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와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서스펜스를 대면하는 방식
2018-07-04
글 : 송경원
경계는 지우는 게 아니라 지워지는 것이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기는 예상 못한 지점에서 불현듯 치고 들어온다. 어쩌면 그건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니라 잉크 번지듯 익숙한 의식 한구석을 점령하는 것 같기도 하다. 최근 몇편의 영화에 대한 글을 쓰다가 위기감에 휩싸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감, 밀도 등 비슷한 단어와 표현들을 남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스펜스, 스릴러, 호러 등의 장르영화를 연달아 봤기 때문이라고 위안해보지만 서로 다른 영화를 보고 같은 표현을 쓴다는 건 직업적으론 단어의 샘이 메말라가고 있는 위기 신호다. 그 와중에 문득 이상한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내가 보고 있는 영화들이 진정 다른 영화들인가. 대개 사람들은 같은 내용의 영화를 보고도 서로 다른 언어로 스토리를 설명하곤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완연히 다른 색깔의 영화를 보고 비슷한 지점에 도달한 건 하나의 징후로 읽을 수 있지도 않을까. 역량 부족을 통감하면서도 최근 몇편의 영화들이 지향하는 효과, 이른바 서스펜스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서스펜스의 두 얼굴

서스펜스는 기실 하나의 장르라기보다는 효과에 가깝다. 긴장과 불안은 필연적으로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만들기에 거의 모든 영화가 서스펜스를 서사의 동력으로 차용한다. 잘 구성된 긴장의 공기를 접하면 으레 ‘서스펜스와 스릴이 충만한’ 따위의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곤 했는데 <유전>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등의 영화를 연속적으로 마주하며 이 관습적인 표현에 대해 미진함을 절감했다. 그렇게 쌓인 불만의 뇌관을 터트린 영화는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이하 <솔다도>)였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과 미국 CIA 그리고 복수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사이 음모와 전쟁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드니 빌뇌브의 전작(<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암살자의 도시>))과 전혀 다른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배경, 공간, 인물관계와 설정, 익스트림 롱숏으로 문을 여는 장면 구성, 조감과 적외선 비전 등 전작과의 연결고리는 노골적이라 할 만큼 차고 넘친다. 기능적인 반복과 도상적인 계승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편과 2편의 찍어누르는 압력 팽팽한 공기는 전혀 다른 질감의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둘 다 퉁 쳐서 서스펜스라는 단어 안에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향과 노선을 달리한 속편의 색깔 덕분에 방만하게 사용하던 이 단어의 결을 좀더 세밀하게 가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암살자의 도시>의 불안은 경계의 바깥을 목격하면서 피어난다.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계, 법(혹은 국경) 테두리 바깥 폭력으로 유지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무너져내린다. 케이트의 시선에 동화되었던 관객은 무력한 관찰자로서 거대한 폭력과 증오, 부조리의 편린을 체험하고 압도당하는 것이다. 이건 경계의 바깥, 미지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동시에 이 불안은 경계 안쪽에 머물 수밖에 없는 자의 비겁함을 담보로 한다. 다시 말해 <암살자의 도시>는 세계의 구성방식과 시스템의 부조리, 인지의 한계에 관한 공포를 기반으로 한다. 알레한드로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고 감정적으로도 닿아 있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나 진배없다. 그는 이해의 바깥에서 불안으로 자리잡을 때 더 매혹적인 짐승이다. 반면 똑같은 재료, 유사한 화면구성, 같은 세계관의 연장에서 진행되는 <솔다도>는 장면 자체의 긴장감을 기능적으로 소비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다. 완전히 늑대들, 시카리오들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영화는 전작처럼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진 못한다. 그러기엔 이제 세계가 너무 선명하다. 폭력, 돈, 욕망, 증오로 유지되는 세계는 좁게는 카르텔, 넓게는 국가와 테러리즘으로 확장된다. 세계의 작동원리를 충분히 설명한 영화는 이때부터 기능적이고 단절되었으며 안전한 불안을 화면에 빼곡히 채워넣기 시작한다.

장르는 일종의 안전장치다. 스릴러, 서스펜스라는 이름의 안전바가 내려오면 이제부터 극장 좌석에 몸을 파묻고 마음껏 즐기면 그만이다. 이런 장르들은 불안과 긴장을 목적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정보의 격차를 통해 관객과 게임을 시작한다고 봐도 좋다. 일종의 신호라고 할 수 있는 사운드가 깔리고 카메라가 천천히 화면을 훑기 시작하면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퍼진다. 여기서의 ‘알 수 없음’은 해당 장면에 제한되어 있다. 예컨대 우리는 알레한드로가 죽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든 복수의 방아쇠를 당길 것을 알고 있고, CIA 요원 맷(조시 브롤린)과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 폭력의 씨앗을 뿌리고 통제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즐길 수 있다. 장르로서의 서스펜스는 이 ‘알 수 없음’을 기능적으로 즐기는 쪽에 가깝다.

여기 두 종류의 모호함이 있다. <솔다도>는 내내 팽팽한 긴장으로 메워져 있지만 그건 경계 바깥 세계의 미지나 인지 바깥의 모호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때 사용되는 모호함은 개별 장면의 프레임 어디서 총격전이 시작될지 모르겠다는 정도의 모호함이다. 반복되는 사운드가 울려퍼지면 우리는 안심하고 이 안전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다. 반면 <암살자의 도시>는 이러한 긴장감을 세계 전체의 구조로 확장시켰다. <암살자의 도시>가 지향하는 모호함은 개별 장면을 넘어 인지 바깥으로까지 뿌리를 뻗는다. 그 결과 층층이 쌓여 무거워진 긴장의 공기는 스크린 바깥까지 넘어와 관객을 잠식하고 압박한다. 하나는 안전장치를 벗는 순간 쉽게 휘발되는 불안이고 다른 하나는 스크린이라는 경계를 지우고 현실까지 침투하는 무력감이다.

불안은 상상력을 먹고 자란다

우리는 무엇에 두려움을 느끼는가. 두려움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근원적인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릴 순 없으니 다시 개인적인 체험과 고백으로 잠시 돌아가겠다. 두려움의 얼굴에 대해 설명하긴 어려워도 그 이미지는 추상적이나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안에 자리한 깊은 호수에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집어던지면 칠흑 같은 밤바다가 피어오른다. 죽음의 이미지라 해도 좋겠다. 누구나 한번쯤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잠 못 드는 기나긴 밤을 지나왔을 것이다. 왜 그토록 죽음이 두려웠을까. 사람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나는 다음을 알 수 없다는 게 무서웠다. 어쩌면 이유와 의미를 찾아 헤매는 습관은 이때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이 옅어진 것 역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게 아니다. 의미를 발견해낸 사람도 있겠지만 내 경우엔 그냥 저절로 둔감해졌다. 쳇바퀴 도는 일상에 두려움의 감각 자체가 희미해졌다고 할까. 덕분에 우리는 일상을 버티고 산다. 하지만 간혹 어떤 영화들은 이 묻어뒀던 감각을 굳이 일깨운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각을 구태여 대면시키는 영화들은 퍼즐게임 이상의 질문을 남기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게 우리가 오락 이외의 목적으로 영화를 보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최근 본 영화 중 그 영역에 가장 근접한 건 <아직 끝나지 않았다>였다. 이 영화의 전체 밑그림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앙투안(드니 메노셰)은 아내와 가족을 소유물로 여기고 집착하는 폭력적인 남자이고, 미리암(레아 드루케)는 그런 앙투안을 피해 아들 줄리앙(토마 지오리아), 딸 조세핀(마틸드 오느뵈)과 따로 살고 있다. 앙투안의 집착은 후반으로 갈수록 심해져 아들을 닦달해 현재 머물고 있는 집을 알아내고 급기야 총을 들고 집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린다. 가정 폭력의 일면을 그린 이 영화의 이야기를 덩어리째 알고 나면 대부분의 긴장은 날아가버릴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긴장은 역전시킨 구성을 통해 발생하기에 여느 스릴러, 서스펜스의 장르적 관습에만 충실히 따랐다면 그래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번 봐도 무섭다. 근래 이만큼 일상 속 공포의 감각을 충실히 재현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이건 사실적인 묘사로서의 리얼리티와는 또 다른, 몸이 기억하는 감각의 환기라 불러 마땅하다.

영화는 이혼소송 중인 법정에서 마주하는 앙투안과 미리암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초반엔 앙투안이 어떤 사람인지 진의를 숨긴다. 관객이 목격할 수 있는 건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제한적인 반응뿐이다. 영화는 객관적인 팩트를 놓고 판단하고자 하는 판사처럼 관객 역시 신중한 입장에서 두 사람의 상황들을 유추하고 상상하도록 이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일찍이 스토리텔링의 비법에 대해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죠스>를 촬영할 땐 기계 상어가 생각만큼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무섭게 만들었다. 관객의 상상력에 기댔던 것이다.” 불안과 긴장은 대개 상상력의 산물이며 영리한 스토리텔러들은 이를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시 형식적인 틀에서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게임이다. 법정에서 출발한 영화는 앙투안의 집착을 따라 불안의 폭을 확장시키고 마지막에는 거의 호러에 가까운 공포를 선사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액션보다는 리액션, 그러니까 반응을 통해 상황을 유추하도록 밑밥을 깐다. 불안의 전조가 감지되는 건 어린 아들 줄리앙이 법정의 판단에 따라 아버지와 주말을 보내면서부터다.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고 부르며 거부하는 줄리앙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있으면서도 앙투안에게 계속 거짓말을 한다. 나중에야 그 거짓말들이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누나를 지키기 위한 방편임을 알 수 있지만 처음에는 그저 갈 곳 잃은 눈동자와 굳은 표정으로 제시될 뿐이다. 우리는 앙투안의 차에 탄 줄리앙의 표정에서 불안의 공기를 읽을 수 있다. 여기서 굳이 공기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아직까지 인과관계로 확정되지 않은 뉘앙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뉘앙스는 딸 조세핀의 생일 파티에서도 나온다. 축하 공연으로 준비된 노래를 열창하는 조세핀은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훑어본다. 상황에 걸맞지 않은 딱딱한 표정과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관객은 원인을 열심히 추측한다. 신나게 뛰어노는 사람들과 격리된 표정의 온도차가 지속되고 원인이 지연될수록 불안은 증폭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러한 뉘앙스로 뭉쳐진 영화다. 영화의 인과관계, 장르적 접근과 기술적인 요소와 무관하게 이 뉘앙스들이야말로 감각의 리얼리티에 도달하는 숏컷 중 하나다. 좁게 보면 서스펜스란 ‘알 수 없음’의 연쇄 끝에 큰 밑그림까지 도달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매 순간 (아직은)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제시되고 그 정보의 틈새를 상상력으로 메워나가는 과정이라 해도 좋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감정에 긴장감, 불안감, 두려움 등 꼬리표를 붙인다. 하지만 기실 그 감정의 결들은 세밀하게 구분되어 마땅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메운 공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미 공포를 겪어본 이가 전조를 감지했을 때 절로 몸이 딱딱해지는 반응’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길고 장황한 묘사로밖에 묘사할 수 없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이 불안감의 형태는 보편타당하면서도 유일하기에 다소 은유적인 표현이 오히려 정확하게 와닿을 것 같다.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영화라는 안전장치를 어떻게 걷어낼 것인가

오프닝부터 사운드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이 영화는 화면 바깥의 사운드로 핵심 정보를 제시한다. 오프닝을 예로 들자면 암전된 화면에 사운드가 먼저 들어오고 상상을 자극한 후 이미지가 주어지는 식이다. 이후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나 앙투안의 자동차 운전벨트 경고음 등이 불안이라는 모호한 감정을 직접적인 사운드에 실어 전달한다. 조용한 일상에 침범하는 사운드에 딱딱하게 굳은 데드마스크 같은 피해자들(줄리앙과 조세핀, 미리암)의 표정이 더해져 불안의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다. 몇 차례 신호가 학습되고 나면 나중엔 그 사운드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엔딩 시퀀스에 이르면 이러한 사운드 활용은 앞서 깔아놓은 복선을 회수하며 절정에 달한다. 조세핀은 생일 파티가 끝나고 뒷정리를 한 후에 홀의 불을 끈다. 암전된 화면은 공간을 뛰어넘고 어둠으로 연결되어 아파트 침대에 누운 줄리앙과 미리암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잠시뒤 시끄러운 초인종 소리가 화면을 침범한다. 어둠 속에 서로를 부둥켜안은 모자의 실루엣을 내버려둔 채 장면을 지배하는 건 앙투안으로 짐작되는 침입자의 거친 사운드다. 이윽고 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앞서 몇 차례 반복된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고 바로 이어 몰래 이사 간 아파트 문 앞까지 쳐들어온 앙투안이 거칠게 문을 두드린다. 감독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대신 사운드를 통해 어둠 속에 웅크린 채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인물의 감각을 대리체험시킨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장르의 형식을 충실히 활용하는 가운데 그걸 벗어난 영역까지도 빈번하게 가닿는다는 점이다. 정확히 이 영화의 불안감과 압박감은 스크린이란 경계를 뚫고 전이된다. ‘어떻게 그 경계를 투과하는가’ 하는 질문은 ‘어떻게 장르라는 안전장치를 걷어내었는가’로 바꿔 읽을 수 있다. 정보의 제한, 아이의 시점, 딱딱한 표정(리액션)들의 반복, 침입하는 사운드의 활용 등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이 영화의 기교는 두말할 것도 없이 탁월하다. 하지만 내 호기심을 자극한 장면은 다른 곳에 있다. 내내 앙투안이 무슨 짓을 벌일까 하는 두근거림으로 나를 압박하던 영화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앙투안이 수렵용 총을 들고 아파트로 침입한 순간 도리어 숨통이 틔었다. 긴장감의 절정이라고 수 있는 이 장면은 역설적으로 관객을 안심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물론 모자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절체절명의 긴장을 안기긴 하지만 동시에 내내 배회하던 불안감이 이 장면을 기점으로 선명한 형태로 안착하기 때문이다. 공포는 상상을 먹고 자란다. 두려운 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 앙투안이 총을 들었을 때 장르적 긴장은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지만 동시에 가장 불안한 순간 스크린이라는 안전장치가 내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나겠구나 하는 안심.

반면 이 영화의 엔딩은 불안의 공기가 우리 주변을 실제로 어떻게 배회하는지 다시금 환기시킨다. 상황이 정리되고 경찰에 신고한 앞집 할머니가 어둠 속에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 잠시 뒤 문을 열면 지치고 초췌한 모습으로 경찰과 함께 있는 미리암과 줄리앙의 모습이 보인다. 할머니를 발견한 경찰은 문을 닫고 할머니 역시 문을 닫는다. 그렇게 영화의 막도 닫힌다. 이 관찰자의 시점은 장르 속에 휘발될 뻔한 진득한 공기를 긁어모아 다시금 스크린에 퍼트린다. 실제로 두려운 건 찰나 같은 폭력의 순간이 아니라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 폭풍이 지나간 뒤에 남는, 경황 없는 적막감이다. 줄리앙과 미리암, 그리고 관객은 이제 작은 소음에도 다시 불안으로 뒤척일 것이다. 영혼에 새겨진 상처란 그런 법이다.

누군가에게는 대리체험, 누군가에게는 경험의 환기가 될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전체의 인과구조를 담는 대신 딱 한 사람 분량의 뉘앙스로 메워져 있다. 정보의 빈칸을 기능적으로 활용해 모호함을 유지하는 영화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감각을 상기시키는 영화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갈린다. 앙투안은 왜 그렇게 미리암에게 집착했을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물론 사연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모든 사연과 인과관계를 다 담을 필요는 없다. 그걸 설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영화는 안전장치를 한 롤러코스터의 레일 위에 안착한다. 반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긴장감 자체 또는 불안의 쾌감으로 즐기는 걸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상처의 감각은 스크린의 막을 뚫고 다시 진득하니 흘러내린다. 무릇 재현과 현실의 경계란 지우는 게 아니라 지워지는 것이다.

현실에 밀착한 서스펜스는 그것을 잡으려 뒤쫓지 않을 때 저절로 피어나는 법이다. 서스펜스를 목적으로 구성한 능동적인 긴장은 유희의 도구에 그치지만 효과로 주어진 피동적인 불안은 내가 원한다고 떨쳐지지 않는다. 내가 언급하고 싶은 건 바로 이런 종류의 서스펜스, 스크린 바깥까지 질척대며 사라지지 않는 불안이다. 여기 당신이 모든 상황을 지배할 수 없을 때 심연 속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다. 칠흑 같은 밤바다 속을 아직 모른다는 것, 여전히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안다는 것. 일상의 번잡함 속에 묻어뒀던 공포는 그렇게 스크린을 투과해 각자의 기억 속에 되살아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