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김범삼 감독의 <스틸 플라워>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을까
2018-06-12
글 : 김범삼 (영화감독)

감독 박석영 / 출연 정하담, 김태희 / 제작연도 2015년

박석영 감독의 <스틸 플라워>는 내 인생의 변곡점에서 마주친 영화 중 한편으로 손꼽을 수 있는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석영의 <스틸 플라워>’라 쓰지 않고 <스틸 플라워>의 ‘박석영’을 내 인생의 영화라고 적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데뷔작 <들꽃>(2014)을 들고 그가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 <들꽃>의 출연배우 중 유독 정하담이 가슴에 박혀 들어왔다. 영화제 폐막 뒤 박석영 감독과 정하담 배우와 나는 해운대의 허름한 밥집에서 아직은 형체를 알 수 없었던 <스틸 플라워>의 이미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는 이미지보다는 집 없는 소녀 하담(정하담)이 길 위에서 추는 탭댄스의 사운드를 환청처럼 듣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왔다.

영화로 만나고 싶었던 하담의 <스틸 플라워>가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첫선을 보였을 때, 나는 전작 <들꽃>의 박석영을 다시 만났다. 내뱉을 수 있는 언어조차도 “할 수 있어요”, “돈 주세요, 일했잖아요”, “일하고 싶어요” 이 세 마디가 전부인 <스틸 플라워> 속 하담의 비루하기 이를데 없는 현실의 삶이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에 세워진 철제 구조물 위에서 부서져버릴 것 같아 나는 결국 다시 눈물을 흘렸다. 하담이 웃는 듯 우는 듯 바다를 쳐다보며 응시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과 세상을 향한 감독 자신의 시선과 사실상 다르지 않다. 이성과 논리의 세계를 지향했던 우리가 감당하기엔 불가해한 일년 전 바다의 참사를 기억할 때마다 권력이 자행하는 몸서리칠 지경의 광기와 마주쳐야 했다. 언어도단 같지만, 미치도록 영화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해 영화제가 폐막한 후, <스틸 플라워>의 ‘박석영’은 잠시 서울의 일정을 미뤄두고 며칠 동안 해운대에 더 머물고 싶다고 전해왔다. 내가 방구석에 내팽개쳐놓은, 사실상 엎어진 프로젝트인 카오산 로드를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를 몰래 읽은 후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다시, 영화를 쓸 수 있을까 회의에 빠져 있던 내게 영화의 그림자인 시나리오가 어떻게 한편의 영화가 될 수 있는지, 아니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일주일 내내 내게 질문을 해왔다. 밤마다 해운대 주변 카페에 마주 앉아, 우리는 카오산 로드에서 앞으로 마주칠 두명의 새로운 인물을 함께 만들어냈다.

일주일 동안 전투를 치르듯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을 때, 그는 촬영 때까지 영화현장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의 세 번째 연출작 <재꽃>(2016) 준비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시간이 좀더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촬영현장에 그가 어른거리는 순간 나 자신이 영화의 그림자 주변을 서성이는 존재로 남겨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는 과감히 영화적 이별을 감행했던 것이다. <스틸 플라워>의 ‘박석영’은 그렇게 내게 영화감독이 통과해야 할 앞으로의 숙제를 깨달게 해준 현실의 영화다. 카오산 로드에 첫발을 내디딘 후 10년이 지나 완성된 나의 데뷔작 <카오산 탱고>는 그렇게 출발했다.

김범삼 영화감독. 2018년 19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아 시네마스케이프 장편 초청작 <카오산 탱고>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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