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 출연 에밀리 드켄, 파브리지오 롱기온 / 제작연도 1999년
처음 가는 길을 갈 때, 처음 누군가를 만날 때. 처음이라는 단어는 내게 항상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던 말이다. 28살 되던 해에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의 난 새내기들과 함께하는 대학 생활에 적응하기에도 버거웠다. 단지 영화가 좋아서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대학을 갔지만 주변 사람들보다 영화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고, ‘이대로 대학 생활을 접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던 중 나의 두려움을 다시 설렘과 기대로 바꿔준 영화가 있다. 그 ‘첫’ 영화가 바로 <로제타>였다.
수업 자체는 자유로웠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커피도 마셔도 되는. 입학하기 전 익숙했던 공장 생활로 커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던 내가 커피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로제타>는 내 마음을 부여잡고선 내 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상업영화와는 다른, 예술영화라는 또 다른 ‘처음’을 선물해준 영화였다.
사실 영화는 늘 보던 상업영화와는 다르게 큰 사건 없이 시작된다. 로제타라는 한 소녀가 수습기간이 끝나고 공장에서 쫓겨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고는 로제타를 끊임없이 따라가며, 소녀의 일상과 선택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늘 보던 영화와 다르게 카메라는 지지대 없이 들고 촬영하는 핸드헬드 방식으로 촬영되고, 편집 없이 길게 움직임을 찍는 롱테이크 기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래서 화면은 거칠고, 불친절하게 관객에게 정보를 준다. 그런 빠른 화면과 거친 흔들림이 로제타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듯하다. 로제타의 삶 속에서 나 또한 영화 속 그녀의 일상에 동행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는 로제타의 일상을 지독할 만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헌 옷을 줍고, 강에서 숭어를 잡으며, 실업급여마저 나오지 않는 가난을 관객에게 마주하게 한다. 끝내 마지막 희망인 와플가게에서 겨우 얻어낸 일마저도 로제타에게서 빼앗아버린다. 안타까운 이 소녀의 행보를 보며 부디 나쁜 생각만은 하지 않기를 바라고 응원하게 되었다.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마지막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까지 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난 감독과 영화에 정말 감사하며 영화적 순간의 감동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로제타의 극단적 선택을 멈춰준 것이다. 물론 영화는 그 뒤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관객이 알 수 없게 끝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났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로제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도 같이 느꼈다. 그리고 감독에게 감사했다. 극중 만들어진 인물이지만 그 허구의 캐릭터를 현실 속에서 감싸안았다는 느낌이었다. 거칠고 지독하게도 현실적인 이야기지만 영화를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의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세상에 좋은 영화는 많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처음’이라는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꿔준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라 말하고 싶다. 물론 나에게 좋은 영화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영화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혹독한 현실 속에서 무거운 감정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영화의 경험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지금도 난 여전히 영화를 보고 울며 웃는다. 앞으로도 좋은 영화를 보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싶다.
김종우 영화감독. 단편 <그림자도 없다>(2013)와 장편 <홈>(2017)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