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킬링 디어>, 병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병원의 미로
2018-08-01
글 : 윤웅원 (건축가)
그는 알지 못하나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새 영화 <킬링 디어>는 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그리스 비극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감독은 “거대한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의 본능을 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신의 시대가 아닌 현재에서,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선택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갖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본 후 우선 떠오른 생각은 <킬링 디어>가 복수 서사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피에타>(2012)에 대해 쓴 글에 따르면(<씨네21> 874호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그녀는 복수를 했는데 그는 구원을 얻었네”), 복수 서사의 성공은 계량화할 수 없는 ‘고통의 등가교환’의 문제를 창조적으로 돌파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2010)가 범인을 끊임없이 풀어주고, <올드보이>(2003)가 15년의 시간을 인내하고, <피에타>가 불가능해 보이는 가해자의 엄마가 되는 것에 비하다면, <킬링 디어>의 복수 설계는 허무할 정도로 단순하다. 복수를 가능하게 하는 힘에 대한 설명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란티모스 본인은 딜레마에 빠진 인간의 행동에 더 관심이 있다고 했지만, 대중영화에서 개연성을 무시하고 서사를 만드는 것은 쉽게 관객의 반감을 일으키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설명 없음’이 새로운 복수 서사를 만들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븐(콜린 파렐)은 안과 의사 애나(니콜 키드먼)와 두 자녀, 킴(래피 캐시디)과 밥(서니 설직)을 두고 있는 성공한 심장 전문의다. 스티븐은 어떤 이유인지 10대 소년 마틴(배리 케오간)을 만나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중년 남자가 10대 소년을 만나는 것이 매우 낯선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진다. 이 만남에서 스티븐은 마틴에게 고가의 손목시계를 선물한다. 그리고 이어서 스티븐은 마틴을 집으로 초대해서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대응해서 마틴도 스티븐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이 장면들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마틴의 행동이 대구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의례적인 행동에서뿐만이 아니다. 밥이 마틴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 달라고 한 요구를 마틴도 동일하게 스티븐에게하고 있고, 스티븐이 마틴 엄마의 유혹을 거절하는 것처럼 마틴도 침대에 누운 킴을 거절한다. 이것은 이후에 마틴에 의해서 생겨날 어떤 사건이 ‘등가교환’에 관한 것임을 암시한다.

서로간에 존재하던 정중함은 스티븐이 자신의 엄마와 사귀기를 원하는 마틴의 요구를 거절한 이후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밥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반신이 마비된 후, 마틴은 시계 선물에 대한 답례로 스위스의 다용도 칼을 스티븐에게 주고 나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빠르게 설명한다. 마틴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믿는 스티븐에게 가족 중 한명의 죽음을 요구한다.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 ‘등가교환’이 불가능하다면, 스티븐도 가족 중 한명의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확신과 떼를 쓰는 소년의 천진함이 공존하는 태도를 보여주며, 마틴은 애나와 킴과 밥 모두, 하반신이 마비되고, 거식증에 걸리고, 눈에서 피가 나오면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스티븐에게 주어진 선택은 세명 모두의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누군가 한명의 죽음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병원을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조건, 병원 ‘프로그램’은 신체장기의 분류와 일치한다. 병원의 공간 구조는 호흡기, 순화기 등의 큰 카테고리 안에서 다시 몸의 상세한 각 부분으로 끝없이 분화된다. 따라서 이렇게 설계된 병원에 간다는 것, 혹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병에 해당하는 전문 분야를 찾아 공간을 유랑하는 지난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병원이 무대로 나오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복도가 유난히 많이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병원(병)이 만드는 ‘미로’는 병원(병)을 쉽게 알 수 없는 공간(존재)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란티모스의 다른 영화 <더 랍스터>(2015)에서 호텔의 싱글룸과 더블룸이 독신자와 커플을 상징하고 있다면, <킬링 디어>에서 병원은 역설적으로 ‘병’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영화에서 갑자기 밥이 하반신이 마비된 후 원인을 찾기 위해 진행되는 병원의 모든 절차들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수많은 검사가 진행된 후, 정신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에 동조하는 애나에게 심장의인 스티븐이 안과의인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나, 스티븐과 마취과 동료의사가 서로에게 마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전가하는 장면에서도 비슷하게, 질병의 분화는 책임과 원인을 불분명하게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병원 건축은 아마도 건축가의 인장이 제일 덜 드러나는 분야일 것이다. 건축가가 사용하는 공간의 효과나 빛의 연출, 혹은 심미적인 균형 같은 것들은 전문성의 체계 앞에서 그 효용성을 상실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기능적으로 잘 조직화되었나 하는 것이다.

병원의 역사는 종교로부터 독립하는 긴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의 병원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질병도 신처럼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병원은, 믿음이 병을 치유한다고 생각하는 종교시설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신의 자리를 갖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병원은 종교에서 독립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대체한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이 신의 전능을 대체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신을 대체한다. <킬링 디어>의 병원을 교회나 수도원으로 바꾸고, 의사를 신부로 바꾸어도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틴의 예언이 하나하나 실행되는 현실 앞에서 스티븐은 밥의 눈에서 피가 흐르는 순간, 결정을 내린다. 부인 애나와 킴과 밥을 소파에 앉혀놓고 산탄총을 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우스꽝스러운 이 장면은, 우연을 통해서 한 사람을 선택한다. 러시안룰렛을 연상시키는 방법, 스티븐은 복면으로 눈을 가리고 제자리에서 돌다가 총을 쏜다. 그렇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그리스 비극과 달리 신을 믿지 않는 스티븐은 ‘우연’을 선택한다.

나는 <킬링 디어>를 본 후 애나에게 하반신 마비가 일어나지 않는 점이 궁금했다. 곰곰이 생각하다 나는, 감독은 마틴이 갖고 있는 힘이 초자연적인 것, 전능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선택은 영화를 보고 떠올렸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1968년 작품 <테오라마>의 ‘방문객’과 <킬링 디어>의 마틴을 서로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다. 니콜 키드먼이 하반신이 마비되어 바닥을 기어다니는 모습이 궁금하긴 하지만, 이 사소해 보이는 선택은 <킬링 디어>가 갖고 있는 개연성의 딜레마를 극복하게 하고 있다. 란티모스의 새 영화 <킬링 디어>는 감독의 이전 영화보다 더 정교한 구성을 갖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관습적인 논리 체계를 흔들기 위해 선택된 낯선 설정이 <킬링 디어>에서는 좀더 유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래의 단락은 그의 전작 <더 랍스터>에 대해, <씨네21> ‘영화와 건축’ 연재 코너에 기고했던 이전 글 마지막 문장을 가져와서 영화 제목만 바꾼 것이다.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무수히 많은 정교한 형식들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아닌 누구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내가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결여, 우연, 모름 같은 단어들은 이 낯선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작은 창이다. 나에게 어떤 예술작품은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테오라마>가 그런 영화이고, <킬링 디어>의 마틴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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