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맨과 와스프>는 여성 슈퍼히어로가 주인공인 첫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영화이다. 블랙 위도우나 스칼렛 위치와 같은 캐릭터들이 어벤저스 멤버로 등장하긴 했지만 그들은 단 한번도 자기 영화를 가진 적이 없었다. <에이전트 카터>와 <제시카 존스>는 텔레비전 시리즈다. 마블에서는 첫 흑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블랙팬서>에서 그랬듯, 2019년에 나오는 <캡틴 마블> 영화를 첫 여자주인공을 내세운 기념비적인 MCU 영화로 홍보하려고 하는데, <앤트맨과 와스프>가 그 김을 살짝 빼버렸다.
그렇다면 그 기념비적인 영화의 타이틀은 <앤트맨과 와스프>로 넘어가는가? 아니, 그 어느 것도 기념비적이지 않다. 생각해보라. 21세기도 거의 5분의 1이 지나가는 지금 초능력을 가진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건 기념비적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런 영화는 당연하고 일상적이어야 한다. 10여년 전에 MCU와 무관하게 <캡틴 마블>이 나왔다면 다들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를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난 10여년의 MCU 역사가 심하게 뒤틀려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앤트맨과 와스프>, <캡틴 마블>(그리고 <블랙팬서>)보다 더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 그 이전에 나온 마블 영화 전체이다. 당연히 좋은 의미는 아니다. 10년에 걸친 연속극과 같은 시리즈를 만들면서 모든 주인공 자리를 오로지 백인 이성애자 남자(이 시리즈의 퀴어베이팅에 넘어간 수많은 관객은 그들의 망상 밖의 세계가 실제로는 이렇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을 텐데)에게 넘겨준 그 반동적 뻔뻔스러움은 이들이 다루고 있는 우주가 마블 코믹북 우주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 어이가 없다. 마블의 세계는 이렇게 일관되게 심심한 적이 없었다. 늘 빠르게 시류를 읽고 다양성을 추구했다. MCU의 영화들은 옛날 원작에 충실하느라 구닥다리가 된 게 아니라 나이 먹은 원작들보다 늘 뒤처졌다. 그리고 이 하얀 남자들의 세계는 지금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인크레더블2>, 심지어 넷플릭스의 <쉬-라> 리메이크에까지 시비를 걸며 징징거리고 있는 인종주의자/성차별주의자 팬덤에게 심적/논리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10년이나 지나서 겨우 여자 수를 늘리고 LGBT 캐릭터를 넣어주겠다며 (어느 세월에?) 립서비스를 한다고 해서 지난 10년의 독기가 빠지는 건 아니다. 이런 걸 병 주고 약 주고라고 하는데….
도입부가 너무 길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골백번 말했지만 <앤트맨과 와스프>에서 미셸 파이퍼가 연기하는 재닛 반 다인은 코믹북 세계에서는 어벤저스의 창립 멤버이고 리더였다. 이 캐릭터가 이렇게 뒤늦게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부터가 이 세계의 묘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리즈에선 재닛의 딸 호프가(코믹북에서 이 캐릭터가 어떻게 되었는지 사연을 읊으면 또 길어지니 넘어가자) 와스프인데 앞에 나온 영화 <앤트맨>에서 어떻게 구박을 받았는지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감독 페이턴 리드는 우리가 앞의 스토리를 이번 영화의 전주곡처럼 여기길 바라겠지만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는 게, 여전히 <앤트맨과 와스프>는 불필요한 타이틀을 단 생색내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리드의 잘못이 아니다. 세계가 워낙 그렇게 생겨먹었으니.
너무 구박하지는 말기로 하자. <앤트맨과 와스프>는 걸작과는 거리가 멀지만 꽤 좋은 영화이다. 가볍고 유쾌하고 날렵하다. 가지고 있는 야심과 하려는 이야기가 보기 좋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 다소 밋밋한 MCU 영화들의 공식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슈퍼히어로 유니버스의 세계가 심심한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조금씩 다른 개성과 능력을 가졌을 뿐, 대부분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비슷비슷한 역할의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MCU 영화의 악당들이 누가 있었는지 모두 구별하거나 기억할 수 있는 머글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배우가 나와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 이들 대부분은 슈퍼히어로가 이들을 퇴치하면서 슈퍼파워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최대한 주인공 캐릭터를 다르게 주고 시작점을 다르게 잡아도 클라이맥스는 늘 비슷한 음향과 분노의 반복이다. 이런 비슷한 일들을 겪는 사람들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고 해서 그 세계가 충분히 다양해질 수 있을까? 그들을 대립시킨다고?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이들 모두 라벨이 붙은 상품들이기 때문에.
<앤트맨과 와스프>는 이 반복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이들이 상대하는 빌런(한국어 사용자가 악당 대신 빌런이란 단어를 쓴다면 그들의 사고가 장르 클리셰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스트가 그에 가장 가깝지만 이 캐릭터에겐 (아직) 악의는 없다. 그냥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소니 버치가 이끄는 악당들도 있지만 이들 역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길을 막는 방해꾼에 가깝다. 방해꾼이란 면에서 고스트와 소니 버치는 앤트맨 스콧 랭(폴 러드)을 감시하는 연방요원 지미 우와 정확히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이 영화의 임무는 이들을 퇴치하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이들의 간섭을 피해 양자 영역 어딘가에 신비스러운 형태로 존재하는 호프의 엄마 재닛을 구출하는 것이다. 구출 플롯은 악당 타도만큼 흔하기 짝이 없는 기성품 공식인데, 이것을 슈퍼히어로 이야기에 넣자 엄청난 차별성이 발생한다. <아이언맨2>나 <토르: 다크 월드>의 줄거리를 기억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앤트맨과 와스프>는 사정이 다르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MCU에서 이런 이야기는 반복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는 회상 장면을 제외하면 사람도 죽지 않는다.
여기엔 구별하기 쉽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입체적으로 구성된 세계는 다양한 욕망과 다양한 기능을 가진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앤트맨과 와스프>의 캐릭터들이 추가되면서 MCU는 이들 머릿수만큼의 다양성을 확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소코비아의 대소동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에게는 중요하기 짝이 없지만 다른 MCU 영화와 비교하면 하찮기 그지없는 영향력을 끼친다. 그 하찮음만큼 이 세계는 그럴듯해진다. 스콧 랭이란 주인공의 하찮음 자체도 그 디테일의 일부이다. <앤트맨과 와스프>란 영화 자체가 큰 붓으로 투박하게 그린 그림 위에 현실적인 디테일을 더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지금까지 MCU에서 있어온 반복을 커버할 만큼 충분치 않으며,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우주의 생명을 반으로 줄이면 뭔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최종빌런이 벌인 대소동을 피할 수 있을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세계가 몇몇 히어로의 목숨을 날리면서 원상복구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이는 이들이 가진 장점을 심하게 날릴 정도는 아니다. 아마 이들의 이야기가 계속되어 다른 히어로의 이야기와 뒤섞인다면 이 디테일은 새끼를 치며 불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MCU 세계 자체를 바꿀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 세계는 아무리 개조해도 슈퍼히어로와 슈퍼빌런이 뒹굴기 위한 무대로 존재하는 곳이고 그 목표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말이 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