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영화들이 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를 즐긴다. 본 영화를 수십번 다시 보는 사람이 있고, 긴 글을 통해 감동을 옮겨 적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서도 영화를 찍은 장소에 직접 찾아가는 건 현실과 영화의 간격을 좁히는 특별한 체험이다. <펠리니를 찾아서>는 제목 그대로 이탈리아의 명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를 가이드 삼아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루시(세니아 솔로)는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엄마 때문에 자극적인 것들로부터 격리된 채 동화 같은 일상 속에 살아간다. 시대가 변해도 늘 그 자리에 있는 고전영화처럼 세상과 격리된 채 살았던 루시에게도 엄마의 곁을 떠날 때가 찾아온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불안에 떨던 때 루시는 우연히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를 만난다. 그렇게 펠리니의 영화를 가이드 삼아, 어린 시절 첫사랑이 간다고 했던 이탈리아를 향한 루시의 여정이 시작된다.
페데리코 펠리니를 아시나요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영화계의 독보적인 감독이죠. 오스카상 5회 수상에 빛나며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했습니다. 영화를 통해 시각을 바꾸고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꾼 감독, 영화 형식이 변화를 시도한 소수의 감독, 그중 한명이 페데리코 펠리니입니다. 그는 영혼을 잠식하는 어둠의 세상에서 마술 같은 힘을 보여주며 인간을 빛의 세계로 끌어냅니다.” 루시가 우연히 들어간 극장에서는 마침 페데리코 펠리니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영화는 상영 중인 다큐 영상을 통해 펠리니가 어떤 감독인지 간명하게 설명한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1945)에서 조감독을 맡으며 네오리얼리즘의 경향 아래에서 첫발을 디뎠다. <길>(1954)을 비롯한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영화들을 통해 두각을 드러냈지만 펠리니의 본질은 사실 특정한 형식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데 있다. 후반부 펠리니는 거의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감각적인 스타일까지 선보였는데, 자신의 비전을 구현할 수 있다면 거대한 세트는 물론 화려한 색감도 과감히 사용하곤 했다. 네오리얼리즘에서 출발했지만 종착지는 ‘펠리니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독자적인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신문사의 풍자 만화가 경험도 있는 펠리니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면의 탐구에 집중했던 스타일리스트이자 영화의 마법사였다.
이탈리아 기행
<펠리니를 찾아서>는 펠리니의 영화 속 흔적을 따라가는 영화인 만큼 자연스레 이탈리아의 명소들을 소개한다. 사랑과 낭만의 도시 베로나에서는 유명 관광 명소이기도 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가 등장한다. 줄리엣 동상에 손을 얹고 사진을 찍으면 사랑이 찾아온다는 속설이 있는 이곳에서 루시에게도 설레는 만남이 찾아온다.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원형경기장인 아레나 원형극장이나 베로나에서 가장 높은 탑인 람베르티 탑 역시 환상적인 광경을 선사한다. 베니스에서는 델라 살루테 성당과 산 마르코 광장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로마의 콜로세움과 판테온 신전, 나보나 광장의 트레비 분수도 빼놓을 수 없다.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하는 루시는 이탈리아의 명소들을 배경으로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순간들을 자아낸다. 펠리니의 영화에 흠뻑 빠진 루시에게 이탈리아는 그저 해외가 아니라 마법 같은 세계나 진배없다. 엽서에 넣어도 좋을 법한 감각적인 영상에 담긴 이탈리아의 풍광은 루시의 불안한 마음, 두근거리는 감정을 충실히 반영하여 그때마다 환상적인 색감으로 묘사된다. 감정을 기반으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줄곧 선보였던 펠리니의 영화처럼 말이다.
<길> 영화와 인생에 담긴 애수
<펠리니를 찾아서>의 핵심에는 <길>이 있다. 순박한 소녀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와 짐승 같은 곡예사 잠파노(앤서니 퀸)의 비극적인 여정을 그린 <길>은 네오리얼리즘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영화다.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와 인간을 향한 시선, 시적 운율과 리듬은 클래식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선보인다. 바람둥이 남자와 여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짙은 슬픔과 애상을 상징적으로 압축하는 이야기, 이른바 ‘펠리니애스크’는 이 영화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살이 되도록 세상과 떨어진 채 살아온 루시가 펠리니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젤소미나의 애잔함을 연상시킨다. “이 돌의 존재의미를 나는 모르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별도 그런 거야. 너도 마찬가지지.” <길>의 대사들은 이미 루시가, 아니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설명하고 있다.
회고담 자신을 되돌아보다
<길> 이외에도 오마주된 영화들은 한두편이 아니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달콤한 인생>(1960), 펠리니의 첫 컬러영화이기도 한 <영혼의 줄리에타>(1965), 은퇴한 탭 댄서의 이야기를 풀어낸 <진저와 프레드>(1986) 등 20여편에 이르는 펠리니의 작품들이 마치 펠리니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처럼 반영되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길>이지만 그외에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1974년작 <아마코드>다. 고립되고 외로운 삶을 살던 이탈리아 작은 마을에 초호화 여객선이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이 영화는 대중적인 화법으로 풀어낸 회고담 같은 영화로 펠리니에게 네 번째 아카데미상을 안겼다. 펠리니의 영화들은 자기 회고적인 성향을 띠는데 1970년 이후 <광대>(1970) 등의 대표작뿐 아니라 초창기 <길> 역시 유랑극단에서 생활했던 본인의 자전적 경험이 흠뻑 녹아들어가 있다. <펠리니를 찾아서>는 바트 심슨의 성우이기도 한 낸시 카트라이트의 각본 데뷔작이기도 한데, 낸시 카트라이트는 고교 시절 <길>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20년 동안 이 이야기에 매달려왔다. “나는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다른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주변에 어필해왔다.” 영화와 인생은 자꾸 뒤돌아보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닮았다. 어쩌면 문득 뒤돌아봤을 때 어느새 그 길이 영화가 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