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크레더블2>는 시대의 욕망을 잘 포장하고 상품화할 줄 아는 영리한 영화다. 생각해보면 픽사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랬다. <토이 스토리>(1995)는 키덜트들의 향수를 공략했고 <니모를 찾아서>(2003)는 반려동물과 환경 문제를 연계시킨다. 2004년 <인크레더블>은 중산층 붕괴, 실직과 생계의 피로 등 당대 미국의 침체된 분위기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얼핏 세상을 뒤집는 역발상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픽사의 상상력은 항상 속도조절을 해왔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온건한 권유 정도랄까. 물론 서 있는 시점이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 다만 사실 그건 거울에 상이 거꾸로 비친 것일 뿐 픽사의 세계관과 구도는 언제나 익숙함을 전제로 해왔다. <인크레더블2>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위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해 캐릭터를 세팅하고 남녀의 위치를 전환시키지만 내막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훨씬 보수적이다.
히어로 가족을 대신하는 빌런 무비
“정치인들은 아무런 사심 없이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하지.” 통신 재벌 윈스턴 데버(밥 오덴커크)는 히어로 활동이 불법으로 규정된 이유를 정치인들의 불안에서 찾는다.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정치인들에게 히어로의 자기희생과 이타성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 불가능한 대상을 마주할 때 대략 두 가지 반응이 튀어나온다. 믿지 않거나 제거해버리거나. 정치인들로 대변되는 시스템은 히어로들을 지워버리고 금지시키는 쪽을 택했다. 윈스턴 데버는 이것이 정치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줬기 때문이라 판단하고 미디어를 이용한 히어로 이미지 개선을 시도한다.
<인크레더블2>는 두 가지 갈등을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히어로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문제, 다른 하나는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문제다. 히어로의 초법적인 폭력을 용인할 것인지 금지할 것인지는 <왓치맨>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다크 나이트> 등 여러 히어로영화에서 다뤄온 오랜 화두 중 하나다. 그런데 이 파트를 담당하는 건 인크레더블 가족이 아니라 통신 재벌 윈스턴 데버, 에블린 데버 남매다. 악당 스크린 슬레이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 또한 인크레더블(크레이그 T. 넬슨)도, 일라스티걸(홀리 헌트)도 아닌 통신 재벌 윈스턴 데버다. 이 영화에서 히어로의 활약은 거의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에 가깝다. 히어로들은 히어로로 사는 데 한점 의구심이 없다(다만 생계와 현실 문제로 피로할 따름이다).
오빠 윈스턴과 여동생 에블린은 히어로를 대신해 히어로의 정체성과 가치를 두고 대립한다. 스크린 슬레이버는 <아이언맨3>(2013)의 만다린(벤 킹슬리)처럼 실체 없는 아이콘에 불과하다. 스크린 슬레이버는 이름 그대로 미디어가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구현한, 일종의 이미지다. 영화는 대중의 맹목을 신랄하게 매도하진 않는다. 집중하는 건 이를 각자의 목적에 따라 활용하고자 하는 남매의 대립이다. 히어로를, 혹은 히어로에게 자신을 맡기는 대중을 혐오하는 에블린 데버는 히어로에게 오명을 씌워 그들의 존재를 영구히 불법으로 만들고자 한다. 반면 윈스턴 데버는 히어로의 낭만을 믿는다. 그가 범죄자에게 양친을 잃고 유산을 상속받은 설정은 ‘배트맨’의 오마주처럼 보인다. 만약 브루스 웨인이 어둠의 자경단이 되지 않고 CEO로 성장했다면 윈스턴 데버가 되었을 것이다. 1편의 빌런 신드롬이 <슈퍼맨>의 숙적 렉스 루터의 변주였다면 2편의 스크린 슬레이버는 시스템의 통제와 치외법권의 힘을 명제로 놓고 배트맨을 변주한다. 배트맨의 선한 의지를 이어받은 게 윈스턴이라면 어두운 수행방식을 이어받은 게 에블린인 셈이다.
빌런(들)이 히어로의 정체성에 대해 숙고한다면 그 시간에 히어로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크레더블 가족이 매진하는 건 성역할의 전환과 그에 따른 잔재미다. <인크레더블2>에선 인크레더블은 육아와 가사를 맡고 일라스티걸이 히어로 활동의 전면에 나선다. 이건 사실 남녀 문제라기보단 히어로 이미지 개선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며 히어로의 개성에 따른 결과다. 애초에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 인크레더블의 활동은 파괴 행위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육아와 가정을 돌보는 인크레더블과 외부활동을 하는 일라스티걸의 활약은 양성평등을 외치는 시대 분위기에 부합한다.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뒤집는, 픽사가 늘 해오던 접근방식이다. 그런데 이게 진짜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수냐면, 그렇지 않다. 반대로 강화한 뒤 팔아먹는 쪽에 가깝다. <인크레더블2>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하나는 당연히 히어로와 빌런의 대립이다. 히어로 합법화를 위해 일라스티걸은 바깥에서, 인크레더블은 가정에서 고군분투한다. 스크린 슬레이버와 히어로들의 대결 역시 이 대립의 연장에 있다. 하지만 진짜 예리하게 각을 세우는 건 실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뉜 세계의 충돌이다.
<인크레더블2>의 남성들은 모두 덜 자란 아이처럼 그려진다. 그들은 통제권에 집착하고 1차원적으로 반응한다. 아들 대쉬는 새집에 들어가자마자 리모컨으로 이것저것 눌러보며 즐거워한다. 사용방법 따윈 모르지만 상관없다. 인크레더블 역시 1등 히어로라는 자부심과 히어로 활동이라는 통제권을 아내에게 뺏기고 처음엔 속쓰려 한다. 단지 아내의 활동이 자신의 히어로 합법화와도 연결되어 있으니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내조할 따름이다. 가장 흥미로운 건 윈스턴 데버다. 윈스턴은 미디어를 이용해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도권을 쥔 건 동생 에블린이다. 인크레더블과 일라스티걸, 프로즌이 데버 남매의 건물에 처음 들어갈 때 구름을 뚫고 고층까지 올라간다. 이때 윈스턴의 사무실에서는 구름 위의 밝고 맑은 하늘만 보인다. 에블린의 평가처럼 “오빠는 아직 히어로를 꿈꾸는 소년”이다. 구름을 경계로 나뉜 이 높은 마천루는 에블린/윈스턴 남매의 단절된 세계, 히어로에 대한 냉혹한 고찰(구름 밑)과 대책 없는 낭만(구름 위)을 한장면에 담아낸다.
<인크레더블2>의 서사 구조는 <라이온 킹>과 흡사하다. <라이온 킹>에서 대결하는 건 심바와 삼촌 스카지만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세계, 그러니까 ‘프라이드 록’에 속해 있다. 프라이드 록이 상징하는 질서의 세계와 대립하는 건 심바가 잠시 몸담았던 ‘하쿠나 마타타’의 세계다. ‘욕심 버리고 즐겁게 살자’는 하쿠나 마타타야말로 프라이드 록의 정반대 지점에서 충돌하는 삶의 태도다. <인크레더블2>에서 남성들의 유아적이고 낙천적인 세계와 대립하는 건 신중하고 현실적이며 때론 냉소적이기까지 한 여성들의 세계다. 일라스티걸과 스크린 슬레이버(에블린 데버)는 방향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세계에 속해 있기에 단번에 교감할 수 있다(오빠는 끝까지 몰랐던 에블린의 정체를 일라스티걸이 눈치채는 건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관객을 웃게 하는 건 이들의 현실주의와 헌신이 아니라 남자들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다. 매력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잭잭의 활약처럼 남자들의 철없는 행동들은 대체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그려진다(오프닝에서 “강한 여자를 싫어하진 않아요. 나는 자존감 높은 남자니까.”라는 바이올렛의 남자, 토니의 고백은 노골적이다).
인크레더블은 극도의 육아 스트레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다. 아마 일라스티걸도 처음엔 그랬을 것이다. 처음부터 엄마로, 주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영화는 역전된 성역할을 통해 기존의 관습이 일종의 학습에 불과하다는 걸 드러낸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영화가 성역할을 역전시키는 방식 역시 고정관념에 기대고 있음을 간과할 순 없다. <인크레더블2>는 남성과 여성의 특색을 단순화하고 이분법으로 나뉜 세계 위에서 성립하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이건 ‘고정된 성역할의 역전’이란 이름표를 단, 잘 포장된 상품이다. 어쩌면 이 스토리가 진짜 성평등을 위한 고찰을 담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에블린 데버의 날카로운 푸념을 빌리자면 “내용보다 중요한 건 포장”이고, 픽사는 언제나 최신 유행의 포장지를 골라왔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걸 좋아할 만한 방식으로 포장할 줄 아는 탁월한 기술. 과연 대중의 욕망을 파악하는 자본주의의 후각과 소화력은 무시무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