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봅시다]
<밤쉘>의 헤디 라마, 천재 과학자와 아름다운 배우 사이
2018-06-06
글 : 임수연
평가절하된 여성 과학자

와이파이와 블루투스의 기초가 되는 아이디어를 처음 고안한 과학자. 이 정도 업적이라면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법도 하지만 역사는 이 발명가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대신 백설공주와 캣우먼에 영감을 준 미모의 할리우드 여배우로 그를 기억했다. <밤쉘>은 “나는 원래 외모가 아닌 두뇌에 관심이 많다”며 1990년 당시 <포브스> 기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헤디 라마의 육성 인터뷰를 토대로 그의 인생을 되짚는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보고 나면 더 궁금해지는 그의 삶을 정리했다.

<엑스터시> 포스터.

편견의 시작

191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헤디 라마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와 피아노, 다양한 언어를 배웠지만 학교 공부에 큰 뜻을 두지는 않았다. 대신 영화와 영화배우에 관심을 보이며 관련 잡지를 모으고, 연기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사에 직접 찾아가 자신을 캐스팅해 달라고 설득하던 당찬 소녀였다. 연기를 좀더 제대로 배우기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간 후 찍게 된 <엑스터시>(1933)는 그에게 유명세와 이혼의 불씨, 그리고 오랜 편견을 함께 안겨준 작품이 됐다. 원래 합의가 되어 있지 않았던 노출 장면을 감독의 협박으로 찍게 되면서, 그는 영화에서 알몸으로 수영을 하고 춤을 춰야만 했다. 또한 교묘한 편집으로 완성된 오르가슴 연기는 그에게 항상 ‘영화 사상 최초로 알몸 오르가슴 연기를 한 배우’라는 자극적인 수식이 따라다니게 만들었다. <엑스터시>를 촬영한 해, 헤디 라마는 14살 연상의 군수업체 대표 프리츠 만틀과 결혼했는데, 그는 자신의 부인이 배우로 유명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엑스터시>의 필름과 포스터를 계속 사들여서 없애려 했고, 급기야 전화 통화 내용을 엿듣는 하인까지 고용한다. 남편이 나치 동조자가 되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 헤디 라마는 집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MGM과 계약하며 미국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만난 영화 제작자 루이스 B. 메이어는 라마의 스타성을 감지했고, 헤트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라는 본명 대신 헤디 라마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다. 이후 그는 <알제>(1938), <화이트 카고>(1942), <삼손과 데릴라>(1949) 등 25편의 영화에서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 등과 호흡을 맞추며 MGM의 대표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삼손과 데릴라>

첫 번째 결혼 생활로 헤디 라마가 유일하게 얻은 것은, 남편의 옆에서 듣게 된 ‘원거리 조종 어뢰’에 관한 계획이었다. 탄도가 맞지 않아 어뢰가 목표물에 도달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거리 조종 기술을 쓸 수 있는데, 무선전신기를 이용해 신호를 보내면 적들이 어뢰의 진로를 미리 파악할 수 있다는 한계에 부닥쳤다. 프리츠 만틀은 원거리 조종에 관한 어떤 어뢰도 만들지 못했지만, 헤디 라마는 남편의 계획에서 영감을 얻어 나중에 ‘주파수 도약’으로 알려진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휴대폰과 무선인터넷의 토대

어뢰 공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던 1940년대, 헤디 라마는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무선으로 어뢰를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의 주파수로 신호를 전달하면 적이 그 주파수를 찾아내 교란할 위험이 있겠지만, 주파수를 여러 개로 분산시키면 적군이 이를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뢰의 명중률은 100%가 된다. 할리우드 파티에 종종 참석했던 헤디 라마는 영화음악을 만들기도 하는 작곡가 조지 앤타일과 친구가 되는데, 그는 헤디 라마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게 도와주는 파트너가 됐다. 조지 앤타일은 두루마리를 이용해 작동하는 자동 피아노를 만든 바가 있었는데, 같은 방식으로 무선주파수간에 빠른 도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아이디어를 1940년 국립발명가협회로 보냈고, 이는 2,292,387이라는 이름과 397,412,006이라는 시리즈 번호로 1941년 미 연방 특허청에 출원되어 1942년 정식 특허로 등록됐다. 당시 재혼을 하면서 ‘헤디 키슬러-마키’라는 이름으로 특허가 올라가고, 전쟁 중 ‘비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적용 여부는 비밀리에 시험됐기 때문에 라마의 발명은 화제가 되지 못했다.

미 군대는 이 장치를 어뢰에 장착하기에는 통신 장치가 너무 크다고 판단해 활용하지 않았지만, 1957년 펜실베이니아 전자공학 시스템국의 기술자들은 이를 응용해 보안 시스템에 활용했다. 또한 이는 주파수 도약이 미사일 기술의 기본 개념이 되던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에 다시 응용됐다. 또한 헤디 라마의 도청 금지 아이디어를 이용한 전화기로 루스벨트 대통령와 처칠 수상이 통화를 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 전화접속이었다. 이로부터 데이터 전송과 움직이는 무선전기 연결망, 더 나아가 인공위성, 휴대폰, 무선인터넷이 탄생할 수 있었다.

스캔들, 그리고 뒤늦은 발견

할리우드는 그가 과학자로서 성장하기보다는 여배우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헤디 라마의 과학적 성과는 1965년 출간된 그의 의도가 반영되지 않은 전기 <엑스터시와 나>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연예계는 여섯번의 결혼과 여섯번의 이혼을 한 그를 점차 자극적인 가십의 주인공으로 소비했다. 물건을 상습적으로 훔치는 도벽이 있다든지 5만달러 상당의 보석을 도난당했다던 그의 집에서 보석이 발견된다든지 하는 구설이 오르내렸다. 또한 그는 영화와 광고를 직접 만드느라 약 3천만달러의 거액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헤디 라마의 업적은 뒤늦게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그의 발명을 뒤늦게 알아본 사람들이 이에 대한 글을 온라인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1997년 헤디 라마와 조지 앤타일은 전자프런티어재단의 개척자상과 벌비 그나스 성공정신상을 수상했다. 헤디 라마가 세상을 떠난 2001년으로부터 4년 후, 독일은 그의 생일인 11월 9일을 공식적으로 ‘발명가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에디슨처럼 잘 알려진 발명가들뿐만 아니라 헤디 라마처럼 역사가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했던 이들을 함께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사진 영화사 그램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