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아이피>(2017)가 여혐 내용 때문에 집중적인 공격을 받을 거라고는, 박훈정 감독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몰랐던 것 같다. 박훈정은 <악마를 보았다>(2010)와 <신세계>(2012)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서커스를 다시 한번 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같은 서커스를 보는 관객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서커스가 더 좋아졌다면 커버가 되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 서커스가 재점검받아야 할 판이었다. 이 상황을 어쩔 것인가. 어떤 사람에겐 기회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손쉽게 주어진다. 박훈정은 <브이아이피>가 개봉되기 전에 이미 ‘한국판 <공각기동대>’라고 홍보했던 차기작 <마녀>를 준비 중이었다. 여혐으로 악평을 받았던 영화 다음에 차기작으로 여성 원톱의 ‘걸크러시’ 액션물을 내밀면 얼마나 그럴싸한 한방이 될 것인가. 하지만 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박훈정의 핸디캡이었는데, 이 사람은 지금까지 늘 여자 캐릭터를 쓰는 것을 어려워했고 두려워했다. 이런 창작자들은 자신이 여성 캐릭터를 쓰지 못하는 건 여자들이 절대로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 때 상상속의 퍼즐에 자신의 캐릭터를 끼워 맞추느라 이상한 괴물을 만들어내거나 처음부터 여성 캐릭터들을 만드는 걸 포기해버린다. 박훈정은 후자였고 가장 문제가 많은 부류였다. 그는 살아 있는 여자들을 상상하는 걸 너무 두려워해 자신이 만든 여성 캐릭터 대부분을 죽여버리거나 처음부터 시체로 등장시켰다. 그중 가장 끔찍했던 예가 <신세계>의 송지효 캐릭터였다. 어떻게 쓸지 몰라 당황하다가 중간에 죽여 쓰레기처럼 치워버리는 것. 몇몇 <신세계> 팬들은 이 끔찍함을 외면하고 이러한 캐릭터의 퇴장이 오히려 있을 수도 있는 여혐을 제거했다는 논리를 만들어 팬덤 내에 퍼트렸는데, 그건 지독하게 나쁜 변명이었다. 배제와 제거는 대부분의 경우 최악의 여혐 행위이다. 앞으로 어떻게 망가질지는 몰라도 일단 존재는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이라고 미리 선언해버리는 관객을 위해 창작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정작 <마녀>는 두려워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브이아이피> 이후 자기 검열의 노력 때문인지, 원래 각본을 쓸 때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기자간담회에서 박훈정은 후자라고 말했는데, 진위 여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며 어차피 박훈정도 잘은 모를 것이다.
<마녀>의 주인공 자윤(김다미)은 엄청나게 재미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박훈정은 자윤을 통해 우리가 전에 보지 못했던 무언가 새로운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자윤은 지금까지 수없이 쏟아져 나온 ‘미소녀 여전사’ 페티시물의 클리셰에서 거의 모든 재료를 가져와 만들어진 기성품 캐릭터다. 다행히도 이는 큰 단점이 아니다. 잘 다듬어진 관습이 존재한다는 것은 큰 모험 없이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마녀>의 주인공 자윤이 피해간 함정
자윤이 박훈정의 첫 번째 여자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관습 때문이다. 처음부터 ‘여자 캐릭터’를 창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미소녀 여전사의 설정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영화는 특별히 자윤의 여성성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주인공이 남자로 바뀌었다면 당연히 전혀 다른 영화가 나왔겠지만 자윤의 캐릭터 설정은 여성성과 큰 관계가 없다. ‘대기업의 비밀 실험으로 만들어진 초능력이 있는 아이가 탈출해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간다’는 설정이 여자아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영화 한편을 채울 재료로는 충분하다.
게다가 의외로 박훈정은 자윤을 만들면서 캐릭터의 페티시적 특성 상당 부분을 지워버렸다. 영화를 보기 전에 나는 이를 측정할 수 있는 단위를 하나 만들었는데, 자윤이 교복 입고 나오는 장면이 얼마나 되는지 재는 것이었다. 교복 차림이건, 사복 차림이건 <마녀>에서 자윤의 몸을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장면은 의외로 적다. 이게 자기 검열의 결과라면 좋은 일이다. 영화는 선정성을 강조하는 대신 제한된 캐릭터의 매력을 최대한 발휘해 관객에게 호소하는 방향을 택하는데 이것도 좋은 선택이었고, 여기서부터는 자윤으로 캐스팅된 김다미의 덕을 많이 본다. 아주 기본적인 설정만으로 캐릭터와 드라마를 끌고 가면서 그 빈자리를 신인배우가 가진 순진하고 무해하고 일반인스러운 이미지로 교활하게 채워넣는 것이다.
슈퍼히어로 액션과는 달라야 했다
첫 번째 문제는 어느 정도 무난하게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엔 두 번째 문제가 있다. 박훈정은 자신이 가진 소재의 독창성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뻔하디뻔한 이야기를 들고 와 그 신선함을 과장해 부풀리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니까 홍보 담당자가 어떤 영화를 ‘파격적이고 신선한 도전’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까지 그 말을 믿고 있으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마녀>를 보다보면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를 진짜로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는 소재의 평범함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배우 조민수가 연기하는 닥터 백이다. 원래 남자 캐릭터였던 인물이 성전환한 인물로,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여자 매드 사이언티스트’다. 이 정도면 자윤에게 들인 것만큼 공을 들여도 본전을 뽑을 거 같다. 하지만 배우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과물이 영 시원치 않다. 기본만 충실히 해도 관객의 관심을 얻는 자윤과 달리 닥터 백은 어느 정도 컬러풀한 개성을 살려야 할 필요가 있는데, 영화는 이 인물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닥터 백의 출연시간은 둘로 나뉘고 둘 다 몽땅 낭비이다. 하나는 박훈정식 마초 캐릭터의 양아치스러움을 과시하는 것인데, 또 다른 악당인 박희순의 미스터 최가 나오는 대부분의 장면이 그렇듯이 장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지루하다. 어느 정도 정제화되어야 할 장르 세계에 따분한 현실 양아치들이 들어온 것이다. 더 나쁜 건 닥터 백이 ‘매드 사이언티스트’ 역할을 하는 부분인데, 박훈정은 닥터 백이 10여분에 걸쳐 길게 늘어놓는 설명이 완전히 불필요하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 것 같다. <마녀>의 설정은 너무나도 도식적이라 설명이 필요가 없다. 당연히 설명할 시간에 그 진부함을 극복할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는 중반 이후에 국면 전환이 있는 스토리로 이를 채우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깊은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화의 액션을 보라. 국면 전환 이후에 자윤이 벌이는 액션은 단순한 슈퍼히어로 액션과는 전혀 다른 종류여야 하고 다른 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주인공의 성격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하지만 영화의 액션은, 요새는 지나치게 많은 슈퍼히어로 액션의 관습에 영혼 없이 휩쓸려 간다. <마녀>는 시리즈의 1부이고 이 이야기는 2부에서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이 들고 있는 소재의 진부함에 대한 인식이 필수적이다. <마녀>의 1부는 한없이 안전하기만 하다. <브이아이피> 이후론 그 안전함도 상대적으로 좋아 보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