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유일무이하다. 그의 영화 앞에는 대개 괴상, 괴이, 기묘, 파격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45일 동안 호텔에 머물다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버린다는 설정의 영화 <더 랍스터>(2015)처럼 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파격적인 소재와 설정들을 주저 없이 차용한다. 신작 <킬링 디어>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성서의 막달라 마리아 등 종교적인 요소들을 끌어와 또 한번 숨막히는 이미지들을 뽑아냈다. 2017년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공동 수상한 <킬링 디어>는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평가도 다소 엇갈린다. 란티모스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레퍼런스의 사용이 능숙하고 조율되어 있어 독특한 시각이 다소 줄었다는 아쉬운 목소리가 있는 반면 떨쳐내기 힘든 불편함이 전에 보지 못했던 잔혹미의 정점을 선보인다는 호평도 있다. 어느 쪽이건 확실한 건 이 영화가 당신에게 전에 겪어보지 못한 체험을 선사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질문이든 경탄이든 조롱이든 혹은 불쾌감이든, 이토록 부조리한 부조리극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 것 같다.
학창 시절 인간 세상을 빗댄 신들의 우화 정도로 생각하고 그리스로마신화를 읽다가 곤혹스런 감정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다. 현대 윤리 감각으로 봤을 때 신들의 행동은 고결하거나 성스럽기다기보다는 정서 불안 내지 성격 파탄에 가깝게 느껴졌다. 수시로 바람을 피우고 들킨 후에 책임은커녕 도리어 끔찍한 저주를 걸어버리는 제우스는 약과다.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테베의 왕비 니오베의 14명의 아들딸을 도륙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잔혹함이란 단어로는 표현하기 모자란다. 운명에 농락당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의 에피소드에 이르면 그 끔찍함에 무기력해질 정도다.
사실 신화는 하나의 재밌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원초적 욕망, 심리의 원형과 상징을 형상화한 부조리극에 가깝다. 서로 다른 가치들이 나란히 대립하는 딜레마는 논리적으로 이해될 대상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외적인 껍질을 벗기고 무기력함을 자각하도록 하는 무대인 셈인데 이 딜레마들은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차마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한 채 이 강요된 불편함에 매료되는 건 그 안에 언어적인 표현 이상의 충격, 혹은 본질들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가 정확히 그렇다.
이상하고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이고 동시에 불안한 이 영화는 그리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원제인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신성한 사슴 죽이기)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겪은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트로이 전쟁으로 원정을 떠난 아가멤논은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실수로 죽였다는 이유로 2년 동안 발이 묶인다. 아가멤논은 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자신의 맏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신탁을 받고 고민에 빠진다. 딸과 전쟁(개인의 영광)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가멤논은 결국 전쟁을 위해 딸을 희생시키기로 결정하는데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딸이 피 흘리는 사슴 형상으로 변신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자식을 통해 자신의 죄를 씻는 이 이야기를 빌려와 무표정의 복수극으로 변주해낸다.
그리스 비극의 연극 무대처럼
흉부외과 전문의 스티븐(콜린 파렐)은 그림으로 그린 것마냥 완벽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안과의사인 부인 애나(니콜 키드먼)는 16년차 부부답게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충실히 이해해준다. 두 자녀인 12살 밥(서니 설직)과 14살 킴(래피 캐시디) 역시 착하고 순종적으로 아버지의 말을 따른다. 어느 날 스티븐 가족의 일상에 16살 소년 마틴(배리 코건)이 찾아오면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스티븐은 마틴을 살갑게 대하는 듯하지만 어딘지 불편해 보인다. 어떨 땐 딸의 친구, 어떨 땐 죽은 환자의 자식이라며 말하며 마틴의 정체를 속시원히 밝히지 않으면서도 마틴의 요구에는 성실히 응답한다.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미스터리로 오래 잡아두지 않는다. 마틴은 스티븐이 의료사고로 사망케 한 환자의 아들이다. 스티븐이 죄책감에 마틴을 친절하게 대할수록 마틴의 집착은 점차 수위를 높여간다. 마틴은 스티븐을 집으로 초대하고 심지어 자기 엄마와 맺어지길 은근히 기대한다. 자신에게 죽은 아버지의 자리를 떠맡기려는 것마냥 일상을 침범해오기 시작하자 스티븐은 마틴과 거리를 두려 한다. 여기까진 평범한 복수극과 별반 다르지 않다. <킬링 디어>가 범속한 드라마에서 초현실적인 영역으로 넘어가는 건 그다음이다. 스티븐이 마틴으로부터 도망치려 한 순간 마틴은 스티븐에게 신탁을 내리듯 말한다. “내 가족을 죽였으니 선생님의 가족도 죽어야 균형이 맞겠죠? 첫 단계는 사지가 마비되고, 두 번째는 거식증에 걸리고, 세 번째는 눈에서 피가 나고, 결국엔 죽게 될 겁니다. 누굴 죽일지 한 사람을 선택하세요. 아니면 다 죽을 테니까요.”
저명한 의사이자 과학의 신봉자인 스티븐은 이 말을 믿지 않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밥의 다리가 마비되기 시작한다. 스티븐은 자신이 가진 의학지식을 총동원해 치료하지만 나아질 기미는커녕 딸 킴까지 다리가 마비되자 믿지 않을 수가 없다. 갑작스런 재앙에 아내 애나는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스티븐은 마틴과의 관계, 자신의 죄를 밝힌다. 애나는 “왜 당신의 죗값을 나와 자식들이 받아야 하느냐”고 따지지만 방법이 없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건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영화는 비현실적인 설정과 마틴의 초월적인 힘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의 말씀처럼 주어진 시련이고 카메라가 탐닉하는 대상은 압도적인 비극 앞에 선 인간의 고뇌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과장된 부조리극의 얼굴을 한 채 통제되고 엄격한 만듦새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전작인 <송곳니>(2009)나 <더 랍스터>와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설정과 상징적인 미장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이번에는 훨씬 차갑고 냉정하다. 이 영화는 ‘부조리극’이라기보다는 ‘무기력극’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인물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운명 앞에 절망하는 인간의 얼굴, 처연한 감정의 콘트라스트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스티븐의 비밀이 밝혀지고 선택과 희생을 강요하는 압도적인 비극으로 내몰릴수록 도리어 인간적인 감정과 표현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냉막해진다. <킬링 디어>의 진의, 혹은 기괴함이 여기에 있다. 그토록 과학을 믿었던 스티븐은 초월적인 상황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인 뒤 그다음을 고민한다. 이들에게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등 인간적이고 숭고하다고 여겨지던 행위 따윈 안중에도 없다. 스티븐은 자신의 잘못(의료과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학교를 찾아가 아들과 딸 중 누가 더 가치 있을지 상담한다. 아내 애나도 마찬가지다. 스티븐을 원망하고 울부짖던 애나는 이내 냉정을 찾은 뒤 자식은 시험관 아기로 또 낳을 수 있다고 말하며 선택을 종용한다. 자식들 역시 죽지 않고 선택받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며 경쟁 아닌 경쟁을 벌인다. 마치 모두가 감정이 휘발된 인형마냥 차갑고 이기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은 슬픔과 괴이함, 불쾌감을 동시에 자아낸다.
종교적 메타포로 장식된 부조리극
<킬링 디어>는 선택의 딜레마나 인간의 고뇌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처럼 보이진 않는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차라리 관객이 정돈된 그리스 비극 무대 자체를 아주 먼 좌석에서 관람하길 바라는 것 같다. 미스터리, 스릴러 등 장르의 틀을 빌려오기도 했지만 장르적 쾌감은 거의 휘발되어 남아 있지 않고, 배우들 역시 시종일관 밀랍 인형처럼 감정이 거세된 표정으로 연극적인 대사를 읊조린다. 때문에 어떤 통로로 접근하든 낯설고 난감하며 기괴하게 다가온다. 동시에 이야기로 설명되지 않지만 무표정한 부조리극 자체에서 기이한 흡인력이 발생한다. 관객을 불편한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다가도 영화는 종종 걸음을 멈추고 매혹적인 이미지들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건 마치 끔찍해서 더 매혹적인 악몽과도 같다.
인물 개개의 감정과 사연 대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기묘한 세계를 구성하는 크고 작은 세팅이다. 암전된 스크린에 웅장한 음악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과도하다 싶을 만큼 음악을 화면 속에 밀어넣는다. 심지어 종종 불쾌한 불협화음과 날카로운 사운드로 관객의 신경을 긁는데, 영화 전반의 뒤틀리고 일그러진 감정들을 직접 귀로 전달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카메라의 시선도 의미심장하다. 인물의 눈높이보다 높거나 낮은 곳에 위치한 카메라는 집, 학교, 직장 등 익숙한 공간들을 낯설게 보이도록 만든다. 연극 무대처럼 바꿔버린다고 해도 좋겠다. 인물을 담아내는 방식도 특이하다. 마틴을 잡는 카메라는 줌인을 곧잘 하는데 카메라가 가까워질수록 인물의 표정은 사라져 마치 그를 징벌 내리는 절대자처럼 보이도록 유도한다. 마틴을 연기한 배우 배리 코건은 감정이 메마른 눈빛과 기묘한 표정으로 관객을 휘어잡는데, 그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이야말로 무대의 중심에 선 기둥이라고 해도 좋겠다. 반면 주로 롱숏에 담기는 스티븐의 경우 인간이 아닌 징벌의 대상, 또는 제물처럼 그려진다. 빈번한 부감, 조감 숏도 이러한 신의 시선(혹은 무대 객석에 앉은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킬링 디어>는 종교적인 메타포로 가득한 영화다. 그리스 비극에서 출발하여 성서의 막달라 마리아를 경유하더니 어느새 희생과 속죄에 관한 결말에 도달한다. 전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좀더 복잡한 것 같다. <더 랍스터>가 환상적인 설정과 복잡한 묘사에 비해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주제들을 내세웠다면 이번에는 ‘속죄’라는 좀더 분명한 키워드를 가져가지만 이것이 슬픈지, 괴로운지, 웃긴지, 긴장되는지 알 길이 없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블랙코미디를 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종교적인 숭고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인간의 이기심에 관한 룰렛 게임으로 읽어도 틀리지 않고 잔혹한 부조리극으로 소화할 수도 있다. 밀도 있는 장면들과 촘촘한 미장센, 빽빽한 메타포 등은 두말할 것 없이 높은 평가를 받겠지만 그렇기에 장르적 답습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고, 그럼에도 이토록 불친절하다는 점이 되레 흥미롭다. 어떤 쪽이건 분명한 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환상적인 비전이 제시하는 불편함은 기꺼이 감내하고 즐길 만하다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이 현대에도 끊임없이 되살아나 우리를 자극하는 것처럼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조리극은 뇌리를 떠나지 않는 즐거운 수수께끼를 남긴다. 경탄과 혐오를 모두 담아, 이 영화가 주는 충격은 당신을 뒤흔들기 충분하다. 이토록 순수하게 불쾌한 쾌감을 완전히 외면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