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게, 쫄지 말고, 급할 필요 없이, 천천히 이야기하듯.”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음악 전문으로 활동해온 김성현 기자의 수첩에 적힌 문구다. 김성현 기자는 2018년 ‘롯데카드 무브: 테마라운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롯데콘서트홀이 진행하는 <김성현의 시네마 토크>(이하 <시네마 토크>)를 통해 본격적인 공연 진행자로 데뷔했다. 내년이면 20년차가 되는 베테랑 기자지만, 수첩을 가득 메운 글씨에선 남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올해 계획된 6회의 프로그램 중 지난 7월 21일 공연을 끝으로 절반의 일정을 마친 상황. 김성현 기자는 “나는 관객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목표인 떠버리”라는 말을 거듭했다. 겸손과 달리 그의 공연은 영화에 삽입된 클래식 음악을 쉽고 친근하게 풀이하는 것으로 벌써 입소문이 났다.
-영화와 클래식 음악을 함께 이야기하는 방식의 시너지 효과가 꽤 좋은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은 순수하게 보이는 대신 세상과 조금 동떨어져 있다. 전달자인 나로서는 계속해서 대중과의 연결고리를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엘가 음악의 낭만적 함의를 말하는 것은 전공학자나 연주자의 몫이다. 나는 저널리즘의 영역 안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2017)와 엘가를 함께 말한다.
-다양한 저서와 강연, 팟캐스트 등을 통해 꾸준히 클래식 음악을 전파해왔지만 대형 콘서트홀 무대는 처음이다.
=관객이 영화나 음악을 직접 접할 수 없는 환경에서 나의 코멘트만 전달하는 방식이 가끔은 아쉽기도 했다. 비슷한 일을 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지점이다. 이번 <시네마 토크>는 공연장에서 다 함께 영상과 음악, 해설을 접하는 포맷이기에 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
-진행자로 발탁된 주요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오늘의 클래식>(2010), <365 유럽 클래식 여행>(2012), <시네마 클래식>(2015) 등 책을 낼 때마다 기회가 되면 부지런히 북토크를 진행했다. 수도권의 학교, 도서관, 문화센터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적게는 6~7명, 많게는 수백명까지 청중의 규모도 다양했다. 자연스럽게 음악계 친구들이나 공연 기획자들에게 진행자로서의 자질을 알리게 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문화부 기자, 작가로서 주로 글을 쓰다가 본격적으로 말로 소통하게 됐다.
=전통적인 글의 세계에 살아온 사람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늘 준엄한 척하다가 코미디 배우가 된 기분이고, 일종의 공감각을 얻는 과정 같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결국 매듭을 잘 짓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말은 완전히 반대다. 끊임없이 풀고 또 풀어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고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관객이 음악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생각한다.
-대형 무대의 호흡을 직접 경험해보니 어떤가.
=완성된 영화를 늘 스크린으로만 보던 사람이 처음 촬영장에 가보는 경험과 비슷하지 않을까. 경험해보니 입장, 연주, 해설, 퇴장의 흐름이 익혀지고 그 안에서의 동선도 감지할 수 있게 됐다. 출입과 퇴장의 리듬, 멘트의 길이, 청중과의 교감 같은 디테일들을 직접 경험해 보니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더라.
-수첩에 빼곡히 대본을 적어둔 것을 보고 놀랐다.
=유머까지 완벽히 준비해간다. (웃음) 일단 시작할 때 농담을 던져보고 그날 객석의 반응을 보면서 철수할지 아니면 계속할지 전략을 세운다. 공연이 있는 날은 오전 11시에 리허설을 시작하는데, 내 수첩은 그 순간부터 실제 공연까지 쭉 무대 위 보면대에 펼쳐져 있다. 내게는 일종의 마음의 보조바퀴 같은 것이다.
-대중화를 위한 움직임이 꾸준히 있기는 하지만, 클래식 음악은 여전히 어렵고 방대하다는 인상이 짙다.
=클래식 음악이 어렵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한곡이 40, 50분씩 이어지고 오페라는 3, 4시간인 경우도 있다. 처음부터 즐거울 거라고 이야기하는 건 사기에 가깝다. 때문에 클래식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집안 내력을 통해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반면 록이나 팝 같은 대중음악은 또래 집단에서 수평적으로 퍼진다. 내 경우는 성악가인 조부를 비롯해 집안에 음악가들이 많았고, 친구들과는 로큰롤을 즐겼다. 그래서 나는 클래식 지상주의자, 순수주의자가 아니다. 음악만큼은 잡식성이다. 영화가 가장 대중적인 영역에 있다면 클래식은 확실히 소수의 취향이기에 둘은 서로의 좋은 가교가 되어준다.
-음악 작품 그 자체보다는 영화에 사용된 이유를 중심으로 해설한다고.
=영화 전문 기자를 1년 정도 했는데 곳곳에서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더라. 특히 예술영화를 언급할 때 그랬다. 나한텐 조금 이질적으로 다가왔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보니 '음악적'이라는 표현이 있더라. 후자는 내게 익숙하다. <시네마 토크>를 진행할 때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반드시 '영화 속의 음악'이라는 관점을 유지하려 한다. <쇼생크 탈출>(1994)에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산들바람은 부드럽게‘가 왜 쓰였을까 함께 고민해보는 식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려준다면.
=<에이리언: 커버넌트>(2017) 속에 삽입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는 세계의 종말이라는 테마를 대변한다. 영화적인 평가가 어떻든, 바그너의 음악 덕분에 나에게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한층 더 특별하고 가치 있게 다가온다. <덩케르크>도 비슷한 예다. 조종사 파리어(톰 하디)가 기름이 다 떨어진 비행기를 끌고 케르크로 향할 때,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가 흘러나온다. 실제로 추모곡으로 많이 쓰이는 곡이다. 님로드의 첫마디가 들리는 순간, 놀란은 뼛속부터 영국인이라는 걸 실감했다. 영화 비평의 영역에서 엘가의 음악은 <덩케르크>의 핵심이 아니다. 내게는 그 중요도가 뒤집혀 있다.
-영화 토크 프로그램들이 활성화되는 분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동안 영화와 공연 관람은 단선적인 활동이었다. 요즘엔 SNS를 통해 모든 소통이 빠르게 쌍방향으로 오간다. 그러니 영화 및 공연 관계자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의 접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비롯한 여러 개인과 단체가 새로운 시대 속에서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편으론 초조하고 혼란스러운 과도기적 상황인데, 모두가 어떻게든 노력 중이다.
-연말의 마지막 공연은 모차르트를 테마로 삼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12월 5일이 모차르트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웃음) 17560127, 17911205. 모차르트의 탄생일과 기일을 외우고 다니는데 음퀴(음악퀴즈)용으로 제격이다. 나는 미국 드라마 <빅뱅 이론>의 너드가 음악 버전이 된 경우가 아닐까. 모차르트에 대한 애정은 영화 <아마데우스>(2006)의 개봉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두번 보았던 경험과도 연결돼 있다. 모차르트 독살설에 시달렸던 살리에리가 자살을 시도하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1악장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음악이 있다니!”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상반기 일정까지 순조롭게 마쳤는데, 지금까지 공연을 자평해본다면.
=다행히 반응이 좋은 것 같지만 내 기준에서는 아직 ‘세모’다. 클래식 공연의 특성상 중·장년층 관객이 꽤 많은 편인데, 가족과 대화한다는 마음으로 더욱 편안하게 다가가고자 한다. 내 목표는 관객이 웃는 모습을 더 많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