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면에서 <어느 가족>은 가족영화로 브랜드화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안전한 작품인 양 보인다. 무구한 아이들을 동원한 <아무도 모른다>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과 같은 영화가 왠지 불편했던 관객이라면 정서적 몰입을 활용한 공감의 인본주의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와 텔레비전 작업에서 시작해 극영화로 영역을 넓혀온 고레에다 세계의 전력을 감안해도, 쇼타(조 가이리)의 입원을 계기로 영화의 질감이 홈드라마에서 다큐멘터리적 취조 장면으로 뒤바뀌는 장면을 전후해서 어떠한 이물감을 느꼈다. 이 정서를 되뇌며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가 진실을 구축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누구인가?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하층민 가족은 잡다한 좀도둑질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예외로 하면 외견상 번듯한 가족과 다름없다. 일용직 노동자인 남편 오사무(릴리 프랭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아내 노부요(안도 사쿠라), 남편이 남긴 집과 연금으로 살아가는 할머니 하츠에(기키 기린), 섹스 노동을 하는 아내의 여동생 아키(마쓰오카 마유), 부부의 아들 쇼타가 기본을 이루고 있고, 여기에 소녀 유리(사사키 미유)가 가족에 합류한다. 얼핏 보면 기존 가족에 유리가 편입된 모양으로 보이지만 영화가 점점 진행되다 보면 기존의 가족도 사후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게 된다.
가족의 생존방식은 어딘가 야릇하다. 가령 오프닝에서 오사무의 장바구니에 가득 담긴 물건은 일종의 위장술이며, 대형마트에서 훔쳐진 물건은 쇼타가 몰래 들고 나온 컵라면 하나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오사무와 쇼타는 어엿하게 돈을 주고 상점가의 크로켓을 구매한다. 그리고 이 가족이 전혀 노동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사무는 아파트 건설현장의 비정규직 노동자지만, 부상을 입어도 고용구조상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한다. 세탁소에서 일하던 노부요는 ‘워크셰어’를 구실로 노동시간이 단축되다못해 종내 회사에서 해고된다. 영화 속 대사처럼 “다함께 조금씩 더 가난해지는” 구조 속에서 고용상태가 가장 불안한 오사무와 노부요 같은 자들이 더 쉽게 배제된다. 그들은 진열된 상품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가게가 망하지 않을 정도”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괜찮다고 여긴다. 이 논리에 과잉 전시된 상품을 가져오는 것은, 잉여 존재로 낙오된 이들의 생존방식에 적합한 것이라는 합리화 과정이 내장되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가족을 생계형 도적 집단 혹은 윤리적으로 포용 가능한 불한당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좀더 들어가보자. 각 인물이 품은 과거사의 모호성은 영화에 자잘한 미스터리를 구축하고 이것이 영화의 전반부를 견인해 간다. 여기에 몇 가지 호기심이 자리잡는다. 우선, 이들은 누구인가? 미스터리의 계기는 소녀 유리의 유입이다. 가족이 ‘주워온’ 학대아동 유리로 인해 다른 가족 구성원의 과거사에 대한 궁금증도 확대돼간다. 그리고 각자 노동을 하며 연금과 같은 부수입이 있음에도 이들은 왜 좀도둑질을 하는가? 외견상 답은 간단하다. 이들을 가족으로 구성시킨 것은 일차적으로는 할머니의 연금, 즉 돈이다. 그리고 좀도둑질은 탐욕에 의해 추동된 것이 아니라 체제 밖 존재자들의 반문화적 집단행동이다. 좀도둑질은 단독으로 행해지기보다 둘 내지 셋 이상의 단체로 수행되는 놀이로서의 ‘서리’에 가까운데, 상품들이 과잉 진열된 대형 마트에서 주로 절도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제도의 압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글 초반에 던진 이물감과 관련해 영화 속 시간의 흐름을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영화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쉽게 내레이션이나 플래시백을 활용하며 사건을 압축하거나 그 흐름을 역전시키는데, 이때 관객은 피동적 객체로 놓이기 쉽다. <어느 가족>을 살펴보면 영화 속 시간의 흐름은 자연적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즉 영화는 작품에 내재된 미스터리를 해명하기 위해 플래시백을 활용하지 않는다. 가족의 과거 이력은 파편적으로 던져진 대사나 정황을 통해 관객이 적극적으로 구축해가야 한다.
영화 속 인물 각자는 고독한 단독자들이며 최소한의 인간적 생활을 위해 공동체를 형성했다. 여기엔 ‘돈’이라는 물질적 타산, ‘정’이라는 초물질적 기대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논리가 혼재되어 있다. 가족, 복지, 고용 등 제도의 외부에서 살아가며 사소한 불법을 일삼지만 어느 누구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판타지도 더해진다. 그런데 영화는 이에 머물지 않고 판타지의 장막을 찢어낸다. 계기는 쇼타가 절도를 하다가 다리를 다치고 가족의 정체가 사회에 폭로되는 과정을 전후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후의 영화는 앞선 홈드라마의 양식을 벗어나 다큐멘터리적 기법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후반부의 차가운 해부는 전반부의 온정적 담론을 부정하는가? 병원, 경찰, 상담소 등에 고립된 개인들은 형사나 상담원을 통해 진상을 추궁당한다. 그들은 아동유괴와 시체유기에 가담하고 방조한 범죄자들이다. 이들은 공범자들이며 반사회적 공동체의 일원이다. 취조와 상담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잔혹한 해부를 통해, 영화 속 인물들은 상대방의 진심과 의도에 혼란을 느낀다.
진실을 해부하고자 하는 이성적 시선에 저항하며, 유사가족의 인간적 유대를 신뢰하는 최종적 해석은 아마도 관객의 윤리적이고 심정적인 기대가 만들어낸 상상적 종합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본 <어느 가족>은 합의 가능한 진실에 도달할 의도가 없어 보인다. 구성된 가족이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고레에다의 가장 불친절한 영화 <디스턴스>(2001)와 상통하는 점이 많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산장에서 하루를 보낸다. 점차 관객은 이들이 ‘옴 진리교 사건’을 연상시키는 신흥 종교의 무차별 범죄를 자행한 신도들의 유족임을 알게 된다. 영화는 이들이 모이게 된 계기와 과거를 중간중간 취조실 장면을 통해 플래시백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어느 가족>에는 동기를 해명하는 플래시백이 없으며 영화 속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어느 가족>은 서민적 홈드라마의 외견을 모방하는 동시에 담론의 드라마적 봉합을 거부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반문화적(생산, 노동, 공교육, 재생산의 거부) 생존방식을 좀도둑 가족을 통해 보여주는 동시에 이 가족의 영속화에 저항하며 궁극적으로 이를 해체한다. 의례와 전통의 매개로서의 가족은 여전히 문화적 제도 내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엄마 혹은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 아이에 대해 부부가 느끼는 애잔함이 묻어나는 장면에서 신파성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영화는 이들을 가족으로 상상하는 순간 다시금 제도의 압력이 반문화적 상상력을 훼손시킬 것을 알고 있다. <어느 가족>은 그렇기에 고독한 낙오자들의 연대라는 감상적 향수를 넘어 반사회적 에너지쪽으로 선회하며 차가운 세계에 놓인 단독자의 시선에서 마친다. 그러므로 소년 쇼타와 소녀 유리에게 가족은 종착점이 아니라 경유지다.