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주성철 편집장] <오목소녀>와 <걷기왕> 소확행이 필요해
2018-06-01
글 : 주성철

백승화 감독의 <걷기왕>(2016)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한 학생의 엉망진창 <타이타닉> 리코더 연주 장면이다. 만복(심은경)이 경보를 포기하던 날, 만복은 자신에게 경보를 추천했던 담임 선생(김새벽)이 또 다른 학생에게 “그래, 너는 음악이야!”라고 음악을 추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학생의 리코더 연주는 엉망이었다. 알고 보니 담임 선생은 아무에게나 막무가내로 꿈을 주입시키는 사람이었다. 만복의 재능을 제대로 파악하고 추천한 게 아니었다. 그 학생의 연주로 셀린디옹의 <My Heart Will Go On>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만복은 “다들 뭔가 될 거 같은데, 나만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 나 혼자만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며 서럽게 엉엉 운다.

지난주 개봉한 백승화 감독의 신작 <오목소녀>에서 주인공 이바둑(박세완)의 동거인인 로커 동거인(맞다, 사람 이름이다. 장햇살 배우가 연기한다)도 꿈을 이루는 게 쉽지 않다. 27살이 되면 커트 코베인처럼 되어 있을 줄 알았건만, 정작 27살의 동거인은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집에서 인형 눈깔을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영화 초반에 ‘도를 믿으세요’ 커플을 만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커플 중 남자는 바로 특별출연한 ‘브로콜리 너마저’의 윤덕원이다).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건네는 그들이 그저 습관처럼 “하시는 일 힘드시죠?”라고 물었을 뿐인데, 동거인은 그만 마음이 무너져 내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진짜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경보와 오목, 이른바 비인기 종목을 소재로 삼은 백승화 감독의 두 영화는 얼핏 가진 것 없는 청춘, 혹은 마이너리티가 처한 열악하고 초라한 현실 그 자체만으로도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소소함의 매력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보통 장·단거리 달리기보다 경보가, 바둑보다 오목이 한수 아래의 쉬운 무언가로 취급된다. 그래서 둘을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겠으나 두 영화 모두 ‘한 칼’을 가지고 있다. <걷기왕>에서 만복의 선배 수지(박주희)는 경보에서 가장 중요한 게 “뛰고 싶은 걸 참는 것”이라고 말한다. 질주의 쾌감만큼이나 경보의 인내의 미학을 설파한다. <오목소녀>에서도 김안경(안우연)은 “바둑은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있지만 오목은 한번의 실수가 목숨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얼핏 짧은 경기시간에, 쉬운 경기방식을 가진 것 같은 오목이 보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 순간, 키득대며 보던 두 영화에 뭔가 한방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나 두 영화를 즐기며 보겠지만, 특히 요즘의 나처럼 ‘소확행’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또 <오목소녀>에서는 ‘티끌 모아 태산’이 아니라 ‘티끌 모아봤자 티끌’이라는 코미디언 박명수의 어록도 패러디한다. 한때 그의 어록이 꽤 돌아다녔는데 오랜만에 보니 나름 반갑다. 두 영화에 어울리는 또 다른 박명수의 어록을 끄적이며 마칠까 한다. 요즘 내 마음이기도 하다.(-_-;) “일찍 일어나는 새가 피곤하다.”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잡아먹힌다.” “시작은 반이 아니라 시작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너무 늦었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굳이 오늘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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