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허스토리> 미래의 통역자를 기다리며
2018-07-05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낮은 목소리의 세상에서 당신께 띄웁니다

<허스토리>에서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인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기구한 삶인가, 그들의 몸에 남은 치욕적인 상처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간 여성들의 고단함인가, 뻔뻔한 일본 재판정의 법조인이나 반대시위자들인가. 그것을 마주한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 심정적인 공감인가,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하지 않는 일본 당국에 대한 분노인가.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명감인가, 적절한 피해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데 동참하겠다는 다짐인가.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보았지만 어떤 것도 보지 못했고, 이 모든 것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허스토리>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영화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투과한 세상의 이야기에 가까운데, 그렇다고 세상의 이야기를 위해 위안부를 소재로 이용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위안부 피해 여성의 사연은 영화의 모든 쟁점 속에서 단단히 중심을 잡는다. 영화가 다루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투쟁기가 ‘달’이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관객에게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도록 만든다. 누군가는 달을 보랬더니 왜 손가락을 보느냐고 타박할지 모르지만, 영화는 달을 묘사하는 방식만큼이나 그것을 가리키는 방식을 고민한다고 여겨진다. 곁에 있어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달을 비로소 인식하게 만든 그 손가락에 관해 더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관객의 대변자인 정숙이 사건에 다가가는 과정

정숙(김희애)은 관객을 위안부 피해 여성의 이야기로 안내하는 인물이다. 위안부 사안에 무감했던 정숙의 자각은 서서히 이뤄진다. 위안부 이야기는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처음 영화 속에 기입된다. 이때 실존 인물인 김학순 할머니의 실제 증언영상이 자료화면으로 쓰인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이를 지켜보던 딸 혜수(이설)와 달리 정숙은 그보다 떨어진 곳에서 식사 중이다. 정숙에게 생존자의 증언은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딸을 겁줄 때에 유용할 뿐이다. 며칠 뒤 위안부들의 사연이 보도되는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하는 신 사장(김선영)과 달리 정숙은 텔레비전에서 떨어진 식탁에 등진 채로 앉아 있다. 기차 안에서 신 사장으로부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신고전화 개설을 제안받을 때, 정숙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얼굴을 덮은 수건이 신 사장에 의해 홱 벗겨지면서, 정숙은 다소 수동적인 방식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는 대면의 순간을 유예하면서 그 간격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정숙의 변화는 앞서 언급한 장면을 전복적으로 전유하면서 이뤄진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배정길(김해숙)이 위안부 피해 여성임을 뒤늦게 알게 된 날, 정숙은 택시 안에서 위안부의 증언과 관련된 라디오 뉴스를 듣는다. “할마씨들이 쪽팔린 줄도 모르고…”, “보상금 탈라고 저런다”는 택시 기사의 망발에, 정숙은 “할매가 기사님 어머니면 어쩔 겁니까?”라고 따진다. 택시 기사의 무관심을 힐난하는 이 말은 불과 며칠전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정숙이 재판을 도와줄 변호사 이상일(김준한)을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정숙의 변화는 좀더 분명해진다. 늘 차창 안에서 카메라를 외면했던 정숙이 이번에는 스스로 창을 내린 채 카메라를 환영한다. 정숙이 적극적인 행동가로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이제 그녀가 관객과 비슷한 위치에서 벗어나 관객을 위한 전달자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때 그녀의 눈을 가린 선글라스는 그녀가 완전무결하기보다 모순적인 전달자임을 예고한다.

정숙의 사연은 피해자들의 투쟁 스토리에 완전히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며, 원고단의 이야기와 오케스트레이션을 이룬다. 가장 핵심적인 지점은 정숙의 여행사가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기생관광에 연루된 것이다. 여행사는 이미지 쇄신 측면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 신고전화를 개설했으므로, 기생관광은 피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이자 조건이다. 이는 단순히 극적인 설정만이 아니라 실제 맥락의 반영이다. 변영주 감독은 기생관광에 관한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을 만들면서 일본인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여성들을 만난다. 그중 한 여성으로부터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 이 일을 시작했으며, 그녀의 어머니가 위안부 피해 여성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감독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인 <낮은 목소리> 시리즈(1995∼99)를 제작하게 된 계기였다. <허스토리>는 정숙이 기생관광과 느슨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설정하면서 <낮은 목소리>에 내재한 문제와 반복되는 여성의 역사를 의식하는 것 같다. 이는 정길이 증언을 위해 정숙의 여행사를 찾았을 때, 그녀를 맞이한 인물이 기생관광 문제에 연루된 선영(이유영)이었다는 점에서도 옅게 드러난다.

이중의 적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지요.” 정숙의 말은 중의적이다. 싸우는 동안 스스로 변화할 극중 인물들을 일컫는 한편, 영화가 건드리고자 하는 대상이 세상으로 대변되는 ‘그들’이 아닌 관객을 포함한 ‘우리’임을 알린다. 정숙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돕고 있음을 알게 된 일본측 바이어와의 논쟁 장면을 보라. 일본 역시 피해자임을 강조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은 분노를 유발하지만, 영화는 일본측 입장에 대한 분노로 이 시퀀스를 끝맺지 않는다. 누군가가 밖에서 여행사 사무실 창문을 향해 던진 공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선영쪽으로 날아든 상황을 통해 가까이에 있는 적을 잊지 않도록 만든다. 돌을 던진 이는 일전에 정숙과 논쟁을 벌인 택시 기사였다. 그의 망언은 위안부 피해자를 대하는 당대의 인식을 축약한다. 일상화된 탓에 잘못이라는 것을 인식하기조차 힘들어진 그의 말은 ‘성’(性)을 금기시하는 문화 속에서 성폭행을 피해자의 수치로 여겨온 오랜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위안부 피해 여성이 증언하기를 망설였던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이 강요된 ‘부끄러움’ 때문이다(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를 참고하라). 정숙이 피해 증언을 설득하자 “내 이름도 나가는 거 아닌가”, “면상 다 까발리는 것 아니냐”는 생존자의 걱정스러운 반응에서 이들이 느끼는 거리낌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그 부끄러움을 정숙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로 돌려놓는다. 왜 그렇게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에 집착하느냐는 신 사장의 물음에, 정숙은 “나 혼자 잘 먹고 잘산 게 부끄러워서”라고 말하지만, 이내 “…는 아니고, 못 이겼으니까”라고 말을 고친다. 이러한 말 바꿈은 부끄러움을 언급하면서도 관객에게 이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영화의 태도를 보여준다. 정숙의 이야기와 위안부 피해 여성의 이야기가 엮이는 가운데, 최근 성폭력과 미투(#MeToo) 운동을 통해 쏟아지는 증언과 이에 관한 2차 가해의 상황이 환기된다. 우리가 오늘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역사적인 ‘허스토리’였음을 영화는 역설한다.

‘성’만큼이나 ‘돈’은 본질을 흐리기 좋은 대상이다. 보상금과 관련해 진의를 의심하는 시선은 피해 여성을 움츠러들게 한다.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 돈이 개입되자마자 운동의 진의마저 곤두박질치는 것일까. 영화는 가장 속된 것으로 인식되지만 누구나 필요로 하는 ‘돈’과 ‘성’의 문제를 낮게 깔아둔다. 정길이 증언을 결심한 이유는 아픈 아들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정길에게 ‘돈’이 필요했던 이유가 단지 속된 욕망 때문은 아니었다고 해도, “보상금은 나올라나”라고 묻는 서귀순(문숙)의 말을 은근슬쩍 삽입하면서 이러한 문제에 관한 싹을 완전히 잘라내진 않는다. 여행사 CEO 정숙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된 상황은 ‘성’과 ‘돈’의 문제를 함께 사유하려는 의도를 전면화한다. ‘성’과 ‘돈’의 결합체로 여성 캐릭터를 그릴 때 성매매에 연루된 피해자로 그려지기 마련이라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느슨한 연루자의 자리에 있는 정숙을 통해 불필요한 묘사나 감정적 과잉을 방지한다. 또한 일대일로 말끔히 해결되는 폐쇄적인 해결 대신 복합적인 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거리감이 면책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해고당한 직원과 언쟁하며 자신은 몰랐다고 말하는 정숙에게 상일은 “몰랐어도 사장이면 책임을 져야지요”라고 슬쩍 끼어든다. 상일의 말은 다시 위안부 피해보상을 둘러싼 책임 문제를 환기한다. 몰랐다고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책임과 국민의 관심을 일깨우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시모노세키의 법정에 대응하는 중요한 장소는 부산의 택시 안이다. 택시는 법적 책임이 아닌 일상의 책임을 묻는 작은 재판소다. 시모노세키로 출항하기 위해 부산항으로 향하던 원고단 4인이 “할매들 꽃단장하고 어디 가는겨”라는 택시 기사의 물음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부정적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년 뒤 다시 택시 안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원고단은 당당히 일본에 위안부 재판을 받으러 간다고 말하며, 자신의 변화를 새긴다.

재연이 아닌 통역으로서의 연기

<허스토리>는 실화영화이지만, 원고 4인방을 연기한 배우들은 실존 인물의 재연자가 아니다. 각자의 개성이 또렷한 4인의 원고는 굳이 실존 인물을 찾아 대조해보지 않아도 직조된 캐릭터임을 즉각 알 수 있다. 서귀순이 외유내강형이라면, 박순녀(예수정)는 외강내유형이다. 이옥주(이용녀)가 유연하고 아이 같다면, 배정길은 의연하고 어른스럽다. 상호보완적인 팀워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가대표’라는 박순녀의 자칭은 꽤 적절해 보인다. 응원하는 사람들과 취재진으로 북적이는 재판정 앞에 하얀 한복을 맞춰 입고 등장한 이들의 모습도 영락없는 ‘국가대표’다. 각자 캐릭터의 개성이 워낙 뚜렷한 까닭에 이들은 마치 한명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서로 다른 자아처럼 보인다. 이들은 일종의 통역자로, 위안부 피해 여성의 어떤 측면을 연기한다.

특히 옥주는 전체 극에서 상징적인 존재 같다. 불안정하고 가끔 제멋대로인 옥주가 재판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다. 옥주라는 캐릭터가 있어야 했던 이유는 오직 여성들의 기억과 진술에 기댄 영화에서 옥주만이 여전히 그날 그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옥주는 플래시백이 없는 영화의 플래시백이며, 재현이 없는 영화의 재현이다. 옥주가 기억에 사로잡혀 빌고, 울고, 호소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눈물 짓는 정길을 포함한 원고단의 반응숏을 삽입한다. 인물들은 마치 자신을 보듯, 서로가 서로의 진술 장면을 바라본다. 과거로 빙의한 채 몸과 표정으로 진술하는 옥주는 동료들을 대신해 감정을 발산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 같다. 이것이 실화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해석은 과도하거나 무지한 비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적어도 법정 장면에서 영화는 스스로 이것이 한편의 극임을 인식한다고 여겨진다.

10인의 원고단 중 주요 인물 4인을 연기한 이들은 이미 관객에게 특정 캐릭터로 각인된 배우들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가진 원래 이미지를 차용하는 동시에 이것을 비트는 방식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예수정이 최근에 떠오른 대표적인 어머니라면, 김해숙은 그보다 앞서 어머니의 전형으로 인식된다. <허스토리>에서 이들은 어머니가 아니거나 유사 어머니로 등장해 본래의 캐릭터를 환기한다. 문숙이 연기한 서귀순은 굵고 짧은 활동 후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춘 배우가 가진 미스터리함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문숙이 바닷가 어귀에서 등장할 때는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1975)에서 문숙이 연기한 백화의 미래처럼 느껴진다. 주로 세고 개성 강한 역할을 도맡아온 이용녀는 이번 영화에서는 대조적인 역할을 맡았음에도 순간순간 변화하는 모습에서 배우가 가진 원래의 개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경향의 정점에 있는 것이 정숙 역의 김희애다. 우아한 이미지가 강한 김희애는 <허스토리>에서 사투리 연기와 다혈질 캐릭터를 소화한다. 손님들의 불만 제기를 이유로 원고단이 일본에서 숙소 예약을 취소당했을 때, 모두가 침묵하던 중 정숙은 이들을 대신해 “씨발놈들”이라고 외친다. 이 순간의 통쾌함은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인 동시에 배우 김희애의 캐릭터 전환에서 온다. 워커홀릭인 정숙은 딸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나, 그렇다고 딸을 마냥 방치하지 않는 부모의 역할을 맡는다. 말 그대로 정숙은 ‘부’이자 ‘모’인 혼종적인 인물이다. 배우 김선영이 연기한 신 사장은 정숙과 대조적으로 기존에 ‘부산 아지매’로 인식된 수다스러운 인물에 닿아 있다. 신 사장은 정숙의 중성적인 성향을 훨씬 더 남성에 가까운 것으로 밀쳐내는 역할을 한다. 신 사장이 정숙의 가슴을 만지며 고생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고 하는 장면이나 정숙이 신 사장에게 별안간 입맞추는 장면도 이러한 맥락의 일부다. 정숙과 신 사장이 보여주는 케미스트리는 레즈비언 캐릭터를 영화 속에서 등장시켜온 민규동 감독의 인장처럼 보이나,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전형성을 둘러싼 문제제기에 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하며 여성에 관한 다층적인 반영체로서의 영화의 성격을 드러낸다.

법정 밖의 법정

피해 증언자 4인의 중 마지막 발언자로 등장한 정길은 일본 재판정을 향해 당당히 사과를 요구하며 “인간이 돼라”고 꾸짖는다. 그런데 영화는 정길의 발언에 대한 반응숏 대신 서슬퍼런 정길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정기수요집회 현장으로 전환된다. 집회 현장에 모인 사람은 마치 정길의 발언을 향한 것처럼 박수를 보내는데, 그 박수의 주인은 집회 발언자로 나선 혜수다. 이는 판결 결과를 보여주는 장면에 앞서 등장하며 배정길의 진술의 진짜 수신처가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수요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법정 밖의 ‘정숙들’로, 역사에 대한 저마다의 통역자들이다. 재판정에서 정숙은 원고의 진술을 그대로 전달하는 대신,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더한 과잉 통역으로 지적을 받았다. 이에 정숙은 자신은 원고의 진술을 생생하게 전달한 것뿐이라고 강변한다. 정숙처럼 우리에게도 역사에 반응하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통역해낼 것이 요구된다.

원고단이 사진관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것으로 끝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관부 재판에 참여한 실존 인물들이 2017년 4월 모두 세상을 떠났음을 밝히는 자막이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흑백 영정 사진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과거의 한때로 만들거나 추모하는 대신 단체 사진 찍기 직전 미소 띤 얼굴들을 보여준다. 마지막 순간 카메라는 이들의 맞은편에 있던 정숙의 얼굴로 돌아온다. 이 순간 정숙은 위안부 생존자들을 비로소 대면한다. 영화가 정숙의 얼굴로 끝맺는 데에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남은 이들에 의해 계속 통역되기를 기원하는 바람이 담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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