다고,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소재를 영화로 만들었다. 가령 허영 감독에게 관심이 있는 우리나라 영화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모르고 지나가지 않았겠나. 박래전 열사도 상대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고, 고 이태영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그 이후 10년 가까이 재일 조선인이 모여 사는 우토로 마을에 대한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게토>(2008)를 만들었다.

=당시 우토로 마을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행히 <한겨레> 등에서 우토로 마을을 기사로 다루고 이 일이 공론화되면서 지금은 주민들이 공용주택에서 살 수 있게 됐다.

-차기작으로 생각하는 주제가 있나.

=고 허영 감독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다른 시선으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90년대 당시에는 감독이 찍었다는 영화 <너와 나>(1941)를 단 1초도 보지 못하고 만들었다. 이후 일본에서 총 9개의 필름롤 중 2개가 발견되어 일부분을 볼 수 있었다. 조국에서는 친일파 감독으로 남고, 그래서 인도네시아로 갔지만 여러 문제 때문에 다시 해방된 조국으로 오지 못한 사람 아닌가. 약간 관점을 바꾸어 생각하면 <파우스트>에서처럼 자신의 성공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기도 하다. 당시 그 감독에게는 조국이 그렇게 큰 의미도 아니었을 테고.

-앞으로 <겨울꽃>의 상영 계획은.

=5월 30일, 6월 4일 두번에 걸쳐 숭실대학교에서 상영된다. 박래전의 둘째형이자 인권재단 ‘사람’의 소장인 박래군씨가 고인의 옷과 편지와 시를 전시하는 ‘冬花 박래전추모관’을 열 예정인데, 6월 5일에 개관식 겸 상영회를 열 계획이다. 이렇게 영화를 상영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좀 본 후에, 작은 극장에나마 올려서 다른 관객과도 함께 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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