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이하 <폴아웃>)을 표현할 때 제일 많이 보이는 언어는 ‘액션’이다. <폴아웃>이 과연 최고의 액션을 보여준 작품인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최고의 액션을 정의하고 비교 및 계측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가능한가. 한편으로 액션을 잘 수행한 것이 좋은 액션인가, 반대로 단절된 몸동작 연기에 효과음, CG, 편집 등의 작업을 잘 입혀놓은 게 좋은 액션인가, 에 대한 대답도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다. 결국 액션에 대한 평가는 내 영역 밖이란 결론에 ‘쉽게’ 도달했다. 대신, 영화가 액션을 보여주는 방식을 먼저 살펴본 다음,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액션의 중심인 톰 크루즈가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읽어보기로 했다.
액션 하면 떠오르는 첫 작품이 D. W. 그리피스의 <동쪽 저 멀리>(1920)다. 클라이맥스에서 여자가 얼음판 위에 쓰러져 둥둥 떠내려가는 중이다. 릴리언 기시가 얼음물 속으로 머리카락을 빠트린 채 누운 장면을 직접 연기했다. 그녀를 발견한 남자가 얼음판 위로 폴짝 뛰면서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대한 폭포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 당시 영화의 특성상 별다른 커트도 없이 이 장면은 전개되고, 배우들은 꼼짝없이 눈 내리는 강 위에서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액션의 대가가 버스터 키튼이다. 그처럼 곡예사나 할 법한 위험한 액션을 펼치는 배우에게는 ‘애크러배틱’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액션 연기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배우가 먼저 위험한 액션을 자처하고 나서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평소 키튼을 존경한다고 밝혔던 성룡이다. 그렇다면 크루즈의 액션에도 애크러배틱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나는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2편에서 시리즈의 성격이 바뀌었다
다만, 키튼과 성룡과 크루즈의 연기는 다르다. 셋 다 몸소 액션 연기를 했다 하더라도 보여주는 방식이 다르다. 고전적인 입장에선 액션을 끊지 않고 연속적으로 보여줘야 배우의 실제 연기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몸과 몸의 액션을 그대로 전달하는 권투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로버트 로센의 <보디 앤드 솔>(1947)이나 로버트 와이즈의 <셋 업>(1949, 짠 경기라는 뜻)은 링을 풀숏으로 보여줄 때는 물론 미디엄숏일 때조차 쉽게 커트하지 않는다. 네다섯번의 펀치를 날려 상대 선수가 쓰러질 때까지 편집하지 않기도 한다. 이런 스타일은 존 휴스턴의 <팻 시티>(1972)가 나올 때에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변화를 보여주는 지점은 <록키>(1976)와 <분노의 주먹>(1980)이다. 로버트 와이즈의 <셋 업>에서 영향을 받은 마틴 스코시즈였지만 스타일은 달랐다. 아주 근접해 배우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여주고, 펀치를 날리는 손과 그 펀치를 맞는 얼굴을 따로 이어 붙였다. 크루즈의 액션은 현대적 변화를 수용한 결과다. 그는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모든 동작을 노출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매번 감독을 바꿔 제작되었는데, 감독마다의 인장을 발견하는 맛이 좋다. <폴아웃> 초반의 두 액션이 그러하다. 소규모로 진행되는 것이지만 아름다움이 잊히지 않을 정도다. 파리의 ‘그랑 팔래’에서 에단이 여러 명의 킬러를 상대로 몸싸움하는 시퀀스와 에단이 머릿속으로 악당의 납치를 상상하는 시퀀스가 그것이다. 고전기 영화의 카바레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전자는 일부러 느리고 서툰 액션으로 채워졌으며 엑스트라까지 가세한 촘촘한 눈빛 안무가 수준급이다. 관현악 연주 외에 음향을 제거한 상태에서 펼쳐지는 후자는 꿈결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두 시퀀스의 아름다움보다 감독의 재능을 더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영화의 첫 시퀀스다. 에단과 (부인이었던) 줄리아가 주례 앞에 서 있다. 영화 제목을 잊고 낙원처럼 꾸민 배경만 본다면 로맨스영화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위험 상황에서 에단은 행동으로 맞서지 못한다. 흡사 로맨스 역할로는 어울리지 않다는 듯이 에단의 존재는 광풍에 휩쓸려 사라진다. 다음 시퀀스에서 에단은 총을 든 남자로 부활한다. 어느덧 크루즈는 액션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배우가 되었음을, 감독은 그렇게 묘사한다.
<미션 임파서블>(1996)은 엄청난 액션영화가 아니었다. 브라이언 드 팔마 특유의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밴 유령놀이에 가까웠다. 출연배우들– 존 보이트, 에마뉘엘 베아르,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의 면면만 보아도 액션을 위한 캐스팅이 아니었다(곧 빙 레임스와 장 르노로 팀이 바뀌긴 한다). 크루즈도 요즘 사이먼 페그가 연기하는 분장술과 냅다 달리는 정도 이상을 탐내지 않았다. 1편 액션의 백미인 탄환열차 장면도 지금처럼 직접 찍은 게 아니다. 크루즈가 연기(상)를 욕심내던 시기가 있었는데 <미션 임파서블>과 <미션 임파서블2>(2000) 사이였다. <제리 맥과이어>(1996), <아이즈 와이드 셧>(1999), <매그놀리아>(1999)로 수업료를 지불한 그는 다시 그쪽으로 눈길을 돌린 적이 없다. 그는 <미션 임파서블>의 짧은 생도 머리를 접었으며, 장발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두 번째 연기의 장으로 돌입한 <미션 임파서블2>에서 시리즈를 거대한 액션극으로 탈바꿈시켰다.
톰 크루즈가 영화의 주인이 되는 방식
다시 위의 권투영화로 돌아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카메라는 링 주변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로앵글로 배우를 포착했다. 그런 앵글 속에서 배우는 자기의 무대를 지키는 거대한 존재로 비쳤다. 감독은 스타가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근래 만들어진 권투영화는 링 위에 설치된 거대한 화면을 거꾸로 카메라에 담는다. 몹 신에 실린 군중의 힘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배우는 어릿광대 볼거리의 자리로 떨어진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첫편부터 자신의 프로덕션으로 제작했던 크루즈는 단순히 제작자로서의 권력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영화의 주인임을 일찍이 선언했다. 그가 주인이 되는 방식은 당연히 연기를 통해서다.
<폴아웃>의 추격 장면에서 에단은 벤지(사이먼 페그)의 지시에 따라 파리 시내를 관통한다. 방향을 지시하는 벤지는 노트패드 화면만 보는 탓에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평면으로 보니 건물의 고저를 모르고, 나선형 계단을 오를 때면 같은 자리를 뱅뱅 도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데이터가 지체되면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기도 한다. 그것과 상관없이 에단은 무조건 달린다. 그가 고층 사무실에서 멈칫할 때 사무실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를 바라본다. 눈앞의 관객과 마주한 자신의 모습을 크루즈는 그렇게 인식한다. 그리고 창을 부수고 뛰어내려 미치도록 달리다 건물을 건너뛴다. 그다음에 벌어진 부상 사건은 알려진 바와 같다. 시리즈영화가 판을 치는 시대다. 배우들은 기껏해야 지분 참여하는 것으로 이익을 취하고, 평범한 직장인처럼 다음 편에 나올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한다. 그런 시대에 연기를 통해 영화의 주인임을 자각한 크루즈는 영화를 보는 패러다임을 변화시킨다. 곡예사 크루즈는 위대한 스타를 넘어 어느덧 예술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