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와타나베 신이치로 / 목소리 출연 야마데라 고이치, 이시즈카 운쇼, 하야시바라 메구미 / 제작연도 2001년
2002년, 5평짜리 원룸에서 무자비한 식성으로 영화를 섭취하던 때였다. 성에 제거가 안 된 소형 냉장고의 문틈으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만화학원 입시반 아르바이트를 뛰며 모은 돈을 몰빵한 나의 사랑스러운 플레이스테이션2에 다양한 DVD를 박아넣고 천원짜리 만두를 씹으며 영화를 봤었다. 대부분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보다 4:3 11인치 브라운관 텔레비전으로 소비한 나는 종횡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뭐가 시네마스코프인지 비스타 비전인지 감도 없고 화면이 잘려 있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당시 내 취향을 돌아보면 말 그대로 잡탕이었다. 애니메이션부터 중국·미국·일본 영화를 가리지 않고 봤다.
나는 확실히 2시간 이상의 서사를 목격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연작을 통해 심연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를 탐닉하고 나면 술에 취한 것처럼 며칠 동안 그 생각만 하곤 했다. O.S.T를 반복해서 듣고, 캐릭터의 다른 자료를 찾아보고, 작품이 참고한 다른 영화들을 보는 등 일련의 덕질을 깊지 않게 즐겼다. 마지막으로 정리가 되면 머릿속 라이브러리에 저장하고 세분화해서 분류한다. 정말 주관적인 감정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샤이닝>(감독 스탠리 큐브릭,1980)이 스릴러 칸에 꽂혀 있고, <드라이브>(감독 니콜라스 빈딩 레픈, 2011)가 로맨스 칸에 꽂혀 있기도 했다. 그러다 나의 호기심을 강하게 건드린 장르가 있었는데 내 멋대로 말하면 ‘물 탄 장르’라고 불린 작품들이다. 나는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장르를 건드리고 있는 새로운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고전적인 규칙을 충실히 이행하는 작품을 특히 좋아했다. 그때 나에게 잡탕의 진수를 선보여 준 작품을 꼽으라면 <카우보이 비밥: 천국의 문>이다.
비밥(bebop). 비밥은 악기간의 부드러운 조화보다는 악기 각자의 개성 넘치는 연주를 중요시하는 장르이다(나무위키, <카우보이 비밥> 참고). 미래, 우주를 여행하며 범죄자를 잡는 현상금 사냥꾼(작중에서는 카우보이)들이 주인공이다. 회마다 범죄자들을 유쾌하게 검거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검거율은 꽤 떨어진다. 카우보이들은 범죄자들에게 측은함을 느끼고 때론 현상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찾아 과감하게 체포를 포기한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생활을 유지하는지 궁금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여행자처럼 느껴진다. 여행 과정 중 새로운 동료가 생기기도 하고, 과거의 적대자를 마주하기도 하며, 이야기는 전형적인 구조 속에서 다채로운 표현 방법으로 장르적 서사를 재현한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는 종반부를 향할수록 자신들의 아픈 과거를 직면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유쾌함 뒤에는 슬픔이 있고 이면을 알게 된 이후 주인공들을 더 애정할 수밖에 없다.
26부작이라는 긴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가 소모되지 않고 17년 동안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게 여전히 놀랍다. 죽기 전까지 이런 작품을 딱 100개만 더 보고 싶다. 욕심이 과한 건가? see you space cowboy….
이요섭 영화감독. 장편 <범죄의 여왕>(2015)과 단편 <더티혜리>(2013), <그의 인상>(2010), <다문 입술>(2010), <플라스틱 로봇>(2005)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