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삼력 / 출연 김상석, 심재원, 서보익, 강찬양 / 제작연도 2007년
“영화 잘 봤어.” 10년 전, <쌍화점>에서 함께 연기했던 배우 조성윤이 자신의 동기 김상석이 주연을 한 영화가 개봉한다고 알려왔다. 나도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복수전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동기’와는 복도에서 마주치면 어색한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 한창 독립영화, 예술영화를 보러 다니던 때였고, 눈에 잘 띄지 않던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을 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곧장 극장을 찾았다. 마침 무대 인사가 있었고, 영화를 보고 나와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영화 잘 봤다고.
대형 연예기획사에 속해 상업영화와 TV드라마에 조·단역으로 출연하던 신인배우 백재호는 평소 즐겨보던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마음에 연예기획사에서 나와, 독립영화를 제작·배급·상영하는 회사에 들어갔다. 기대와 달리 예전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길어졌고, 이대로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나이만 먹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면서도, 딱히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고 시간을 무료하게 보낼 뿐이었다. 직접 영화를 만들어서 나라는 배우가 있다는 것을 알려볼까 싶기도 했지만, 내가 쓴 것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워서 실제로 만드는 시도까지 하지는 못했다.
30살 되던 해의 전주국제영화제였다. 함께 연극했던 배우 염혜주가 자신이 주연한 영화가 상영된다고 해서 영화제도 가볼 겸 전주에 내려갔다. 상영 후 관객에게 둘러싸인 그에게 다가가서 영화, 잘 봤다고 인사하고, 곧장 숙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념품이었던 이명세 감독님 노트를 꺼내 시나리오를 적어내려갔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띵!’ 그때였다. 오래전 봤던 그 독립영화, <아스라이>의 주인공이었던 김상석이 뜬금없이 문자를 보내왔다. 자기가 시나리오를 하나 썼는데, 한번 읽어봐달라고. 단편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분량이 생각보다 길었다. ‘띵!’ 이건 정말로 만들 수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단편 하나 만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2시간이 훌쩍 넘는 장편영화(<별일아니다>)를 만들어 개봉까지 했다.
<아스라이>는 계단에 앉아 있는 상호(김상석)에게 유리구슬이 쏟아져 내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그냥 무작정 쏟아져 내린다. 유리구슬은 깨지지도 않고 생각보다 높이, 사방으로 튄다. 그 와중에 상호는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가끔 머리에 구슬을 맞기도 하는데 꿋꿋하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방황하던 극중 상호는 결국 자신만의 영화를 가지게 됐을까. 김상석 감독은 <별일아니다> 이후 지금은 주로 시를 쓰고 있다.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로 만들면 최소 몇달에서 몇년이 걸리기 때문에 시를 쓴다고 했다. 독립영화는 잘돼봤자 관객 만명 넘기기가 어렵지만 그의 시를 읽는 사람은 최소 수만명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는 참 가성비가 떨어지는 작업인데도 우리는 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일까?
10년 전, 명동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석에게 “영화 잘 봤다”고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면, 나는 그와 <별일아니다>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죽었다>와 <대관람차>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10년 전 그날 극장에 갔고, <아스라이>를 보았다. 그래, 내 인생의 영화는 <아스라이>다.
백재호 <쌍화점>(2008)을 통해 배우 데뷔. 이후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동했고, <별일아니다>(2012)의 제작, 촬영, 연기를 맡은 이후 <산타바바라>(2013)와 <꿈의 제인(2016)의 프로듀서로도 활동했다. 2014년 첫 연출작 <그들이 죽었다>(2014)를 만들었고, 올해 두 번째 연출작 <대관람차> 개봉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